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본관 로비에선 흰 가운을 입은 한정우 소아혈액종양과 교수가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에 반대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었다. 피켓에는 ‘소아청소년과 오픈런은 의사 수 부족 때문이 아닙니다’ ‘2000명 낙수론은 필수의료과에 너무나 모멸적입니다’ 등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 3회(월·수·금) 환자 진료가 없는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동안 하는 피켓 시위를 이날로 여섯 번째 진행했다. 소아청소년과·내과 전문의인 그는 소아암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보는 ‘바이털(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 의사’다.
한 교수는 “환자 곁을 떠날 수 없어 이렇게 혼자 한 시간씩만 피켓을 들지만, 정부가 발표한 대로 의대 정원 2000명을 늘려도 이곳 소아과로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2000명을 늘려 ‘소아과 오픈런’을 막겠다고 한 건 거짓이란 얘기”라고 했다. 환자·보호자 중에는 한 교수에게 다가와 “의사들이 돈 더 벌게 해달라고 시위하는 것 아니냐”고 따져 묻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는 “반감을 가진 분들도 있지만, 그분들 말씀을 다 듣고 ‘2000명 증원’의 문제점과 소아과의 현실을 차분히 설명드리면 고개를 끄덕이시기도 한다”고 했다.
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는 추가 모집 등을 제외하면 2022~2023년 2년 연속 레지던트 지원자가 ‘0명’이었다. 세브란스 어린이병원은 현재 수십억원 적자를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교수는 “대형병원 소아과는 낮은 수가(건강보험이 병원에 주는 돈)에도 전공의들의 값싼 노동력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에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전공의들 입장에선 ‘사명감’ 빼곤 소아과를 선택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 출범 때부터 ‘필수의료’를 대폭 지원하겠다고 해서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최근 정부가 내놓은 ‘필수의료 패키지’에는 구체적 지원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한 교수는 “소아과 전문의들도 요양병원으로 가고, 전공의들도 힘든 소아 진료가 아닌 피부과 등으로 빠지고, 의대생들은 소아과를 외면하는 현실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이어 “정부가 담뱃세 등을 필수의료 재원으로 삼거나, 필수의료 수가를 몇 배씩 파격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2000명이 아니라 2만명을 늘려도 소아 진료를 하겠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정부가 전공의 의료 공백을 메우고 있는 의료진에게 지급하겠다고 한 ‘비상진료 지원금’도 거부했다.
한 교수는 “생명을 지킨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서, 아이들이 좋아서 소아암 진료를 택했다”면서 “‘2000명을 더 뽑으면 그중 일부라도 소아과에 갈 것’이라는 정부의 ‘낙수론’이 현재 남아있는 소아과 의사들의 자긍심마저 짓밟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