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그래픽=김성규

충청도의 한 아동 병원 현관에 들어서면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지는 15m 길이의 복도가 있다. 이 복도 양쪽엔 어른 허리 높이의 황색 철제 손잡이가 설치돼 있다. 15일 이곳을 찾은 소아 환자들은 자기 눈높이보다 높은 이 손잡이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병원 원장은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이 손잡이는 위험물”이라며 “아이들이 복도에서 뛰다가 손잡이에 부딪혀 얼굴 피부가 찢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고 했다. 경기도 한 아동 병원 원장도 “우리 병원도 매년 1~2명의 아이들이 복도 손잡이에 부딪혀 얼굴을 다친다”며 “아동 병원엔 이 손잡이를 잡을 성인이나 노인, 장애인이 거의 오지 않지만 손잡이 설치 의무 규제 때문에 없앨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동 병원이 ‘위험물’인 복도 손잡이를 철거하지 못하는 건 ‘장애인·노인 등의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의 세부 내용을 담은 정부의 시행 규칙 때문이다. 이 시행 규칙에 따르면 모든 병원(병상 30개 이상)은 성인 장애인이나 노인, 임산부가 이용하는 0.8~0.9m 높이의 손잡이를 복도에 설치해야 한다. 아동 병원도 예외가 아니다. 최용재 대한아동 병원협회장은 “위험해서 이 손잡이를 철거하면 병원 지정이 취소될 수 있다”며 “이런 규제가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환자 생명을 다루는 ‘바이털(생명) 의사’들은 “의료 발전을 위해선 낮은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와 잦은 소송 문제뿐 아니라 현장을 옥죄는 ‘민폐 규제’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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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의료 규제는 매년 50~100건씩 추가된다. 촌각을 다투는 환자를 보는 응급실에도 이런 ‘손톱 밑 가시’ 규제가 곳곳에 박혀 있다. 이경원 대한응급의학회(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공보이사는 “응급 진료 거부 금지 조항이 대표적”이라고 했다.

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 6조 2항엔 ‘응급실 의사와 간호사는 응급 환자 발견 즉시 응급 의료를 해야 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이를 위반하면 의료진은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을 선고받을 수 있다. ‘정당한 사유’가 무엇인지는 법에 적혀 있지 않다. 응급실 의사들은 “이 법 때문에 환자가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려도 진료를 해주지 않으면 의사만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지난 2020년 의료진에게 폭행·폭언 등을 하는 환자에 대해선 진료 거부를 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놨다. 세브란스병원 한 교수는 “정부의 유권해석일 뿐 진료 거부 사유가 법에 명시돼 있지 않기 때문에 응급실 의사·간호사들은 폭행·폭언을 견디며 환자를 치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서울 대학 병원의 한 응급실 전공의는 “경증 환자인데도 입원을 시켜주지 않는다며 의사 멱살을 잡거나 명찰을 잡아 떼는 일이 거의 일상”이라고 했다. 이경원 용인세브란스병원 교수는 “법에 ‘응급 의료 종사자에게 폭행·협박·모욕 등을 행사하는 경우엔 진료를 거부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 규제로 인해 뇌 수술 전문 병원에 쓰지도 않을 분만실이 들어서기도 한다. 국내 대표적인 한 뇌 질환 전문 병원은 2022년 병원 수술실 3개 중 1개를 수술실 겸 분만실로 만들었다. 3000여 만원을 들여 분만대, 인큐베이터 등을 구입했다. 정부의 의료질 평가 때 가점(최대 2점)을 받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전문 병원의 전문성을 고려한 별도 평가 기준을 마련하지 않고, 분만실이 필요한 다른 일반 종합병원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 병원이 필요 없는 분만실까지 설치하면서 평가 점수를 잘 받으려는 데도 이유가 있다. 심·뇌혈관 질환처럼 수가가 낮은 필수 진료과 전문 병원들은 정부가 평가 등급에 따라 지급하는 ‘의료질 평가 지원금’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병원 관계자들은 “평가 등급에 따라 환자당 지급되는 지원금 액수가 수십 배 차이가 난다”며 “더구나 정부 평가는 상대평가여서 2점 가점도 등급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필요 없는 분만실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암 수술과 관련한 불합리한 규제도 있다. 정부는 2014년부터 간암·대장암·위암·유방암·폐암 등 5대 암에 대해 병원들을 상대로 주기적으로 ‘암 적정성 평가’를 해왔다. 이 평가 결과에 따라 정부 지원금이 차등 지급된다. 이 평가 항목 중엔 ‘암 확진 후 30일 이내 수술받은 환자 비율’이 있다. 30일 이내 수술 환자 비율이 높을수록 점수를 더 준다는 뜻이다. 암 환자들이 가능한 한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취지로 도입한 지표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환자 유출이 심한 지역 병원들이 오히려 불이익을 받는 평가 기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현재 많은 환자들이 지방 병원에서 암 확진 판정을 받더라도 수술은 수도권 대형 병원에서 받는다. 수도권 대형 병원이 더 큰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의료계 인사들은 “지금도 빅5(5대 대형 병원) 암 환자의 절반가량은 비수도권 환자들”이라면서 “수술 환자를 뺏기는 지역 병원은 암 수술 의료진을 줄이고 결국 지방 의료가 더 취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같은 진료를 해도 병원 규모에 따라 받는 돈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임신부가 출혈이나 복통으로 대형 병원 응급실을 찾으면 병원은 정부로부터 응급 가산료를 받는다. 하지만 그보다 규모가 작은 분만 병의원은 야간에 임신부 응급 환자를 진료해도 응급 가산료를 못 받는다고 한다. 신봉식 대한분만병의원협회장은 “같은 일을 해도 어떤 병원은 지원을 받고 어떤 곳은 지원을 못 받는 불합리한 차별은 가뜩이나 고사 직전인 분만 병의원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