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후 서울 역삼동 서울36의원에서 방문 진료 전문 의료진이 의료품이 비치된 선반과 환자 관리용 컴퓨터가 있는 사무실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유은실 대표원장, 김성민 간호사, 이보현 사회복지사, 이정권 원장, 사직 전공의 정재원씨. 이들은 환자와의 편안한 소통 등을 위해 의사 가운을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일한다./박상훈 기자

26일 오후 찾은 서울 강남구 ‘서울36의원’에는 환자가 진료를 신청하는 공간도, 진료실도 없었다. 동네 의원이 아닌 회사 사무실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은 외래 환자는 받지 않는 방문 진료 전담 의원이기 때문이다. 서울 의대 졸업 36회 동기들이 모여 만들어 ‘서울36′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서울 의대 출신 시니어 의사 2명과 사직 전공의 등 젊은 의사 2명이 주 1~2일씩 돌아가며 하루 5명 안팎의 환자를 방문 진료한다.

이곳으로 방문 진료 신청이 들어오면 소속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한 팀이 되어 환자의 집을 찾아간다. 다른 환자 집으로 이동할 때도 의원 승용차를 타고 다 같이 움직인다. 유은실(67) 서울36의원 대표원장은 “어디를 가도 진료를 받지 못하고 집에만 갇혀 ‘집이 무의촌(無醫村)’인 환자들이 있다”며 “환자가 노년을 잘 보낼 수 있도록 그들을 찾아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의사만이 할 수 있는 ‘노년 잘 보내는 법’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장을 지낸 유 원장은 대학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강의하는 등 환자의 생사 문제를 고민해왔다.

서울36의원은 코로나 기간이었던 2021년 12월 서울 의대 36회 졸업 동기들의 온라인 송년회에서 유 원장이 먼저 제안했다. 주치의 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환자와 보호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의사’가 돼 보자는 취지였다. 진료를 보지 않는 병리과 의사인 유 원장이 방문 진료 의원을 함께 하자고 동기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래픽=양인성

당시 이경영(71) 원장 등 동기 2명이 개원 준비 모임에 합류했다. 이 원장은 건국대병원에서 약 30년간 외과 교수로 근무한 베테랑 의사다. 건국대 충주병원장과 건국대 의전원장 등도 지냈다. 그는 “우리나라 노인들이 많이 들어가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생활 위주로 돼있기 때문에 의료 복지 측면에서 매우 약해 불행한 환자와 보호자가 많다”며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신체적·정신적 측면에서 안심을 시켜주는 방문 진료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문 진료를 위해 현재 살고 있는 충북 제천시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찾는다.

2022년 3월 문을 연 서울36의원은 그동안 총 2838건의 방문 진료를 했다. 노인 인구 증가로 방문 진료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다. 그러나 외래 진료를 포기할 만큼 방문 진료의 수가가 높지 않아 대부분 의원은 방문 진료를 꺼린다. 이 원장은 “운영이 빡빡한 실정이라 방문 진료 의사들은 ‘반(半)봉사 활동’처럼 일해야 한다”며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한테 방문 진료를 하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우리 같은 은퇴 의사들이 방문 진료를 하는 게 활성화되면 좋겠다”고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주 1회 근무 기준 월급으로 150만원을 받는다.

환자의 집으로 '출근' - 이정권(왼쪽) 서울36의원 원장이 간호사(오른쪽)와 방문 진료하는 모습. /김지호 기자

삼성서울병원·한양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출신인 이정권(69) 원장도 서울36의원에서 방문 진료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이정권 원장은 유 원장의 서울 의대 2년 선배다. 유 원장의 합류 제안에 흔쾌히 응한 이유에 대해 이정권 원장은 “환자들의 충족되지 않은 요구를 채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학 병원에서 30여 년간 환자를 진료하면서, 환자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정권 원장에게는 방문 진료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노인성 질환을 진료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이 원장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에게는 집에 의사가 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며 “지금 돈 벌어서 뭐 하나. 생계를 위해 돈 벌고자 하는 건 이미 끝났고, 이제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올해부터는 사직 전공의 등 2030세대 젊은 의사 2명도 서울36의원에서 방문 진료를 하고 있다. 충북 음성군 보건소에서 공중보건의사 근무를 마치고 지난 8월부터 일하기 시작한 안현환(33)씨는 “공보의로 일하며 거동이 불편해 보건소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많이 봤다”며 “방문 진료에 관심이 있어 현장에서 직접 배우고 싶었다”고 했다. 가정의학과 사직 전공의 정재원씨도 “제한된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대학 병원과는 달리 30분 동안 한 환자를 깊이 진료하는 방문 진료를 경험할 수 있어 매우 만족한다”고 했다.

최근 서울 강남구는 서울36의원 등 의원 5곳과 업무 협약을 맺고, 방문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의원에 소개시켜 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민·관이 협력해 방문 진료를 활성화하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