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환자가 이송되고 있다./뉴스1

정부는 의료계가 ‘통일된 의대 증원안’을 제시하면 2026학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한 것으로 24일 알려졌다. ‘통일안’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현재 고2가 입시를 치르는 2026학년도 입시부터는 의대 증원 숫자를 다시 검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의료 개혁 담화에서 “의료계가 합리적인 통일된 (증원)안을 가져온다면 얼마든지 논의할 수 있다”고 했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이후 정부는 관계 부처 회의를 통해 이를 더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의료계가 증원 백지화를 고집하지 않고 과학적 근거가 있는 통일된 증원안을 제시하면, 2026학년도 입시부터는 의대 증원 인원을 다시 연구·논의할 수 있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얘기다.

의대 증원 규모 재조정은 25일 출범하는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에서도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의료계가 그동안 요구해온 ‘의사 수 추계 위원회’ 같은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정부가 2026학년도 이후 의대 증원을 재논의할 수 있다는 의향을 보인 것은 당초 정부가 발표한 ‘의사 증원 장기 계획’도 수정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의대 입학생을 매년 2000명씩 증원해, 5년간 총 1만명을 늘리겠다”고 발표했었다. 그런데 의료계가 단일안을 갖고 오면 정부도 ‘5년간 1만명 증원’ 방침을 계속 고수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의대 증원 재논의가 시작되면 이는 전국 40개 의대의 정원 자체를 조정하는 것이어서 교육·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정부가 최근 허용한 2025학년도 의대 증원 조정은 정부가 배정한 ‘2000명’은 그대로 두고, 내년에 한해 각 대학이 일시적으로 모집 정원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정부가 의대 증원 문제와 관련해 연이어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의대 증원 재논의의 관건은 의료계가 ‘과학적이고 통일된 증원안’을 마련할 수 있는지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의료계가 통일된 입장을 마련하지 않으면 정부가 교수 단체와 합의한다 해도, 의사 협회와 전공의가 ‘동의한 적 없다’고 합의를 깰 수 있다”며 “통일안을 가져오면 정부도 재검토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다만 의료계가 요구하는 2025학년도 증원을 포함한 ‘전면 백지화’는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2025학년도 의대 입시 요강은 늦어도 다음 달 말에는 최종 발표해야 하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2026학년도 이후 증원분은 재논의할 시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응급실 앞에 줄지어 선 휠체어 행렬 - 24일 휠체어를 탄 환자들이 서울 한 대학병원 응급의료 센터 앞에 줄을 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오는 30일 집단 휴진하겠다고 밝혔다. /뉴스1

전직 복지부 간부는 “의사 사회는 병원 규모와 진료과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모래알 집단”이라며 “세부 직역 간 이견을 조율할 대표 단체가 없어 정부는 매년 수가(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협상을 할 때도 병원 단체와 의원 단체별로 따로 협의를 한다”고 했다. 그만큼 다른 분야에 비해 ‘통일안’을 내기 힘든 구조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 비대위는 24일 “의사 정원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미래) 의사가 얼마나 필요한지 추계하는 연구 논문을 공모하겠다”고 발표했다. 방재승 서울대 의대 교수협 비대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연구 논문을 마련하는 데는 8~12개월이 걸린다”며 “서울대 의대 비대위가 공모하는 연구 결과를 2026학년도 의대 정원에 반영하자”고 했다. 다만 이 결과가 나올 때까진 의대 정원을 늘리지 말고 현 수준으로 동결하자고 했다. 방 위원장은 이어 “만약 국민도 이 방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정부와 의사 단체도 양보하고 의사 수 추계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전공의와 의대생들도 복귀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방재승(왼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대학교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24일 오전 종로구 서울대 의대 융합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의료개혁과 필요 의사 수 관련 연구 출판 논문 공모를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방 위원장의 제안은 전공의 단체 등 다른 의사 단체와 합의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의료계 일각에선 “증원 규모에 대한 의료계 전체의 통일안을 만드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 2월 집단 이탈로 이번 의정(醫政) 갈등을 촉발한 당사자인 전공의 단체도 지금까지 “과학적 방법으로 의사 수 수급 추계를 다시 산출해 보자”고 했었다. 같은 의료계가 주도해 마련한 ‘미래 필요 의사 인력 추계’에 전공의도 동의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의료계 인사들은 “정부도 증원 재논의의 조건으로 ‘의료계 통일안 마련’을 언급했을 뿐, 증원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며 “서울대 의대가 발주하는 의사 수 추계 논문이 의료계 통일안의 초안(草案)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정부가 증원 규모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보이는 만큼 전공의와 교수들도 정부와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에 대한의사협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의료계 주요 단체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공의 단체는 여전히 복귀 조건으로 정부의 필수 의료 (지원) 패키지와 의대 증원 정책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 백지화 선언 없인 대화도 없다는 것이다.

의협도 전면 백지화를 고수하고 있다. 의협 비상대책위원회는 24일 브리핑을 열고 “전공의들에게 내린 부당한 행정명령 취하와 (의대) 증원을 멈추는 것이 (의료계를) 대화의 자리로 이끌 수 있는 정부의 최소한의 성의”라고 했다. 그러면서 “5월이 되면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을 경험하게 된다”며 “전공의라는 축을 잃어버린 수련 병원은 진료를 축소하며, 일부 병원은 파산할 위험도 있다”고 했다.

전국의과대학 비상대책위원회 등 의대 교수 단체는 전면 백지화하지 않을 경우 집단 사직하겠다는 입장이다. 교수들은 25일부터 순차적으로 병원을 떠나겠다고 수차례 발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