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 기간(14~17일) 응급실을 찾은 경증·비응급 환자 수가 작년 추석 연휴 대비 40% 가까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다수 의료진이 연휴에도 평소처럼 응급실을 지키고, 경증·비응급 환자가 분산돼 응급실이 중증 환자 위주로 운영되면서 당초 우려했던 ‘의료 대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18일 “의료 공백으로 인한 큰 불상사·혼란은 없었다”며 “의료기관의 적극적인 진료 참여, 현장 의료진의 헌신과 노력, 더 필요한 분에게 응급실 이용을 양보하는 국민의 높은 시민의식 덕분에 응급 의료 체계가 중증 환자 중심으로 작동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전공의 이탈로 권역·지역응급센터 근무 의사 수는 작년 말 대비 400여 명 줄었다. 하지만 전국 응급실 411곳 중 408곳이 이번 연휴 기간 매일 24시간 운영했다. 경증·비응급 환자가 대형병원 방문을 자제하고 동네 병의원으로 분산된 것이 응급실 운영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14~17일 응급실 방문 환자는 하루 평균 2만7505명이었다. 작년 추석 연휴(3만9912명), 올해 설 연휴(3만6996명)와 비교해 25% 이상 줄었다. 특히 경증·비응급 환자는 작년 추석(2만6003명) 대비 37.9% 줄어든 1만6157명이었다.
추석 연휴에도 문을 연 병의원은 하루 평균 9781곳에 달했다. 작년 추석(5020곳)의 2배로 늘었고 올해 설(3643곳) 대비 3배 가까운 수준이다. 정부와 각 지자체가 지원을 강화하며 ‘문 여는 병의원’ 참여를 독려했고, 병의원이 이에 적극 응하면서 정부의 당초 계획(8954곳)보다도 9.2% 늘어난 것이다. 추석 당일인 17일에도 예년 명절 당일보다 약 600곳 많은 2223곳이 문을 열었다. 서울시의사회 관계자는 “국민이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많은 개원의들은 그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 병원 문을 열었다”고 했다. 연휴 기간 아들(6)이 고열·폐렴 증상을 보여 동네 병원을 찾았다는 박모(38)씨는 “상태가 안 좋았는데 응급실까지 가는 건 아니다 싶었고, 다행히 문을 연 동네 병원이 있었다”고 했다.
이번 연휴 기간 전국 각지의 응급실 의료진 대부분은 평소와 다름없이 환자를 돌봤다. 연휴 마지막 날인 18일 오전 10시쯤 기자가 찾은 충북 보은군의 보은한양병원 응급실은 환자·보호자 20여 명으로 북적였다. 이곳은 ‘응급 의료 취약지’인 인구 3만 보은군에 단 하나밖에 없는 ‘24시간 운영 응급실’이다. 지난 3월엔 물웅덩이에 빠져 심정지 상태로 이송된 33개월 여아를 포기하지 않고 숨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한 곳이기도 하다.
연휴 기간 이 병원 응급실 의사 4명이 복통 환자부터 갈비뼈 골절 환자, 요리 도중 화상을 입은 환자, 성묘를 갔다가 벌에 쏘인 환자, 신장 투석 환자 등 400여 명을 치료했다. 이날 밤을 주우러 산에 갔다가 넘어져 머리 부위가 찢어졌다는 엄성용(71)씨는 경북 상주에서 차로 30분 넘게 걸리는 보은한양병원까지 이송됐다. 엄씨는 “가까운 병원이 없어 여기로 왔다”며 “의사·간호사 선생님들께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송승헌(66) 진료부장은 “우리 응급실이 문을 닫으면 지역 주민들은 한 시간 넘게 떨어진 청주나 대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응급실 의료진은 새벽에도 당직실에서 잠깐씩 쪽잠을 자며 환자를 봤다”고 했다.
이 병원은 응급실 인건비 등으로 인해 연간 15억원가량 적자를 보고 있지만, 이번 추석 연휴에도 지역 당직의료기관으로 응급 환자들을 받았다. 병원 관계자는 “응급실 매출이 월평균 5000만원인데, 의사·간호사 등 의료진 인건비를 포함한 응급실 운영비는 월 1억5000만원 수준”이라며 “그래도 지역 응급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을 우리가 확보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일부 지역에선 응급실 의료진 부족 등으로 환자 수용 거부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14일 충북 청주에선 양수가 터진 25주 임신부가 6시간 만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15일 광주광역시에선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50대 남성이 사고 발생 2시간 만에 전북 전주에 있는 한 정형외과로 이송됐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25주 이내 조기 분만은 고위험 시술로 분만과 신생아 보호가 모두 가능한 병원은 많지 않고, 손가락 절단도 일부 병원만 수술 가능한 전문 분야”라고 했다. 연휴 의료 공백으로 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휴 기간 발생한) 고위험 분만과 신생아 보호, 수지 접합 수술 같은 필수 의료 부족 문제는 전공의 이탈로 새롭게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 이전부터도 있었던 문제”라며 “이 같은 필수 의료, 지역 의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의료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추석 연휴는 국민의 응급실 이용 자제와 의료진의 희생 등으로 버텨냈지만 당장 앞으로가 문제”라는 지적이 나왔다. 19일로 전공의들이 한꺼번에 진료 현장을 이탈한 지 7개월이 지나면서 남은 의료진의 체력과 정신적 부담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경원 용인세브란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대한응급의학회 공보이사)는 “의료진 번아웃(극도의 피로)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연휴 이후 당장 다음 달부터 응급실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은 명절 연휴뿐만 아니라 평시에도 경증·비응급 환자를 최소화하고 중증 환자 중심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성우 고대안암병원 진료부원장(대한응급의학회 정책이사)은 “피로 누적으로 실제 응급실 의료진의 환자 진료 역량은 크게 떨어져 있다”며 “정부가 의·정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 지금 의료 현장을 지키고 있는 의사들에게 ‘머지않아 전공의 등 동료 의사들이 돌아올 것’이란 희망을 줘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