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 등을 조합원으로 둔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의료 정상화와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9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사진은 지난 5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국 간호사 간호법안 제정 촉구 결의대회’에서 간호사들이 피켓을 들고 간호법 법제화를 촉구하는 모습. /이덕훈 기자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 의료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9일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예고했다.

25일 의료계에 따르면 간호사, 의료기사 등이 속한 보건의료노조는 이달 19∼23일 61개 병원 사업장을 대상으로 쟁의행위 찬반 투표를 한 결과 찬성률 91%로 총파업을 가결했다. 이번 파업이 현실화하면 전국 의료 기관 61곳의 간호사, 의료 기사, 요양 보호사 등 2만2100여 명이 29일부터 무기한 파업에 들어간다. 파업을 예고한 병원 가운데는 고려대 안암 병원, 한양대 병원 등 최고 등급 병원(상급 종합병원) 8곳과 국립중앙의료원, 경기도의료원 등 전국 공공 의료원 26곳도 포함돼 있다. 이른바 ‘빅5(서울대·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은 파업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25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한 뒤 “응급·중증 등 필수 진료에 차질이 발생하지 않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의료계에서는 간호사마저 떠나면 중환자들의 입원·수술이 아예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러스트=이철원

보건의료노조의 핵심 요구 사항은 처우 개선과 임금 인상, 인력 충원이다. 전공의 이탈 이후 의료 공백을 메운 것은 간호사 등인데 결국 무급 휴가 등 불이익만 돌아왔고, 업무 강도도 몇 배로 뛰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PA(진료 보조) 간호사 등의 업무 범위를 규정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한 여야 논의가 지지부진한 것도 파업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중증·응급 환자 진료 차질을 원하지 않는 것은 노조나 정부나 같다”며 “29일까지 상황을 보며 대응하고, 소수라도 파업이 벌어지면 진료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을 예의 주시할 것”이라고 했다.

의료 현장에서는 전공의가 하던 단순 ‘의사 업무’를 PA(진료 보조) 간호사가 대부분 하고 있다. 규모도 훨씬 커졌다. 지난 3월 1만165명이었던 PA 간호사는 지난달 1만6000여 명으로 넉 달 만에 57.4% 증가했다. 의료 현장에서 간호사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그래픽=이철원

이런 상황에서 간호사들이 대거 파업에 나선다면 의료 현장에 미치는 충격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파업을 예고한 병원에 ‘빅5′ 등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 군데가 무너지면 환자들이 다른 곳으로 몰려 여러 병원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는 ‘의료 살얼음판’ 상황이기 때문이다.

파업이 시작되면 우선 수술 적체 현상이 심해진다. 수술을 앞두고 환자 동의서에 서명을 받는 업무를 간호사들이 전공의 대신 하고 있는데, 이들이 빠져나가면 교수들이 직접 동의서를 받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과중한 업무를 호소하는 교수들에게 다시 부하가 걸리면서 수술 지연·중단이 불가피하다.

입원 등 기본적 진료 행위도 마비될 가능성이 크다. 보건의료노조는 “파업에 들어가더라도 응급실, 수술실, 중환자실, 분만실, 신생아실 등 환자 생명과 직결된 업무에 필수 인력을 투입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입원실 간호사 공백은 불가피하다. 24시간 당직을 서가며 병동을 지키던 간호사들이 빠져나가면 입원이 아예 불가능해지고, 수술도 불가능해진다. 환자는 수술 전후에 입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 교수는 “전공의들이 빠져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인데, 간호사들마저 이탈한다면 중환자 입원 치료·수술이 막히는 파행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간호사들, 석달 전 국회 앞에서 간호법 제정 시위 - 전국보건의료노조가 의료 정상화 등을 요구하며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29일부터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다. 사진은 지난 5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간호사들이 피켓을 들고 간호법 법제화를 촉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런 시점에 파업을 예고한 것은 전공의 이탈 이후 6개월간 간호사들의 불만이 쌓인 결과로 보인다. 보건의료노조는 “의사들이 떠난 의료 현장에서 환자를 살리겠다는 사명감 하나로 지난 반년을 버텼지만, 사명감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며 임금 인상과 인력 충원 등을 요구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조속한 진료 정상화와 직종 간 업무 범위 명확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가 PA 간호사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규정해 소송 위험을 차단해 달라는 뜻이다. 정부는 명확한 법적 근거 없이 시범 사업 형식으로 PA 간호사 활동을 허용하고 있다. 구체적 업무 범위는 정부가 하지 않고, 각 병원장이 재량껏 정하도록 했다. 지방 병원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사는 “하지 않던 업무를 맡게 되면서, 혹시라도 의료 사고가 나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고 했다.

불법 진료 근절도 요구 사항으로 내걸었다. 일선 의료 현장에서 PA 간호사가 의사의 ID를 활용해 진료 기록부를 작성하고 처방하는 행위 등을 근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 의사·간호사뿐 아니라 의료 기사 등 모든 직종의 보건 의료 인력 확충 정책도 요구하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지난해 7월에도 임금 인상과 간호 인력 확충을 내걸고 이틀간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에는 간호사, 의료 기사 등 4만여 명이 참여했고, 전국 병원 134곳에서 수술과 진료에 차질이 생겼다.

그래픽=이철원

정부는 ‘간호사 달래기’에 나섰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근무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간호사 교대제 개선 시범 사업’을 조기에 전면 확대했고, 간호·간병 통합 서비스 확대를 위해 중증 환자 전담 병실 도입과 대체 간호사 채용 지원 등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앞으로 간호사 등 보건 의료인에 대한 지원을 더욱 강화할 수 있도록 간호사법 제정을 적극 추진하고, 보건 의료인 처우 개선을 위한 정부 대책을 마련하는 등 제도 개선에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또 노사 협의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지원하는 한편, 응급·중증 등 필수 진료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모니터링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

환자들은 “의사 파업을 비판하던 간호사들마저 환자를 팽개치고 파업에 동참하면 어떡하느냐”고 불안해했다. 보건의료노조는 전공의 이탈 직후인 올 3월 ‘의사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내고 “환자 생명을 팽개치고 한날한시에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집단 진료 거부”라고 비판했다.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의사를 보조하는 간호사. 수술 준비와 보조, 수술 부위 봉합 등 의사 업무 일부를 담당한다. 미국·영국 등에선 법으로 규정된 직역이지만, 우리나라 의료법엔 근거 규정이 없어 간호법을 통한 법제화가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