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의 지난 4일 면담은 강경파가 장악한 전공의 사회의 현 상황을 잘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공의들은 의대 증원 논란의 핵심 축으로, 이들이 의대 증원에 반발해 대형 병원을 떠나자 수술·입원이 줄연기되는 의료 파행이 시작됐다.
이날 대통령 면담 직후부터 박 위원장은 전공의들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전공의 류옥하다씨는 면담 시작 1분 뒤 성명을 내고 “이날 만남은 독단적 밀실 결정”이라며 “정부가 신뢰할 만한 조치를 하지 않으면 (대화) 테이블에 앉지 않겠다는 것이 전공의 다수의 여론”이라고 했다. 이날 오후엔 “박단 위원장 탄핵에 동의해달라”는 성명서가 전공의 전용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박 위원장이 독단으로 대통령을 만났다”는 게 이유였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는 “정부가 ‘2000명 의대 증원’을 포기하지 않으면 대화는 없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지금 전공의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고 했다. 대통령 면담 이후 “정부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더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계 일각에선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일부 전공의들을 ‘백두대간 전공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통령이 ‘백기’를 들 때까지 ‘내버려두라’. ‘대화’ 시도자는 ‘간첩’이라는 뜻”(한 병원장)이라고 한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는 “지난달 한 대학 병원 A 교수가 이탈한 전공의들과 만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공의들이 일제히 일어나 회의장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이날 같은 시각 정부가 브리핑을 통해 “A 교수 등과 이번 사태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고 언급했다. A 교수와 대면한 전공의들이 이와 관련한 인터넷 뉴스 속보를 보자마자 대화 도중 회의장을 떠났다는 것이다.
박단 위원장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이탈 직전에 복지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문자메시지를 한 통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공의 선생님들과 환자 분들 모두 피해가 없게 박 위원장께서 중재해주시길 부탁드린다’는 취지의 내용이었다고 한다. 박 위원장이 이런 문자를 받은 게 알려지자, 일부 전공의들이 그를 향해 “간첩 아니냐” “배신자”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부 교수들도 대통령 면담 이후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정진행 서울대 의대 교수는 6일 본인 소셜미디어를 통해 “우리 집 아들(전공의)이 일진에게 맞아 피투성이가 됐는데, 어미·아비가 나서서 일진 부모(천공? 윤통?) 만나 담판지어야죠”라고 했다. 응급의학과 비대위도 7일 성명을 내고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와의 무의미한 만남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전 국민이 알게 됐다”고 했다. 정부 입장에선 ‘항복 안 하면 대화 없다’는 분위기가 강해질수록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은 어려워진다.
다른 관측도 있다. 대통령과 전공의 대표와의 면담 이후 전공의 사회 내에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의 한 교수는 “대화하자는 사람은 간첩이란 분위기에 눌려 눈치를 보는 전공의도 최소 30%는 될 것”이라며 “대화를 원하지만 침묵하는 전공의들의 복귀를 위해서라도 대통령과 전공의들의 대화는 계속돼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면담 이후에도 대통령실은 “전공의와의 대화는 늘 열려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전공의들 사이에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점점 생기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대통령과 전공의들 대화가 앞으로도 더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의료계 안팎에선 의정(醫政) 대화가 끊길 경우 10일 총선 후 ‘의료 위기’가 본격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거 후 여론 압박에서 풀려난 정부가 당초 방침대로 이탈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와 고발 등 대규모 형사·행정 처벌에 착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의대 교수들까지 가세해 현장을 이탈할 경우 응급·중환자 치료가 큰 차질을 빚는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