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22일 오전 서울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 빈 병상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의료계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의대협회)가 22일 입장문을 내고 ‘여·야·의·정 협의체’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올 2월 의정 갈등이 시작된 이래 의료계에서 정부와의 공식 협의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처음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지난달 6일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지 46일 만이다. 이에 따라 의정 갈등 해결을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가 이르면 다음 주 출범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대한의학회 등은 입장문에서 “국민·환자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때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인한 대한민국 의료 붕괴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며 “전공의 수련 교육을 책임지는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생 교육을 담당하는 의대협회는 협의체에 참여하기로 결단했다”고 했다. 이진우 대한의학회장은 내부 공지에서 “전쟁 중에도 대화는 필요하다”고도 했다. 이에 따라 일단 협의체 출범은 가능해졌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참여를 환영한다”고 했다.

하지만 협의체 출범 전후로 여러 난관도 예상된다. 의정 갈등의 중심에 있는 전공의·의대생 대표들은 이날 “허울뿐인 협의체에 참여할 의향이 없다”고 했다. 법정 유일 의사 단체인 대한의사협회도 “현시점에서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전국의과대학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관계자는 “정부 입장에 변화가 없는데 협의체 참여로 정부에 ‘대화했다’는 명분만 줄 것이란 우려가 크다”고 했다. 의료계 내부 공감대를 얻지 못하면 ‘반쪽짜리 협의체’가 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도 “결단을 환영한다”고 했지만, 진성준 당 정책위의장은 “대한의학회 등이 의료계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보긴 어려워 현재로선 민주당이 참여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한의학회와 KAMC도 이날 의대 증원 등 정부 정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협의체 출범 전 의대생 휴학이 승인돼야 한다”며 협의체에서 2025년 의대 정원도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의료계-종교지도자협의회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대화를 하고 있다. 이날 의료계는 종교계에 현 의료대란 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 설득을 요청했다. /대한의사협회

여·야·의·정 협의체를 둘러싸고 그간 의료계 내부에선 찬반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도 정부와 대화는 해야 한다’는 입장과 ‘이대로 또 정부에 속을 수 없다’는 입장이 맞섰다. ‘대화 불가론’ 쪽이 목소리가 더 컸다. 그런데도 대한의학회와 KAMC가 협의체에 참여키로 한 것은 8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휴학 미승인으로 의대생들이 유급·제적될 위기에 놓여있고, 수능 시험(11월 14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현실도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이날 입장문에서 “하루라도 빨리 대한민국 의료가 정상화되길 바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라며 “정부의 일방적 정책에 대한 동의가 아닌, 정책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전문가의 책임감에서 비롯된 결정”이라고 했다. “수백, 수천 번의 번민과 숙고 끝에 백척간두에 선 심정으로 뜻을 모았다”고도 했다.

특히 대한의학회는 산하 190여 개 학회를 둔 의학 학술 단체의 총연합체로, 전공의 수련 교육과 전문의 시험을 관장한다. 이진우 대한의학회장은 본지에 “전공의·의대생을 대변하거나 의료계를 대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무도한 의료 정책이 강행되기 전에 일단 협의체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정부·여당은 지난달부터 꾸준히 이들과 대화하며 협의체 참여를 설득해왔다. 정부와 강하게 대립각을 세워 온 대한의사협회(의협)나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의 경우엔 당장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보고 먼저 대한의학회 등을 설득하는 데 주력한 것이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의료계 전체는 아니지만 일단 참여 의사를 밝힌 곳들과 협의체를 구성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다른 단체도 설득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야·의·정 협의체가 출범해 대화 물꼬는 트이더라도 현안 논의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주요 현안에서 의정 간 입장 차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대한의학회 등은 이날 “협의체가 출범하기 전에 의대생들이 제출한 휴학계가 승인돼야 한다”고 했다. 또 2026학년도는 물론 정부가 ‘건드릴 수 없다’고 한 2025학년도 의대 정원도 협의체에서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 ‘의사 정원 추계 기구’ 입법화를 위한 로드맵 설정, 한국의학교육평가원 독립성·자율성 보장, 의료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 구조로의 의료개혁특위 개편도 모두 협의체에서 논의돼야 한다고 했다.

추후 의협과 교수 단체, 의정 갈등 중심에 있는 전공의·의대생이 참여하거나 지지하지 않으면 ‘반쪽짜리 협의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의협은 이날 “두 단체의 결정을 존중하며 부디 의료계 전체 의견이 잘 표명될 수 있도록 신중함을 기해주길 당부한다”면서 “의협이 현시점에 협의체에 참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박단 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소셜미디어(SNS)에서 “허울뿐인 협의체에 참여할 의향이 없다”고 했고, 이 글에 손정호·김서영·조주신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름을 올렸다. 한 사직 전공의는 “대부분 전공의는 협의체에 대한 기대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환자 단체인 한국중증질환연합회도 이날 입장문을 내고 “환자단체 패싱(배제)에 반대한다”고 했다. 반면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한의학회와 KAMC의 결단에 응원을 보내며 모쪼록 논의가 잘 이뤄져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하루빨리 건강해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종태 KAMC 이사장은 본지에 “전공의·의대생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의대생들의 휴학이 승인되지 않으면 협의체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협의체가 출범할 경우 올바른 방향으로 의료 개혁을 논의하면서 전공의·의대생, 다른 의료계 단체의 신뢰와 공감을 이끌어 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