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 4기 환자인 이건주(78) 한국폐암환우회장이 18일 경기도의 한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호스피스 병동은 치료를 중단한 말기암 환자 등이 마지막으로 치료받는 곳이다. 이 회장은 한 달 전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이탈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의사는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 곁을 떠나선 안 된다”고 했었다. 작년 말 항암 치료를 중단한 그는 이날 병동 앞 공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본지와 인터뷰했다.
이 회장은 “암은 며칠 만에 병세가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며 “의료 파행 상황에서 수많은 암 환자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상급 종합병원들이 전공의 공백을 이유로 수술·입원·검사 등을 미루면서 암 환자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60대 췌장암 환자는 국립암센터에 입원해 2박3일간 항암 치료를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의료 파행으로 입원 자체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집에서 의료진 없이 약물을 직접 투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치료를 안 할 수 없는 암 환자의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료 파행이 길어지면 약물·주사 처방마저 늦어질 수 있고 (암 수술을 하는) 교수들까지 사직한다고 하니 환자들 사이에서 걱정이 많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의료 파행 장기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힘도, 결정권도 없는 환자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환자 목숨을 담보로 자신들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료계의 행위는 중단돼야 한다”고 말했다. 대장암 환자 B씨는 전공의 이탈 전에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항암 치료 일정을 예약했다. 본격적인 항암 치료를 하려면 암 세포에 대한 정밀 검사를 해야 하는데 병원 측은 “의사 부족”을 이유로 검사를 미루고 있다고 한다. B씨는 한달째 대기 중이다. 이 회장은 “항암 치료는 암 환자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라며 “최근 암 환자들의 생존 문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이 회장은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정리하려는 늙은 환자가 마지막으로 간청한다”며 “정부는 2000명 증원을 고집하지 말고 유연한 태도로 의료계와 원만한 합의를 도출해 지금 가장 고통받고 있는 환우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달라”고 말했다. “2000명 숫자를 고집하다가 (의료계와) 협상 가능성을 사라지게 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그는 한 달 넘게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에 대해 “그동안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하며 보여준 희생정신 덕분에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수 있었다”며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환자를 첫째로 생각하겠다고 밝힌 의사들이 이제 와서 할 도리를 안 하겠다고 하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언급하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했다. 의료계는 전공의 사직을 ‘직업 선택의 자유’라고 해왔다. 이어 “(의사들의 집단 사직은) 전쟁터에 투입된 군인들이 갑자기 전쟁 못 하겠다고 총 내려놓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의대 교수들의 집단 행동에 대해서도 “교수들의 집단 사직은 전공의 집단 이탈보다 더 나쁘다”고 했다. 환자와 전공의·의대생 상황까지 잘 아는 교수들의 파행 동참은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의료계는 전공의를 앞세워 개업의 등 전체 의사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며 “의대 교수들까지 합세한다면 전공의들의 어려운 처지와 환자들의 괴로움을 볼모로 잡고 싸움판을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했다.
이 회장은 이날 “외국 국적 의사들에게 취업 비자를 주는 것도 (현재 의료 공백의) 대책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양보와 설득에도 의사들이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의사 면허 개방’ 카드까지 꺼내야 한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