미국·일본·독일·영국 등 주요국은 지난 20년간 의대 정원을 약 20~50%씩 늘렸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만성질환자가 늘면서 의료 수요도 매년 급증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주로 열악한 ‘지역 의료’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시작했다. 의사 부족은 지방일수록 심각하다는 데 국민과 의료계가 대체로 공감해 의사 단체의 집단 반발은 없었다고 한다. 공론화 과정을 거쳐 2000년대 초·중반부터 점진적으로 추진했고, 특히 부족한 지역·필수 의료 인력 증원에 초점을 맞췄다.
미국과 일본은 의대 증원을 추진하면서 ‘지역 의료’를 강조했다. 고령화와 지역·필수 의료 공백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은 2006~2007년 ‘신(新) 의사 확보 종합 대책’ ‘긴급 의사 확보 대책’을 내놓고 의대 정원을 늘렸다. 다만 지역 의료 수요를 면밀히 추계한 뒤 점진적으로 증원을 추진했다. 처음엔 의사 부족이 심각한 도·부·현(광역지자체) 위주로 10명씩 늘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체 의사 수보다는 의사 수 분배에 집중한 것이다.
일본은 2007년까지 7625명이었던 의대 정원을 2008년부터 조금씩 증원해 현재 약 9400명 수준까지 늘었다. 의대 졸업생이 일정 기간(9년) 지역에 남아 의무적으로 근무하는 ‘지역 정원제’도 운용 중이다. 9400명 중 1700여 명(약 18%)을 이 제도로 뽑는다. 일본 의사협회는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할 당시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에 협회에서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며 “지역 틀로 선발했던 것이 의사들을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일본 전국적으로는 지난 10년간 의사가 4만3000명가량 늘었다.
미국도 인구 1000명당 의사가 2.7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3.7명)보다 낮은 ‘의사 부족’ 국가다. 미국 의과대학협회(AAMC)는 오는 2033년 의사가 최대 13만9000명 부족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따라 2002년 1만6488명이던 의대 정원을 늘려 올해는 2만2981명이 됐다. 특히 지역 의료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최소 2년 이상 취약 지역에서 근무하면 연방 정부가 월 4000~5000달러를 보상 지급하고 있다. 제시 에렌펠 미국 의사협회장은 지난해 10월 연설에서 “수백만명이 의사 부족으로 치료를 못 받고 있고, 그 상황은 훨씬 악화할 것”이라며 “의사 부족 문제는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모든 미국 국민이 필요할 때 돌봐줄 의사를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은 인구 1000명당 의사가 4.5명으로 우리나라(2.1명)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2015년부터 의대 정원을 매년 0.7~2.2% 늘려 2022년 기준 1만1752명이 됐다. 인구는 우리나라의 1.6배지만, 의대 정원은 3배가 넘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00여 명을 추가로 증원한다는 방침이다. 지난해 6월 방한한 토마스 슈테펜 독일 연방보건부 차관은 “지방에 의사가 없지만 억지로 보낼 수 없어 의대 증원을 하는 것”이라며 “독일은 의대 정원이 충분하지 않아 우선 5000명 이상 늘리고 추가 증원할 것”이라고 했다.
영국도 코로나로 이탈한 의료 인력 등을 충원하기 위해 2031년까지 의대 정원을 1만5000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2021년(1만1000명) 대비 약 36% 많은 수치다. 다만 영국 의사들은 의료진 급여와 근무 환경 개선 없이는 의대 증원이 효율적이지 않다며 파업을 했다.
각국 의료 제도와 상황이 다른데 의사 수만 놓고 ‘줄 세우기’식 비교를 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독일·영국 등 유럽 국가는 의사가 사실상 공무원 신분인 경우도 많아 우리와는 사정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령화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2006년 이후 의대 정원을 3058명으로 동결했다.
이와 관련해 국내 ‘빅5′ 병원의 한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애초 의대 증원 필요성에 어느 정도 공감하는 의사도 적지 않았지만, ‘한 번에 2000명 확대’라는 증원 규모에 관해선 대다수가 고개를 젓는 것”이라며 “2000명 발표가 나오면서부터 내부 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다른 주요국처럼 의대 증원 목적에 맞게 필수·지역 의료를 살리는 정책을 보다 구체적으로 내놓고, 그에 맞춰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 의사를 늘리고 있는 일본 등은 의사 증가 후 국민들의 의료 서비스 이용이 늘어 보험 재정 악화 등 문제를 겪기도 한다. 2021년 기준 우리 국민 1인당 외래 진료 횟수(연간 15.7회)도 OECD 평균(5.9회)의 약 2.7배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