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전공의 집단 이탈로 시작된 ‘의료 파행’의 핵심 원인은 하나다. 의대 증원 숫자다. 정부는 현재 3058명인 의대 정원을 내년부터 5년간 매해 2000명씩 증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2000명에서 한 명도 뺄 수 없다”고 해왔다. 이에 의료계는 ‘2000명 증원’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한 달 넘게 극한 대치를 벌여왔다.
현재 국내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점은 의료계에서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정부가 ‘2000명 증원’의 핵심 근거로 활용한 연구 보고서는 3개다. 이 보고서의 저자인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 신영석 고려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 권정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모두 보고서를 통해 “2035년엔 우리나라 의사가 1만명가량 부족하다”고 했다.
문제는 증원 규모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2000명 증원 안은 여러 의사 증원 안(案) 중 하나”라며 “정부와 의료계가 함께 다른 증원 방안들도 검토해야 할 시기”라고 했다.
①10년간 1000명씩 증원
학계와 의료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대안이다. 홍승봉 대한뇌전증센터학회 회장은 지난 19일 언론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의료 시스템이 한국과 비슷한 미국·일본·대만의 의대 정원 수준을 토대로 매년 1004명씩 10년간 증원해서 속도를 조절하고, 5년 후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 상황을 재평가해 의대 정원의 증감을 다시 결정하자”고 했다. 증원 기간을 두 배로 늘려 대량 증원으로 인한 의대 교육 부실화 등의 부작용을 줄이자는 얘기다.
그는 “정원 50명 미만의 미니 의대 17개를 50% 증원하는 데 증원분 중 372명을 사용하고, 나머지 632명은 비수도권 의대들에 배분해 지방 의료를 강화하자”고 했다. 이어 “2025년부터 5년 동안 증가하는 의대 정원 약 5000명은 이들이 사회에 나오는 10~20년 후의 의사 수 20만명의 2.5%에 불과하다”며 “미래 의사들의 환경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탈한) 전공의들도 동의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의 ‘2000명 증원’ 근거가 된 보고서를 썼던 신영석 고려대 교수도 지난 16일 한 학회에서 “1000명씩 10년 동안 늘리며 연착륙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정책의 결과를 평가하고 후속 조치를 구상하기에 (정부의 증원 기간) 5년은 지나치게 짧다”고 말했다.
②지방만 10년간 750명씩 증원
홍윤철 서울대 의대 교수는 10년간 지역 의대만 750명씩 증원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그 역시 정부가 의대 증원 근거로 삼은 보고서를 쓴 사람이다. 그는 최근 국회 토론회 등에서 “아주 장기적으로 보면 인구가 줄면서 의사 초과가 되는 시점이 온다”며 “1000명 이상의 증원은 위험하고 750명 정도가 가장 적절하다”고 했다. 그는 “의사가 부족한 곳은 비수도권이기 때문에 늘어난 750명을 모두 비수도권 의대에 배정해야 한다”며 “서울은 이미 의사가 많으므로 늘어난 정원을 배정해선 안 된다”고 했다. 또 “5년마다 의대 정원이 적정한지 재평가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했다.
③5년간 500명씩 증원
박은철 연세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작년 11월 의학한림원이 주최한 포럼에서 “노인 인구 증가 등으로 향후 10년간 지역 의료와 필수 의료 (의사 부족) 문제가 꾸준히 이슈로 거론될 것”이라며 “의대 정원을 2025년부터 2029년까지 5년간 500명씩 늘리자”고 제안했다. 박 교수 역시 의료 인력 검토 위원단(가칭) 같은 전문 조직을 만들어 5년 단위로 의사 인력 수급을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급이 수요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되는 2030년쯤 의대 정원의 유지·축소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④2000명 증원하고 이듬해 재평가
의료계 일각에서는 당장 내년에는 정부 발표대로 2000명을 증원하고, 그 효과를 따진 뒤 정원을 재조정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 교수는 “대통령 의중이 실린 2000명 증원에 반대하지 않는 대신 증원 1년 뒤 대폭 증원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효과를 평가해서 정원을 조정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와 의료계가 2000명 숫자에만 매달려 계속 대치하면 환자들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