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서울병원은 최근 미국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2025 세계 최고 전문 병원’ 평가에서 암 분야 3위에 올랐다. 1위와 2위는 암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미국의 MD 앤더슨 암센터, 메모리얼 슬로언 케터링 암센터가 차지했다. 종합병원 중에서는 삼성서울병원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종철(76) 서울 강남구 보건소장은 2000년부터 8년간 삼성서울병원에서 4·5·6대 병원장을 지냈다. 삼성서울병원 암병원은 그가 병원장으로 있던 2008년 문을 열었다. 이후 강북삼성병원, 삼성창원병원까지 관장하는 삼성의료원장을 3년 지냈다. 70세가 되던 2018년,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경남 창원시 보건소장이 됐다. 고향에서 의사로 봉사하며 사는 것이 그의 ‘버킷 리스트’였다.
이 소장은 지난 20일 본지 인터뷰에서 “의사들이 피땀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특히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는 전공의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 의료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병원은 진료, 연구, 교육이라는 세 축이 함께 발전해야 하는데, 지금 교육·연구가 멈췄다”며 “이대로라면 한국 의료 명맥을 이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보건소 3층 보건소장실. 이종철(76) 보건소장(전 삼성의료원장)의 책상에는 돋보기안경과 함께 신문 여러장이 놓여 있었다. 이 소장은 매일 신문과 방송 뉴스 등에 나오는 보건 의료 관련 주요 기사를 모은다. 2주에 한 번 월요일 오전 회의 시간에 보건소 과장들에게 기사 내용을 교육하기 위해서다. 부드러운 인상의 이 소장은 인터뷰가 시작되자 진지하고 매서운 눈빛으로 변했다.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기도 했다. 아래는 일문일답.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지 7개월이 넘었다. 이대로 가면 세계 최고 수준인 우리나라 의료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는 대학 병원의 연구·교육 기능이 멈췄다. 교수들이 당직 서느라 바빠서 연구할 시간이 없다. 대학 병원이 세계적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진료, 연구, 교육이라는 세 축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상황에서 외국을 따라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현대 의학은 진보 없이 그 자리에 있으면 정지한 게 아니라 퇴보하는 것이 된다.”
-의대 정원 문제를 둘러싸고 의료계와 정부의 입장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문제의 핵심에 접근을 안 하고 있는 것 같다. 의사는 환자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정부가 의사들이 병원으로 돌아올 명분을 줬으면 좋겠다. 의사들은 정부에 ‘2000명’(당초 정부가 발표한 의대 증원 규모. 최종 1497명으로 확정됐다)이라는 숫자의 근거를 요구하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 정부가 답을 해줘야 한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열심히 일했음에도 필수 의료 기피 현상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은 사(私)보험 정책 등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책을 추진한 사람들을 바꾸고, 새로 들어선 사람들과 의사가 대화하도록 하는 게 옳다.”
-전공의들은 어떻게 하면 돌아올까.
“전공의 교육 수련비를 정부가 내야 한다. 지금까지는 교육 수련비를 병원에서 부담했기 때문에 전공의들에게 일을 시킨 것이다. 그렇게 전공의들은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 의료가 이 정도로 잘된 건 틀림없다. 정부는 교육 수련비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 전공의들은 지금 상황에서 변한다는 보장이 없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전공의들이 돌아온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후유증을 겪을 것이다. 의사는 선배한테 배운다. 인턴은 레지던트 1년 차한테, 레지던트 1년 차는 2년 차한테 배운다. 한 해 결원이 생기면 앞으로 교육 문제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후유증을 앓을 수밖에 없다. 또 정부 정책대로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 전환하면 전공의가 하던 업무를 누가 대신할지도 해결해야 한다. 전공의와 진료 지원(PA) 간호사의 역할을 나누는 문제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 의료는 필수 의료 기피 등 여러 문제도 있다.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사보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실손 보험도 일종의 사보험이지만, 실손 보험은 비급여 항목에 한해서만 보장이 된다. 비급여 항목이 적은 필수 의료 진료과는 사보험 혜택을 못 받는다. 정상적인 사보험은 모든 진료과가 똑같은 혜택을 받아야 한다. 필수 의료 분야에 보상이 없다면 누가 필수 의료 의사가 되려고 하겠나. 세계가 부러워하던 의료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다.”
-이렇게 질 높은 의료를, 이렇게 싸게, 자주 이용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아주 가난할 때 저수가로 시작했다. 지금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6000달러(약 4800만원) 수준으로 늘었다. 저수가를 유지하면 안 된다. 수가를 올리면 지방·필수 의료 기피 현상이 해결된다. 지방에서 근무하는 의사들에게 수가를 더 줘야 한다. 수가가 똑같다고 해서 공평한 게 아니다. 어려운 지역의 의사들에게 더 많은 대우를 해줘야 하고, 그게 진정 공평한 것이다.”
-사보험 개혁, 수가 인상 외에 또 무엇이 필요한가.
“정부가 공공 의료에 더 지원해야 한다. 누구나 의식주 다음으로 자기 건강을 생각한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은 건강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된다. 민간 의료가 하지 않으려는 부분을 공공이 맡으면 된다. 의료는 수익이 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코로나 같은 감염병 치료나 치매 환자·정신 질환자·독거노인 돌봄 서비스 등은 국가가 해줄 수밖에 없고, 그게 공공 의료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공공 의료가 빈약하다.”
-강남구 보건소는 내년 초 긴급 진료 클리닉을 열려고 준비 중인데.
“공공 의료의 일환이다. 요즘 응급실 뺑뺑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응급실은 응급의학과뿐 아니라 모든 진료과가 돌보고 있으니 돌아가는 것이다. 개인 병·의원은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응급실을 못 한다. 그럼 공공에서 해야만 한다. 경증 환자를 분산시켜줘야 대형 병원 응급실이 산다. 보건소에서 동네 병·의원이 문을 닫는 야간이나 주말이라도 일을 해주면 된다.”
-미국에서 보건 의료 정책을 공부하기도 했는데.
“미국은 공공 의료 돌봄 서비스가 잘돼 있다. 의사 한 명이 자신이 주치의를 맡고 있는 환자 중 방문 진료가 필요한 환자 10명씩을 고른다. 의사 5명이 고른 50명을 한 단위로 묶어서 정부에서 전문 간호사와 물리치료사를 1명씩 붙여준다. 그들을 찾아가서 관리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주치의에게 연락해 처방도 받고, 필요하면 입원도 시킨다. 우리나라는 주치의 제도가 없고, 방문 진료도 어렵다.”
-보건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나는 잘난 사람도 아닌데 남들이 보면 최고라고 생각할 정도로 경력을 쌓았다. 받은 게 많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루 20㎞씩 40일 동안 걸으면서 의사로서 봉사할 길이 보건소에 있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게도 당시 내 고향인 마산이 있는 경남 창원시 보건소장 자리가 비어 있었다. 버킷 리스트를 이룬 것이다. 보건소에서는 의료가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1차 의료기관으로서 공공 의료의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종철
1948년 경남 마산 출생. 서울대 의과대학에서 학부, 석·박사를 마쳤다. 서울대병원에서 수련한 뒤 내과 전문의 자격을 얻었다. 1984년 한양의대 교수로 임용됐다. 1994년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고(故)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주치의와 진료부원장·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쳤다. 2000 ~2008년 삼성서울병원장을 지냈고, 이후 2011년까지 삼성의료원장을 역임했다. 퇴임 후 2013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의료정책 및 관리학을 공부했다. 이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진료심사평가위원장을 맡았다. 2018년 경남 창원시 보건소장을 거쳐, 올해 3월부터 서울 강남구 보건소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