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 이어 서울 대형 병원에서도 전공의(인턴·레지던트) 이탈로 인해 응급실 운영이 축소·중단되고 있다. 응급실은 중증·응급 환자가 병원에 들어오는 ‘24시간 통로’다. 응급실 가동이 중단되면 중증·응급 환자 치료도 사실상 중단되기 때문에 ‘의료 위기의 전조’라는 우려도 나온다.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의 상급종합병원(대형 병원)인 한림대강남성심병원의 응급실은 최근 야간에는 심폐소생술(CPR)을 해야 할 심정지 환자 외 신규 환자 수용은 못 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응급실 전문의 한 명이 조만간 사직할 예정이어서 상황은 더 악화할 전망이다.
서울 소재 또 다른 A종합병원도 응급실 전문의들의 피로 누적으로 야간 응급 환자 수용을 제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응급실 ‘도미노 파행’이 벌어지는 건 응급실을 지키던 전공의들의 이탈 기간이 6개월을 지나면서 번아웃(극도의 피로)이 온 전문의들이 응급실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는 20일 브리핑에서 “응급실 진료 차질은 그 기관의 (특수한) 개별 사정에 의한 것”이라며 “부분적 진료 제한이 있는 응급실은 5개로 전체의 1.2% 수준”이라고 했다. “9월엔 인력이 충원돼 문제가 좀 해소될 것”이라고도 했다. 응급실 파행은 지엽적이고 한시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정부가 연쇄 셧다운 위기에 처한 응급실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한림대강남성심병원 등은 정부의 ‘진료 차질 5개 응급실’에 포함되지도 않았다”고 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림대강남성심병원은 중환자를 최종 치료하는 최상위 등급의 병원(상급종합병원)이다. 이 병원 응급실은 서울 서남부 지역의 응급 환자를 책임지고 있다.
본지 취재 결과, 한림대강남성심병원 응급실에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5명이 돌아가며 야간 당직을 서고 있다. 야간엔 이 병원에서 수술 등을 했던 기존 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고 있다. 신규 환자는 119를 통해 들어오는 심정지 환자 외엔 못 받고 있다고 한다. 다른 병원에서 옮겨 오는 환자도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응급실 의사들이 극심한 피로를 겪고 있어 환자를 더 받으면 사고가 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조만간 응급실 의사 한 명이 사직할 예정이어서 응급실 진료 차질은 더 커질 전망이다.
지방 대형 병원은 더 심각하다. 이번 전공의 집단 이탈 사태 전에도 지방 병원들은 의사 구인난에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공의가 이탈하자, 지역 병원 응급실부터 셧다운(운영 중단)되기 시작했다.
충북 지역 유일 상급종합병원인 충북대병원의 응급실은 지난 14일 하루 문을 닫았다. 피로가 쌓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6명 중 2명이 병가·휴직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지역 최고 위상의 상급종합병원이자 규모가 가장 큰 권역응급의료센터가 가동 중단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보도가 나자 정부는 16일 군의관 2명을 보내 급한 불을 껐다.
다른 지역도 비슷하다. 본지 취재 결과, 울산·포항 등 영남 동남부 지역 유일 상급종합병원이자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울산대병원의 응급실도 지난 18일부터 셧다운 될 위기에 몰렸었다.
이 병원엔 5명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근무하고 있었다. 이 중 한 명이 이달 초 미국으로 1년 연수를 가자 남은 4명이 돌아가며 야간 당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복지부는 최근 ‘18일부터 응급실 24시간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병원 측의 통보를 받았다. 이후 급히 다른 곳에서 근무 중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1명 등 총 2명의 군의관을 빼서 이 병원에 보내 셧다운을 막았다.
세브란스병원의 한 교수는 “응급실 진료 축소·중단은 보건복지부 발표처럼 특정 병원의 지엽적 문제가 아니라 전국 모든 종합병원의 문제”라고 했다.
세종 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인 세종충남대병원 응급실도 이달 들어 매주 하루씩 성인 응급 환자를 못 받고 있다. 이곳에선 최근 4명의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사직했다. 게다가 다음 달엔 이 병원 응급실 전문의 3명이 추가로 사직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병원 내에선 “응급실 24시간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란 말이 돈다.
의료계 인사들은 “충청 지역의 상급종합병원인 B병원, 영남의 상급종합병원인 C병원 응급실도 곧 셧다운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군의관 중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5명 정도여서 현재 급히 투입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사직·연수 등으로 응급실 의사 한 명이라도 빠지면 곧바로 응급실이 가동 중단될 상황이란 뜻이다.
응급실 의사들은 “응급실이 ‘도미노 가동 중단’ 위기인데 정부는 느긋하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응급실 환자 중 44%는 비(非)중증 환자다. 이번 의료 파행 사태 이전의 ‘편의점 응급실’로 돌아왔다. 최근 코로나 재유행으로 환자가 몰리면서 경증 비율은 예년보다 더 높아지고 있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장은 “가뜩이나 지친 응급실 의사들이 감기·두드러기 환자들에게 시달리며 사직으로 내몰리고 있다”며 “정부는 이를 알면서도 경증 환자들의 반발이 두려워 ‘엄중하게 주시 중’ ‘응급실 이용비 인상 검토’ 같은 한가한 발표만 한다”고 했다. 수도권의 한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의 절박한 상황을 알리려고 전화를 해도 복지부 공무원들은 받지도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