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2024 아시아·태평양 최고 전문병원’ 순위에서 국내 병원이 총 9개 분야 중 6개 분야 1위에 올랐다.

서울아산병원 전경.

서울아산병원이 심장내과·내분비 분야, 삼성서울병원은 암·호흡기 분야에서 1위를 차지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도 정형외과·소아과 분야에서 각각 1위를 기록했다. 이는 뉴스위크가 독일 글로벌 마케팅 조사 업체인 ‘스태티스타’에 의뢰해 한국, 일본,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태국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 9국 의료진 8000여 명을 설문조사한 결과다. 아시아 주요국 의료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의료 인력·기술과 인프라 수준을 최고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의대생들이 기피하고 전공의 사이에서도 인기과로 분류되지 않는 심장 등 이른바 ‘바이털(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 분야에서 한국 의료가 최고 수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정 갈등 사태 이후 전공의 집단 이탈이 장기화하면서 이런 분야들이 큰 타격을 입고, 앞으로는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가 의료계에서 나온다. 이대로 가다간 국내 병원들의 10년 뒤 순위는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래픽=양진경

서울아산병원 심장병원은 대동맥 판막이 좁아져 제대로 기능을 못하는 ‘대동맥 판막 협착증’ 환자의 ‘개흉(開胸) 수술’ 대신 최소 절개로 인공판막을 넣는 ‘대동맥 판막 치환술(TAVI)’을 한 해 300건 넘게 시행한다. 2010년 국내 최초로 시행한 이후 지금은 시술 건수뿐만 아니라 성공률(99%)도 세계적 수준이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은 2015년 국내 민간 병원 중 처음으로 양성자 치료를 시작한 이후 올 4월 치료 9만건을 달성했다. 또 2021년엔 기존 항암치료가 잘 듣지 않는 난치성 혈액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CAR-T 세포치료센터’도 국내 처음으로 설치했다. 아태 지역뿐 아니라 영미권을 비롯한 세계 병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상위권이다. 삼성서울병원은 지난해 뉴스위크가 발표한 ‘글로벌 전문병원 평가’에서 암 분야 세계 5위에 올랐다. 서울아산병원은 내분비 분야 세계 3위, 비뇨기 분야 세계 4위였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에서 양성자 치료를 준비하는 모습. 삼성서울병원은 2015년 국내 민간 병원 중 처음으로 암을 정교하게 파괴하는 양성자 치료 기기를 도입해 가동했다. /삼성서울병원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도 의료 인프라가 잘 갖춰진 나라로 꼽힌다. 2023 OECD 보건 통계에 따르면, 총 병원 병상 수는 인구 1000명당 12.8개로 OECD 국가 중 가장 많다. 자기공명영상(MRI) 장비 보유 대수(100만명당 35.5대)는 일본·미국에 이어 셋째로 많고, 국민 1인당 의사 외래진료 횟수(연간 15.7회)도 OECD(평균 5.9회) 국가 중 가장 많다.

뛰어난 의료 인력·기술, 인프라를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환자는 지난해 60만5768명으로, 처음 60만명을 넘어섰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49만7464명)보다도 약 22% 늘었다. 피부과(35.2%)와 성형외과(16.8%)가 절반쯤 되지만 내과, 정형외과, 건강검진 등 다른 의료 수요도 꾸준히 늘고 있다. 각종 병의원이 밀집해 있는 서울 강남구의 경우, 지난해 외국인 환자 수가 총 18만5559명에 달했다. 코로나 여파로 2만3734명까지 급감했던 2021년의 약 8배다.

김호진(왼쪽)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가 대동맥 질환 환자 수술을 하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뉴스위크 '2024 아시아·태평양 최고 전문병원' 발표에서 심장 수술 분야 3위에 올랐다. /서울아산병원

권용진 서울대병원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빅5(서울아산·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을 중심으로 한 우리 의료 서비스의 전반적인 수준과 질, 국민 의료 접근성이 상당히 높은 수준인 것은 맞는다”면서도 “서울 대형병원 중심 시스템이 전공의들 희생 위에 세워진 것도 부인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의정 갈등 사태를 빨리 해소하지 않으면 우리 의료는 글로벌 경쟁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건강보험 수가에 의존해선 안 되고, 영리병원을 도입하든 담뱃세 등을 필수의료 재원으로 삼든 한국에서도 연봉 10억짜리 ‘뇌·심장 의사’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 대형 병원의 환자 진료 역량은 뛰어나지만 지방의료, 기초의학 연구, 의과학자 육성 등은 갈 길이 멀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승연 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장은 “병을 고치는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서울 외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의료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