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병원 79만원, 의원 80만원.
아기 분만 때 건강보험공단이 각 병·의원에 지급하는 돈(수가)이다. 같은 아기여도 서울대 병원에서 태어나면 79만원을 주고, 동네 의원에서 태어나면 80만원을 준다는 뜻이다.
대형 병원(상급 종합병원)은 소규모 의원보다 수가를 15% 더 받게 돼 있다. 대형 병원이 응급·중증 환자에게 고난도 수술을 하기 때문에 이런 가점을 주는 것이다. 이 가산 수가로 동네 의원은 대형 병원보다 수가를 더 받기 어려운 구조다. 그런데 같은 처치·수술을 했는데도 중환자를 보는 대형 병원보다 경증 환자를 보는 의원이 오히려 수가를 더 받는 ‘수가 역전’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의원의 수가와 일반 종합병원(100병상 이상) 및 병원(30병상 이상)의 수가 차는 더 크다. 의료계 인사들은 “정부가 지금까지 중증·응급 환자를 돌보는 대형 병원의 수가 관리를 부실하게 해왔다는 걸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수가 역전”이라고 했다.
이런 수가 역전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수가를 정할 때 넣는 ‘환산 지수(환산율)’ 차이다. 환산율이 높을수록 수가가 높아진다. 환산율은 건강보험공단과 각 병·의원 단체의 협상으로 매년 5월쯤 결정된다. 의원은 개원의 중심 대한의사협회(의협)가, 병원은 대한병원협회(병협)가 정부의 협상 상대가 된다. 한 전직 복지부 장관은 “의원 3만5000곳의 의사는 곧 ‘주인’이기 때문에 의협은 환산율 협상 때 매우 공격적”이라며 “반면 병협의 주력인 대형 병원장들은 주인이 아닌 ‘월급쟁이 관리자’여서 상대적으로 기세가 약하다”고 했다. 그는 “수가 많고 기세가 강한 의원의 환산율은 많이 올려주고, 병원급은 상대적으로 조금 올려주는 일이 장기간 이어졌다”며 “낮은 수가에 시달려온 대형 병원들은 전문의 인건비의 절반 이하인 전공의 중심으로 인력을 꾸렸다”고 했다.
수술에서도 수가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담낭 절제술이 대표적이다. 서울의 ‘빅5(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을 포함한 전국 상급 종합병원 47곳에서 담낭 절제 수술을 하면 건강보험공단은 병원에 125만원을 수가로 준다. 그런데 소규모 의원에서 이 수술을 하면 126만원을 준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는 “정부가 십 수년간 매년 수가 협상 때 목소리가 큰 의원들의 수가를 상대적으로 높게 잡고, 그렇지 않은 대형 병원 수가는 낮게 잡은 결과”라고 했다. 수술 난도, 환자의 중증도 등을 고려해서 환산율을 정한 게 아니라 ‘목소리 큰 순서’대로 정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낮은 수가 때문에 결국 대형 병원들은 월급은 적고 장시간 근무를 시킬 수 있는 전공의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수습 의사’인 전공의들이 이탈했다고 병원 수술·입원이 반 토막 나고 하루 10억~30억원 적자가 나는 허약한 국내 병원의 재정 이면엔 이런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일본 대형 병원들의 전공의 비율(10% 안팎)에 비해 한국 빅5 병원의 전공의 비율(30~40%)은 여전히 3배 이상이다.
병원과 의원의 환산율이 처음 역전된 시기는 2010년이다. 그 전엔 병원의 환산율이 의원보다 높았다고 한다. 2010년 이후 병원과 의원의 환산율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2021년부터는 10%포인트 이상 벌어져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상급 종합병원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환산율을 조금만 높여도 투입되는 총수가가 의원보다 훨씬 많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의원급 수가 인상률은 다소 낮추더라도 중환자를 보는 상급 종합병원과 중형 병원 수가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부가 수가 관리를 해야 했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성모병원의 한 교수는 “수가를 중환자 치료 병원이 아닌 의원 중심으로 배분하면서 대형 병원들은 값싼 전공의에게 의존하는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전문 병원 등 중형 병원도 피해를 보았다”고 했다.
전문 병원은 뇌혈관 환자 등 중환자 수술을 하지만 수가는 가장 낮은 편이다. 환산율은 의원보다 낮고, 병원이 클수록 더 많이 받는 규모별 가산 수가는 상급 종합병원보다 낮기 때문이다. 실제 산부인과 전문 병원(병원급)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받는 분만 수가(73만원)가 동네 의원(80만원)보다 적다. 상급 종합병원보다는 6만원 적다.
담낭 절제술도 전문 병원이 받는 수가(114만원)가 의원보다 12만원 적다. 한 대형 병원 관계자는 “정권과 상관없이 정부는 중증·응급 환자를 치료하는 필수 의료 분야 병원의 저수가 문제를 사실상 장기간 방치해왔다”며 “이번에 전공의 이탈로 중환자 수술·입원이 어려워지자 급조한 병원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의료계는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뇌혈관 전문 병원 전문의는 “응급 환자를 보는 중형 병원은 의원과 대형 병원 사이에 끼어 그동안 저수가로 가장 큰 피해를 봤다”며 “전문 병원 사이에선 적자만 안 나면 다행이란 말이 나온 지 오래됐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환산율을 정할 때 지금처럼 진료·수술별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차별 방식’에서, 진료·수술 난도가 높을수록 더 쳐주는 ‘항목별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모든 진료·수술의 난도를 고려하지 않고 규모(병원·의원)만 같으면 동일 환산율을 적용한다. 감기든 뇌출혈이든 환산율은 같다는 것이다. 의료계 인사들은 “항목별 방식을 바꾸면 중환자를 대상으로 어려운 수술과 처치를 하는 대형 병원과 전문 병원 등에 수가가 더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