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성남시에 있는 ‘HD현대 판교 GRC(글로벌 R&D 센터)’에서 일하는 HD현대건설기계 유덕형(38) 책임매니저는 최근 오후 8시까지 종종 야근을 한다. 2020년생 아들, 2022년생 딸 둘 다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지만, 갑자기 야근하게 돼도 ‘어린이집 하원’으로 크게 마음을 졸이지는 않는다.
유씨의 두 자녀는 같은 건물 1층 직장 어린이집 ‘드림보트(Dream Boat)’에 다닌다. 이곳은 만 0~5세 자녀를 둔 임직원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아이들을 돌본다. 어린이집 법정 운영 시간(오전 7시 30분~오후 7시 30분)보다 3시간 길다. 드림보트와 비슷하게 아침 일찍 등원이 가능한 어린이집은 여럿 있지만, 밤 10시까지 운영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어린이집에 자녀를 보내는 임직원 부모가 대부분 정시 하원하고 늦어도 오후 8시쯤 하원을 마치지만, ‘오후 10시’라는 심리적 안정감이 크다고 한다.
HD현대(옛 현대중공업그룹)는 2022년 신사옥 HD현대 판교 GRC를 열었다. 사무·연구직들은 서울을 벗어나더라도 경기 판교 이남에서는 근무를 꺼리는 ‘취업 남방 한계선’을 고려했다. 본업(本業)인 조선·해양, 정유뿐 아니라 인공지능(AI) 분야 등 연구·개발 인력 확보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네이버·카카오 등 국내 대표 IT 기업과 ‘일하고 싶은 직장’ 경쟁을 시작한 HD현대가 가장 관심을 쏟은 시설 중 하나가 드림보트였다. 드림보트 어린이집 개원(2023년 3월) 후 그해 HD현대 그룹 신입 공채 지원자는 전년 대비 307% 늘었다. HD현대 관계자는 “이직 의향도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며 “‘일·가정 양립 지원’이 인재 확보로 이어졌다”고 했다.
지난 25일 찾은 어린이집 1층에는 ‘만 0세 반’부터 눈에 띄었다. 교실 밖 선반에는 아이들의 이유식 식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지난 2일 개원 1주년을 맞은 드림보트는 올해 만 0세반을 기존 두 반(16명)에서 세 반(24명)으로 늘렸다. 국공립, 민간 어린이집 어디든 0세 반 있는 곳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다른 나이보다 안전사고 위험도 크고, 보육 어려움도 훨씬 크기 때문이다. 회사와 어린이집은 “각자 사정으로 조기 복직해야 하는 부모들의 가장 큰 걱정이 만 0세 시기 보육”이라며 “0세 반이 없어도 직장 어린이집 법적 요건을 채울 수 있고 회사 안팎에서도 우려가 컸지만, 직원들의 업무 집중과 출산 장려를 위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직장 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준수하지 않고 이행 강제금을 내는 일부 기업과 달리 보여주기식 운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건물 입구에서 시작해 로비층 아래 공간까지 두 층 2222㎡(약 670평)로 조성한 드림보트에는 담임 교사 46명, 원어민 교사 2명, 보조 교사 13명 등을 포함해 직원 약 70명이 일한다. 원아 300명까지 가능한 시설이지만 교사당 원아 비율을 완화해 정원 215명(현원 203명)으로 운영하고 있다. 주주총회, 시무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아산홀’도 조립식 무대와 가변 좌석을 조정해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실내 운동장이 되기도 한다. 0세 반은 원아 2명당 교사 1명이 일하고, 간식을 포함해 하루 네 끼 메뉴가 제공된다.
◇원아 1명에 연간 1000만원 들어… 보조 교사 즉각 채용
회사는 어린이집 지원 예산으로 원아 1명당 연간 약 1000만~1100만원(연간 총 약 23억원)을 부담한다. 만 0세부터 5년간 다니면 약 5000만원을 지원받는 셈이다. 어린이집 다니는 비용은 무료다. 부모가 특별 현장학습 등 기타 비용만 부담하는데 그 경우에도 한 달 10만원을 넘지 않는다.
HD현대의 드림보트 어린이집 지원은 2021년생 딸과 2022년생 아들, 두 자녀를 키우는 HD현대 정기선 부회장의 ‘초보 아빠’로서의 공감대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드림보트 성현숙 원장은 “재원이 뒷받침되는 기업이라 가능했지만 모든 대기업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라며 “회사의 과감한 결단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개원 초기 밤 10시까지 근무하다 보니 일부 보육 교사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퇴사하기도 했다. 회사는 곧바로 연간 계획에 없던 추가 예산을 편성하고 보조 교사를 고용해 업무 부담을 덜어줬다.
회사는 법정 육아휴직과 별개로 만 6~8세 자녀가 있는 직원을 대상으로 최대 6개월 ‘자녀 돌봄 휴직’도 신설했다. 임신·출산 때는 500만원씩 축하금 총 1000만원을 주고, 초등학교 입학 전 3년간 외부 유치원을 보내는 직원에게는 자녀 1인당 연간 600만원, 최대 1800만원까지 지원한다.
HD현대건설기계 채나래 책임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국공립 어린이집에 보낼 때는 등·하원을 위해 한 달에 180만원을 주고 베이비시터를 고용했다. 채 책임은 “비용 부담 외에도 ‘워킹맘’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고 했다.
◇판교 IT 대기업과 인재 유치 경쟁
HD현대의 파격 지원에는 ‘일 잘하는 직원’을 확보하려면 여성 인재를 확대해야 한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네이버·카카오 등 IT 대기업들이 여럿 있는 판교 지역에선 출산·육아 복지를 고려한 이직도 종종 있다. HD현대는 사업 특성 때문에 여전히 남초 일터지만, 2030년까지 여성 채용 비율을 30%로 확대할 계획이다.
HD현대 복지가 소속 직원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경력 단절을 막기도 한다. HD한국조선해양 이진성 책임연구원은 두 자녀를 드림보트에 맡기는데, 다른 사기업에 다니다 휴직한 아내가 계획보다 빨리 복직을 준비하고 있다. 이 책임은 “드림보트를 통해 육아 부담을 덜어 아내도 경력 단절을 피하고 빨리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HD현대 관계자는 “2023년 채용 지원자는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했고, 기존 직원들도 이직 의향이 줄어든 것으로 분석돼 우수 인재 유치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했다. 드림보트는 작년 11월 근로복지공단이 ‘직장 보육의 우수성을 알리는 보육 현장 및 보육 프로그램’에 수여하는 ‘직장 어린이집 더-자람 보육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