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 전 연세의료원장이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하나로의료재단에서 한국 의료의 나아갈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이철(75) 전 연세의료원장이 세브란스병원 정년 퇴임 후 2015년 하나로의료재단에서 일을 시작한 어느 날, 사무실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20대 여성이 찾아왔다. 그는 이 전 원장에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20여 년 전 세브란스병원에서 발행한 신생아실 퇴원 요약서였다. ‘출생 체중 1.3kg, 담당 의사 이철(서명)’. 이른둥이로 태어나 이 전 원장의 치료를 받았던 여성이 건강한 성인이 돼 감사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서 ‘이철 교수님이 생명의 은인이시니 크면 꼭 찾아봬라’고 하셨어요.”

우리나라 1세대 신생아학 교수인 이 전 원장은 24일 본지 인터뷰에서 “평생 환자와 대화할 수 없는 신생아 치료 의사로 살았는데 내 환자와 처음 대화한 그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며 “내가 살린 환자를 다시 만날 때의 감동은 신생아 중환자실을 지키는 의사를 포함해 필수 의료 의사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지금 필수 의료는 ‘힘들고 고된데 돈은 못 벌고, 소송까지 당하는 진료’로 외면받고 있다”며 “정부는 의사 증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런 현실을 바꾸는 것을 의료 개혁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필수 의료 기피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나는 전화 기피증이 있었다. 밤이나 새벽에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는 건 대부분 환자가 안 좋아졌거나 사망했다는 소식이다. 젊은 의사들 입장에선 적자 진료, 밤낮 없는 진료, 소송당하는 진료를 택할 이유가 사명감 말곤 없다. 이른둥이 중환자 치료 분야는 지원자가 없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도 소아가 아닌 성인 진료를 보려 한다. 일각에서 ‘소아과 오픈런’ 같은 말이 나오지만 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결국 보상을 올려주고 소송 등 업무 리스크(위험)를 낮춰줘야 개선할 수 있는 문제다.”

-그래도 필수 의료 수준만큼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나.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의료는 각 병원의 투자, 그 투자를 통해 미국·일본 등으로 나가 선진 의료를 배워 온 선배 의사들의 열정, 그 열정을 이어받은 후배 의사들의 사명감으로 일궈낸 것이다. 나도 병원 지원으로 미국 브라운대에서 이른둥이 치료법 등을 배웠다. 우리 의료 발전 과정에서 정부 역할은 미미했다. 수가(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를 관리·통제하는 정부 주도 의료 체계를 운영하면서도 정작 필수 의료에 대한 투자는 병원 몫이었다. 특히 대기업 계열(서울아산·삼성서울)도 국립대병원(서울대)도 아닌, 어디서도 지원을 못 받는 민간 대학 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이 최고 병원 중 하나가 된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이철 전 연세의료원장은 24일 본지 인터뷰에서 “지금의 수준 높은 한국 의료는 턱없이 부족한 정부의 지원·보상에도 불구하고 각 병원과 의료진이 땀과 희생으로 이뤄낸 성과”라고 했다. 사진은 이 전 원장이 20여 년 전인 2000년대 초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신생아집중치료실(NICU)에서 인큐베이터에 있는 이른둥이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모습. /이철 전 연세의료원장 제공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필수 의료에 대한) 정부의 투자는 미미한데 규제 중심이다. 올해 정부 예산도 사회복지 분야가 105조원, 보건 분야는 17조원이다. 역대 정부가 거의 모두 필수 의료 수가를 올려줄 것처럼 말하다가 막상 협상 테이블에 앉으면 ‘재정 상황이 안 된다’며 논의를 피했다. 이로 인해 정부를 향한 의료계 불신이 더 커졌고, 현재 의정 사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재원이 부족하다면 ‘건강세’라도 신설해야 한다.”

-규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단적인 예로 국내에 하나뿐인 신생아 호흡부전 치료제 생산이 곧 중단된다. 이른둥이는 폐가 미숙해 숨을 잘 못 쉰다. 치료제는 일본 이와테대에서 처음 개발했고, 그 기술을 배워 와 함께 연구한 유한양행과 세브란스가 1996년 국내 시판 허가를 받았다. 이 약으로 많은 이른둥이를 살렸다. 그런데 최근 정부의 의약품 제조·품질 관리 기준(GMP)이 강화돼 현재 제약사 설비로는 추가 생산할 수 없다고 한다. 내년부턴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이렇게 규제는 강한데 우리 의료의 해외 진출 등 정부 지원이 필요한 부분에선 제대로 역할을 못 해준다. 2011년 러시아 극동연방대병원 운영 입찰에서 세브란스가 미국 USC(서던캘리포니아대)에 밀린 것도 러시아 주재 미 대사관의 로비 때문이었다. 일개 병원으로선 역부족이었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로서 정부 저출생 대책은 어떻게 보나.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태어난 아이를 잃지 않고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이른둥이와 아픈 아이들에 대한 지원이 너무 부족한데, 출산율을 올리기 위해 계속 더 낳으라고만 해선 안 된다. 난임이 늘면 다태아·이른둥이 출산도 늘어난다. 출산 직후 집중 치료부터 퇴원 후 관리까지 제대로 해줘야 안심하고 낳을 수 있다. 얼마 전에도 제주의 고위험 임신부가 신생아 중환자실을 못 찾아 인천까지 이송되고, 양수 터진 임신부가 병원 75곳에서 수용이 안 돼 6시간 만에 치료받았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래선 안 된다.”

-해법이 있나.

“응급 상황에 빠진 임신부와 태아를 살리려면 산과 의사와 신생아 집중 치료 의사가 모두 있어야 한다. ‘모자보건 병원’이라는 하나의 팀으로 묶어 지원해야 한다. 대도시마다 모자보건 병원이 있는 미국처럼 우리도 지역별 국립 모자보건 병원을 설립하고 파격적으로 지원하면 안타까운 사고들을 막을 수 있다. 산후조리원을 모자보건 병원에 결합하는 것도 가능하다. 필수·지역 의료(소아·분만), 저출생까지 세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개선할 수 있다. 의사 증원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의정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는지.

“정부도, 의료계도 서로를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 보고 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이 과정에서 환자 치유·회복에 필수인 의사와 환자 간 신뢰가 산산조각 나고 있다는 점이다. 후유증이 길게 갈 것이다. 정부는 대화의 전제 조건을 걸지 말고, 더 귀를 열어줬으면 한다. 일부 의사의 문제이지만, 의료계도 과격한 언동은 자제해 줬으면 한다. 의료계가 설득해야 할 대상인 국민이 의료계에 등 돌리게 해선 안 된다.”

이철 전 연세의료원장

☞이철

연세의료원장을 지낸 우리나라 1세대 신생아학 소아과 교수. 이른둥이 인큐베이터 집중 치료를 국내에 도입해 활용했고, 국제 공인 신생아 발달 측정 검사인 ‘베일리 검사’를 들여왔다. 일본에서 수입하던 신생아 호흡 부전 치료제를 유한양행과 공동 연구를 거쳐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1949년생으로 경기고,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장, 대한신생아학회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하나로의료재단 명예원장을 맡고 있다.

☞모자(母子)보건 병원

임산부의 분만과 산후 진료, 태아·영유아의 진료를 위한 병원.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 등 의료진과, 분만실·입원실·신생아 중환자실 등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