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회의실에 모인 의협 대의원 224명이 임현택 의협 회장의 탄핵안을 다수 표결로 가결했다. 하지만 대신 집행부 역할을 할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안건은 부결시켰다. 비대위가 어떤 역할을 할지 대의원들 사이에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결을 마친 대의원들이 속속 회의장을 떠났다. 그때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이 일어나 “차기 의협 회장 선출 전까지 비대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재투표가 열렸다. 방금 전 부결된 비대위 출범이 삽시간에 ‘가결’로 뒤집혔다. 이날 회의 참석자들은 “박 위원장이 아니었다면 비대위 재투표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박단의 힘’이 드러난 장면이다.
전공의들은 지난 2월 시작된 ‘의료 파행’의 당사자다. “전공의가 정부와 합의하면 사태는 끝나고, 거부하면 안 끝난다”(서울대병원 교수)고 한다. 이 전공의들의 리더가 박 위원장이다.
의학전문대학원 출신인 박 위원장이 의과 대학 출신이 대부분인 전공의 사회에서 ‘겉돌고 있다’는 얘기도 한때 있었다. 헛소문이었다. 취재를 할수록 그의 내부 악력(握力)은 더 세게 느껴졌다. 그는 최근 별다른 의견 수렴 없이 여·야·의·정 협의체 불참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공개 비판한 전공의는 아무도 없었다. 박 위원장은 지난 4월 대통령과의 면담 내용을 아직도 대다수 전공의와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본지와 만난 한 사직 전공의는 “면담 후에 단체 채팅방에서 여러 전공의가 대통령과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오히려 ‘왜 이리 궁금한 게 많으시냐’고 날 선 반응을 보이더라”고 했다.
의협 회장이 무기력하게 탄핵당한 것도 박 위원장이 7일 대전협 명의로 발표한 ‘임현택 탄핵 요구’ 성명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현 상황에서 박 위원장은 대통령과 함께 의정 갈등을 풀 수 있는 양대 권력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주도로 11일 여·의·정 협의체가 출범하자, 박 위원장은 “무의미하다”고 절하했다. 당사자인 전공의, 그들의 대표인 본인이 빠지면 모든 대화가 허사라는 스스로의 ‘위치’를 드러낸 것 같다.
하지만 권력엔 책임이 따른다. 의정 사태 10개월간 환자도, 병원에 남은 의사도 지칠 대로 지쳤다. 이제 키를 쥔 박 위원장이 차라리 의협 회장을 맡아 선봉에 섰으면 한다. 정부와 대화를 하든, 대치를 하든 그가 주도해서 성과를 내고 또 책임을 져야 할 시기 아닌가.
책임은 안 지고 뒤에서 권한만 행사하려는 것은 ‘수렴청정’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박 위원장은 그간 다른 의료 단체와 정부 사이에서 대화가 시도될 만하면 퇴짜를 놓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그런데 박 위원장이 사태 해결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