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철 전 연세의료원장, 송시헌 전 충남대병원장, 김한중 전 연세대 총장, 김종성 강릉아산병원 교수, 배장호 건양대병원 의료원장. /조선일보 DB

법원이 최근 “의대 증원은 공익에 부합한다”는 결정을 내린 데 이어, 서울대병원 교수들도 21일 무기한 집단 휴진 중단을 발표하면서 정부의 ‘1509명 의대 증원’은 사실상 확정됐다. 외형상 정부가 승리한 모양새지만 대다수 의사는 “이대로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의료가 붕괴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부는 의대 증원이 ‘의료 개혁’의 핵심이라는 입장이지만 현장 의사들은 “증원은 부차적인 문제”라며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증원은 독(毒)”이라고 하고 있다. 의료 개혁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에 본지는 의료계 원로 다섯 명에게 우리나라 의료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들었다. 김한중 전 연세대 총장(예방의학과), 이철 전 연세대의료원장(소아청소년과), 송시헌 전 충남대병원장(신경외과), 김종성 강릉아산병원 교수(신경과), 배장호 건양대의료원장(심장내과)이 제언했다.

①수가는 올리고 소송 부담은 줄여야

이들은 소아과·산부인과·응급의학과 등 생명과 직결된 필수 의료와 낙후된 지역 의료를 살리려면 파격적인 수가(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 인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한중 전 연세대 총장은 “의료계가 줄곧 요구했던 필수 의료 살리기 정책을 정부가 (지난 2월) 내놓았지만 전공의들은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다”며 “재원 등의 구체성이 없어 실현 의지가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철 전 연세대의료원장은 “정부는 그동안 필수 의료 수가를 올려줄 것처럼 하다가 막상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보험 재정이 없다’고 해왔다”고 했다.

송시헌 전 충남대병원장은 “필수 진료과 수가를 다른 과에 비해 파격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매년 의사 2000명을 늘려도 필수 진료과 의사들은 절대 늘지 않는다”며 “교육·국방 예산이 있듯이 필수 의료 지원을 위한 ‘국민 건강 예산’을 신설해야 한다”고 했다. 김종성 강릉아산병원 교수는 “필수 진료과는 위험 부담이 큰데 소송 청구액은 급증하고 있다”며 “소송 부담을 경감해 줘야 의사들이 온다”고 했다.

②대학 병원 살려야

이들은 “세계적 수준의 국내 대학 병원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김한중 전 총장은 “미국 뉴스위크지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최고 병원 250곳 중 우리나라 병원이 2024년엔 17개였다. 우리나라는 매년 3~4위를 기록했다”며 “낮은 수가와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척박한 환경에서, 의료진의 몰입과 헌신이 이뤄낸 놀라운 성과”라고 했다. 송시헌 전 원장은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적자가 쌓인 대학 병원은 당장 문을 닫게 생겼다”며 “코로나 때 수십조 원을 지원했듯이 대학 병원에도 재정 지원을 해주거나 낮은 금리로 대출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했다.

③2026학년도 증원은 의료계와 논의

내년도 의대 증원 조정은 어렵더라도 2026학년도 의대 증원부터는 정부가 의료계와 재논의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김종성 교수는 “수가를 높이고 소송 위험을 낮추면 피부·미용 등으로 빠진 필수 의료 의사들이 제자리로 돌아온다”며 “이런 구조 개혁 후에도 의사가 모자라면 그때 증원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것이 선행되지 않은 기계적 2000명 증원은 재앙”이라며 “의사 수 과다로 인한 의료비 증가, 의대 교육 파행 등 부작용만 생길 것”이라고 했다. 배장호 건양대의료원장도 “개인적으로 의사가 부족하다고는 느끼지만 몇 명 더 늘릴지에 대해서는 다수 전문가가 참여한 새로운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④‘이탈 전공의 처벌 않겠다’ 발표해야

이들은 지난 2월 말 의대 증원에 반발해 집단 이탈한 전공의 1만여 명에 대해서 정부가 ‘복귀 여부와 상관없이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힐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는 복귀 전공의에게만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미복귀 전공의들은 처벌 가능성이 남아 있다. 이로 인해 전공의 ‘단일 대오’가 유지되고 있고, 동료 눈치 때문에 복귀하고 싶은 전공의도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송시헌 전 원장은 “복귀라는 조건을 붙여 행정명령을 철회해 준다는 것은 전공의들의 감정을 더 상하게 하는 것”이라며 “현시점에선 어떤 선택을 하든 불이익을 안 주겠다고 선언하는 게 낫다”고 했다. 배장호 원장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갑자기 발표했고, 초반에 전공의들에게 윽박지른 측면이 있다”며 “마음이 상한 전공의들을 시간을 갖고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⑤필수 의료 흔드는 실손 보험

필수 의료를 위축시키는 실손 보험 왜곡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김한중 전 총장은 “과거 정부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MRI(자기 공명 영상), CT(컴퓨터 단층 촬영), 초음파까지 보험이 적용되면서 소위 필수 의료 중심인 대학 병원의 비급여 진료는 로봇 수술과 종합 건강검진 정도만 남아 있다”며 “날로 커지는 실손 보험 보상은 피부과, 안과, 성형외과 등 개원의 병의원으로 집중됐다”고 했다. 이로 인한 소득 격차가 중환자를 보는 대학 병원 교수들의 이탈을 가속화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