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정원 확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업무 중단에 동참한 20일 한 대학병원 수술실 앞으로 의료진과 환자가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27일 의사가 책임·종합보험에 가입하면 의료 사고 발생 때 법적 책임을 대폭 줄여주는 내용의 ‘의료 사고 처리 특례법’ 초안(草案)을 발표했다. 소송 부담 완화는 필수 진료과(내과·산부인과·소아과·응급의학과 등) 의사들의 오랜 요구 사항이었다. 지난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하루에 아기 넷이 사망해 의사 4명이 검찰 수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후 ‘소송 부담’ 때문에 필수 진료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더 심해졌는데 정부가 법적 지원책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조만간 의사들의 보험 업무를 담당할 의료기관안전공제회(가칭)를 설립할 예정이다. 의사가 이 기관의 어떤 보험에 가입하는지에 따라 법적 보장 범위는 달라진다. ‘책임보험·공제’에 가입 시 의료 과실로 환자가 상해를 입으면 공제회는 한도 내에서 환자에게 배상한다. 환자가 의사 처벌을 원치 않으면 검찰은 의사에 대해 공소 제기(재판에 넘김)를 할 수 없다. ‘반의사 불벌죄’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환자가 처벌을 원하면 수사해 혐의가 있을 때만 기소된다. 정부는 모든 의사가 의무적으로 책임보험엔 가입하게 할 방침이다. 필수 진료과 의사의 책임보험비는 정부가 지원한다.

의사가 ‘종합보험·공제’에 가입하면 보호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종합보험·공제’ 가입은 의사가 책임보험에 이어 통합보험까지 가입하는 경우를 말한다. 선택 사항이다. 종합보험은 의료 사고의 피해액 전액을 보장한다. 혜택은 비(非)필수 진료과 의사인지 필수 진료과 의사인지에 따라 다르다. 미용 등 비필수 진료과 의사가 종합보험에 들면 진료 기록, CCTV 위조 등 고의적 불법행위가 없는 한 환자의 ‘상해’ 피해에 대해선 기소되지 않는다. 아주 심각한 상해가 아니면 환자가 의사 처벌을 원해도 기소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픽=송윤혜

필수 진료과 의사가 종합보험에 가입하면 불법행위가 없는 한 환자의 ‘상해’는 물론 ‘중상해’ 피해에 대해서도 기소할 수 없다. 예컨대 응급 환자를 치료하거나 분만하는 과정에서 환자가 중상해를 입어도 기록 조작, 다른 부위 수술 등 불법이 없다면 의사가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다. 환자가 사망했을 때도 종합보험에 든 필수 의사는 고의적 불법이 없는 한 감형 받는다. 사망해도 불가항력일 땐 처벌되지 않는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뉴스1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례법”이라며 “환자를 두텁게 보상하고, 필수 의료 의사는 소신껏 일하게 해 이들의 이탈을 막는 데 방점을 뒀다”고 했다.

정부는 이 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하면 피해 환자도 전보다 더 쉽게 배상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병원에서 환자가 다치거나 사망하면 환자나 가족은 대부분 민·형사소송을 통해 의사의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했다. 그런데 관련 소송이 3심(대법원)까지 이어지면 몇 년이 걸린다. 또 소송을 해도 의료 소송(민사)에서 환자가 이기는 비율은 1% 수준이다. 의사 잘못을 환자 쪽에서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특례 법안에서 의사와 환자 모두 보험 혜택을 받으려면 복지부 산하 ‘한국의료분쟁 조정중재원’의 중재를 거치도록 했다. 이 기관의 전문 조사관들이 불법 의료 행위 등을 조사(감정)해 책임을 가리기 때문에 환자의 ‘입증 책임’과 ‘장기 소송’ 부담이 낮아진다. 정부 관계자는 “승소율 1% 소송보다, 중재를 받으면 환자가 더 많이 배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특례법 제정에 대해 일부 환자 단체는 “의사 특혜 법안”이라고 반발했다.

☞한국의료분쟁 조정중재원

의료 분쟁 때 의사의 과실, 불법, 고의성 등을 가리는 보건복지부 산하 준사법기관. 의료 분쟁을 조사하고 손해배상액도 산정한다. 2012년 설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