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빈 세브란스병원 교수, 조승연 지방의료협회장, 권용진 서울대병원 교수(왼쪽부터).

전공의들이 떠난 병원을 지키는 의사들은 23일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은 자기주장을 하더라도 의료 현장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의료 공백이 오래가면 응급·중환자들이 받는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며 “영국 등 유럽 주요국도 의사들이 월급 등 근무 조건을 놓고 파업하긴 하지만, 지금 우리처럼 중증 환자까지 버려두고 집단행동을 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조승연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은 이날 본지에 “전공의 공백 상태가 길어질수록 국민 신뢰는 떠나간다”며 “하루빨리 환자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조 회장은 외과 의사로 공공 병원인 인천시의료원장을 맡고 있다. 인천시의료원에서도 전공의 12명이 모두 사표를 냈다. 조 회장은 “전공의 의존 비율이 높지 않은 공공 병원들도 전공의 이탈 후 남은 의료진이 당직을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면서 “결국 가장 큰 피해는 환자들이 본다”고 했다.

전공의 의료 중단 나흘째인 23일 오전 대전 유성구의 한 2차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가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조 회장은 “외국에서도 의사는 환자 진료에 헌신하기에 존경받는 직업”이라며 “중증 환자를 버리고 집단행동을 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다. 이어 “전공의들이 병원을 오래 이탈할수록 국민 신뢰도 못 얻을 뿐 아니라, 의사업에 대한 기본 신뢰가 깨진다”고 했다.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환자 곁에 남아야 하고, 이를 거부하면 결국 환자와 의사, 의사와 정부 간 신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의사 면허는 국민 생명을 지키라는 뜻으로 준 것인데 이를 거부하면 면허가 의미 없다”고도 했다.

‘의대 증원’에 관해선 “27년간 정부가 의사 인력 수급 정책을 전혀 이행하지 못했다”며 “의사가 있어야 지역 의료도 살릴 수 있다”고 했다. 지금껏 누적된 인력 부족을 감안하면 ‘2000명 증원’도 “많은 숫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다만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은 기본 요건일 뿐 늘어난 의사를 필요한 곳에 제대로 분배하고 더 나은 환경에서 근무하도록 정부가 빨리 판을 짜지 않으면 증원은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정부를 향한 일부 의료계 인사의 격한 발언과 관련해선 “많은 국민을 떠나가게 하고 사태가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고 걱정이 크다”고도 했다. 최근 대한의사협회 차원에서도 ‘의사에 대한 정면 도전’ ‘정부가 의사를 악마화하면서 마녀사냥 한다’ ‘의료 대재앙을 맞이할 것’ 같은 발언이 나왔다.

조 회장은 전공의들을 향해선 “의사가 환자 곁을 떠나서 하는 말들은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없다”며 “당장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크겠지만, 의사들의 밥그릇 욕심이라고 치부하는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으려면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이날 인터뷰에서 “보건 의료 재난 경보가 최고 단계인 ‘심각’까지 올라가면서 전공의들이 법적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커진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환자뿐 아니라 본인들을 위해서라도 이제 병원으로 돌아와서 대안을 갖고 정부와 대화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를 향해선 “법치국가에서 준법이 중요하지만, 국민이 법을 잘 지키도록 하는 것도 정부 역할인데 이렇게 전공의들을 몰아붙이기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권 교수는 연세대에서 의료 법학을 전공한 법학 박사이기도 하다. 2000년 의약 분업 사태 당시엔 의협 의권쟁취투쟁위원회 총괄 간사를 맡기도 했다. 그는 “2000년 의약 분업 당시는 엄밀히 말해 약사들과 벌인 싸움이었고 약사들 얘기만 듣는 정부의 편향성을 지적한 것”이라며 “이번엔 의사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정부와 싸움을 벌이고 있어 파장 강도가 다르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연히 정책에 반대할 수 있지만, 반대하는 방법과 수단이 민주노총보다 과격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전공의들이 법률 자문을 한다지만 ‘국가의 보건 책무’를 명시하고 있는 우리 헌법과 의료법상 지금 전공의들이 행정 처분을 포함한 법적 처벌을 피할 가능성은 1% 미만으로 본다”고 했다. 의협 수뇌부 2명의 의사 면허가 취소된 2000년 당시보다 파장이 훨씬 클 것이란 취지다.

권 교수는 “전공의와 정부가 모두 물러서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의대 교수들과 대학 총장들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했다. 그는 “정부 입장에선 각 대학이 ‘정원을 2000명 이상 늘려도 교육이 가능하다’고 한 것이 주요 증원 근거인데, 교수들이 총장을 면담하고 각 대학은 증원 요구를 수정하는 것이 순리”라면서 “그래야 정부도 재논의할 여지가 생긴다”고 했다.

정윤빈 세브란스병원 일반외과 입원 전담 교수는 본지 인터뷰에서 “남은 의료진도, 자리를 비운 의료진도 환자에 대해선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라며 “하루빨리 같은 자리에서 만났으면 한다”고 했다. 정 교수는 입원 환자를 전문으로 돌보는 전문의다. 이번 사태로 전공의들이 이탈하자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교수와 전임의(전문의를 갓 딴 의사)들이 함께 뛰고 있다. 그는 “(내과·외과·소아청소년과·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 필수 의료는 누군가는 현장에 남아 끝까지 지켜야 하는 분야”라고 했다. 현재 병원에 남은 의료진 대부분이 당직에 투입된 상황에서 이달 말 전임의 이탈까지 본격화하면 ‘의료 공백’은 더욱 심각해진다. 정 교수는 정부를 향해선 “초반에 너무 빨리 의사들을 몰아세운 부분이 있는데, 10년 뒤 우리 의료를 생각한다면 당장 오늘의 의사들을 몰아세우거나 포기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전공의·전문의·전임의

’전공의’는 의대 졸업 후 전문의 자격을 따기 위해 종합병원 등에서 수련하는 ‘인턴’(1년)과 ‘레지던트’(3~4년)를 말한다. 레지던트를 거친 뒤 특정 분과에서 자격을 인정받으면 ‘전문의’가 된다. 이후 대형 병원에서 1~2년간 세부 전공을 공부하며 진료를 보는 의사를 ‘전임의’라고 부른다. ‘임상 강사’ ‘펠로’ 등으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