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산모의 아기를 받는 대학 병원 산과(産科) 교수들이 줄줄이 병원을 떠나고 있다. 고령 임신 등으로 고위험 임신부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산과 교수 줄사직은 산모와 아기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집단 이탈한 올 2월부터 현재까지 대학 병원을 떠난 산과 교수는 확인된 것만 6명이다. 2022년 기준 전국의 산과 교수(125명) 가운데 최소 5% 정도가 이번 의정(醫政) 갈등 기간에 사직한 것이다.
이 6명 중에는 수도권 대학 병원의 부원장까지 지낸 A 교수도 포함돼 있다. 50대인 그는 지난 4월 사직을 하고 6월부터 미 서부의 한 병원에서 가정의학과 레지던트(5년 과정) 수련을 받고 있다. 미국 의사 시험을 치렀다. A 교수는 국내 대학병원에서 최근 10년간 ‘나 홀로 산과’ 교수였다. 산과는 필수 의료지만, 수가(건보공단이 병원에 주는 돈)는 낮고 위험은 커서 대표적인 기피 과로 통한다. 산부인과 응급 환자 대부분은 산과 환자다. 이런 이유로 그의 후임 교수는 10년 만에 충원이 됐다고 한다. 산과 교수들은 “A 교수는 보조해줄 전공의도 한 명밖에 없어서 10년간 수시로 야간 당직을 서거나 집에서 자다가 응급 콜을 받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삶을 살았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번 의정 갈등으로 그 전공의마저 떠나자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A 교수는 본지에 “밤이든 새벽이든 환자가 오면 병원에 달려가야 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 B 교수도 올 6월 사직서를 내고 보험회사에 취업했다. 30대 젊은 교수였다. 그는 주변에 “더는 한국에서 분만을 하고 싶지 않다” “보통의 직장인처럼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대다수 대학병원에서 산과 교수는 1~2명 선이다. 한 명만 빠져도 고위험 산모의 진료·수술이 막힐 수 있다. 실제 서울의 상계백병원은 올 2월 한 명 남은 산과 교수가 사직해 응급실에서 고위험 산모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경남 지역 대학 병원의 산과 교수였던 C씨는 올 3월 정년이 보장되는 정교수직을 그만뒀다. 그리고 1년마다 병원과 계약을 하는 ‘계약직 의사’ 이른바 촉탁의로 취업했다. 대학에 소속된 교수는 외래진료와 당직, 행정 업무, 수업까지 해야 하지만 촉탁의는 대부분 외래진료만 하고 이외 당직을 포함한 다른 업무는 하지 않는다. 의료계 인사들은 “촉탁의는 외래진료 횟수가 많기 때문에 월급도 교수보다 약 2배 더 받는다”고 했다.
40대 초반의 서울 소재 대학 병원 산과 교수였던 D씨는 올 2월 사직하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현지에서 기초 의학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두 교수 중 한 명은 개인 병원으로 갔고, 다른 한 명은 휴식 중이다. 더는 고위험 분만을 하지 않게 된 셈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우리나라 전체 임신 중 다태아 임신 비율은 5.8%다. 시험관 시술 등의 영향으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본(2%)이나 미국(3.2%)의 2~3배다. 그런데 다태아는 절반 이상이 조산으로 태어난다. 쌍둥이의 조산 확률은 50%, 세 쌍둥이 이상은 90%를 넘는다. 조산은 대표적인 고위험 출산이다. 위험한 출산은 느는데, 이를 맡을 대학 병원 산과 교수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산모와 아기가 위험에 빠지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본지 취재 결과, 서울에 사는 임신 26주 여성은 지난달 말 복통으로 한 여성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질 출혈이 심해졌다. 가족들이 대학 병원을 수소문했지만 가능한 병원이 없었다. 어렵게 서울의 한 대형 병원으로 갔지만, 이미 아기는 자궁 내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출혈이 심했던 산모는 혈액 봉투 45팩을 투여하는 응급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경북에 사는 임신 25주의 여성은 이번 추석 연휴 직후 갑자기 통증이 와 다니던 병원으로 갔다. 담당 의사는 대학 병원을 물색했지만 오래 걸렸다. 경북의 한 대학 병원으로 가던 중 이 산모는 구급차 안에서 출산을 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호흡이 없었던 아기는 현재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다.
또 경기도에 사는 임신 31주 여성은 배가 아파 개인 병원을 방문했다가 ‘태반 조기 박리(태반이 일찍 떨어져 나가는 것)’가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의사는 인근 지역 종합병원 8군데에 전원(병원 옮김)을 문의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2시간이 지나 서울의 대학 병원에 도착했지만 태아는 심정지 상태였다고 한다.
의료계에선 “정부가 저수가와 잦은 소송에 휘말리는 산과를 장기간 방치한 상황에서 올해 전공의 이탈까지 겹치자 산과가 더 흔들리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가령 우리나라 제왕절개술(초산)의 수가는 위험도에 따라 102만~200만원 정도다. 여기에 본인 부담금 등을 합한 제왕절개 분만비는 250만원 안팎이다. 미국의 11%, 일본의 35% 수준이다. 원가에도 못 미친다. 분만을 할수록 손해가 쌓이다 보니, 산과 교수들은 열심히 일하고도 병원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고위험 임신을 맡다 보니 소송 위험도 클 수밖에 없다. 최근엔 산과 소송에서 배상액이 10억~15억원에 이르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갈수록 기피 과가 되면서 남아 있는 교수들의 업무는 점점 늘어났다. 서울대병원의 한 산과 교수는 “한 달에 스물다섯번 밤이나 주말에 응급 환자를 진료·수술하러 병원에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현재 정확한 산과 교수 규모도 파악하고 있지 않다. 복지부 담당 간부들은 “산과 교수 인원 및 사직 규모 집계는 교육부 소관이라 따로 통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 의료계 관계자들은 “복지부는 필수 의료 살리기에 총 30조원을 쓰겠다고 발표했다”며 “그런데 정작 저출생 시대의 핵심적 필수 의료인 산과 교수의 인원조차 챙기지 않고 있다”고 했다.
서울 대형 병원의 한 산과 교수는 “산과처럼 24시간 대기해야 하고 수가도 낮은 진료과에는 병원이 전공의 인원도 적게 배정한다”며 “복지부가 필수 의료 인력 관리를 신경 써 왔다면 지금처럼 전공의가 적게 배정돼 산과 명맥이 끊길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국내 산과 교수가 2036년엔 97명으로 줄어들고, 2041년엔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59명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