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할머니, 인증패 보이세요?”
홍계향(90) 할머니의 아너 소사이어티(1억 이상 기부자 모임) 가입식 장소는 이 상을 만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이 아닌 납골당이었다. 모금회 직원 두 명이 지난 12일 경기 성남시 하늘누리 제2추모관을 찾아 홍 할머니의 흰 유골함 앞에 인증패를 펼쳐 보이는 것이 가입식의 전부였다. 인증패를 유골함 옆에 놓으려 해봤지만, 너비가 한 뼘 남짓한 좁은 보관함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금회 이수진 과장의 훌쩍이는 소리가 빈 납골당 안에 울렸다.
홍 할머니는 지난 5월 2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2014년 성남시 중원구의 본인 소유 4층짜리 다가구주택을 모금회에 ‘유산 기부’했다. 할머니 사후에 매각 절차가 진행됐고, 매각 대금 7억1000만원이 모금회 계좌에 입금되기 전날인 12일 납골당에서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식이 열린 것이다.
홍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병문안을 온 경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강성훈 팀장에게 띄엄띄엄 마지막 말을 남겼다. “경로당, 따신 밥….” 강 팀장이 “경로당 어르신들한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라는 말씀이죠?”라고 하자, 강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개 밑에서 빛바랜 통장 하나를 꺼내 건넸다. 2000여 만원이 들어 있었다. 남은 재산 전부였다. 그는 일주일 후 임종을 지키는 사람 없이 혼자 요양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부잣집 먹다 남은 밥 받았을 땐…”
홍 할머니는 1934년 부산에서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학교는 못 다녔다. 열 살 때부터 바닷가에서 파래와 우뭇가사리를 뜯어 새벽 장에 내다 팔았다. 17세 때 부산 범일동의 조선방직에 취업했고, 21세에 어머니의 권유로 열두 살 많은 황해도 출신의 남편과 결혼했다. 홍 할머니는 과거 모금회 내부 소식지 인터뷰에서 “결혼식 다음 날 유일한 예단이었던 양단 치마저고리를 팔아 나일론 양말을 잔뜩 샀다”며 “시집간다고 그만둔 방직 회사 문 앞에서 좌판을 깔고 팔았는데 사는 게 급해서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고 했다.
몇 년 뒤 남편을 따라 서울로 왔다. 남편은 대장간에서 일했고, 할머니는 남대문시장에서 뗀 건어물을 머리에 이고 가파른 만리재를 넘어 공덕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당시 부촌이었던 연희동에서 가사도우미 일도 했다. 그는 “한 부잣집에서 일할 때였는데 자기들 먹다 남은 밥을 한곳에 모아 내게 먹으라고 줬다”며 “숟가락으로 살살 풀어 놓았으면 몰랐을 텐데, 밥그릇 모양으로 동그랗게 뭉쳐진 밥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을 보니 퍽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모은 돈으로 1970년대 서울 필동에서 채소 가게를 열었다. 남편 고향 이름을 따 ‘황해 식품’이라 지었다. 장사가 잘됐다. 그런데 1980년 초 다양한 제품을 파는 수퍼마켓이 생기면서 장사를 접었다. 이사만 열 번 다닌 서울살이의 끝이었다. 할머니는 모금회 직원들에게 “살면서 좋았던 때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행복이란 걸 잘 모른다. 늘 읽는 성경에도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는 구절은 없더라”며 “매일 정성을 다해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1983년 성남시로 이사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려는 공장이 없었다. 어렵게 액자 공장의 세척반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주변에 “쇠에 녹이 생기지 말라고 독극물로 세척하는 작업이었다”며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남자 월급은 30만원이었는데 홍 할머니는 50만원을 벌었다. 철야 작업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액자 공장이 2년 후 문을 닫자, 할머니는 성남 모란시장에서 김·미역을 파는 노점상을 했다. “물건을 압수하는 단속반이 제일 무서웠어. 그때마다 모란시장 남양종묘집 주인이 단속반원 앞에서 같이 빌어줬어. 참 고마운 분이야.” 노점상을 접은 뒤엔 지하철 모란역 청소 일을 했다.
그러다 2002년 성남시 성남동 국유지에 있는 집을 샀다. 몇 년 뒤 나라 땅인 집 부지도 30만원에 싸게 샀다. 건물도 4층으로 올렸다. 1층엔 할머니 식구가 살고 2·3·4층과 옥탑방엔 세입자가 살았다.
살 만해진다 싶었을 때 남편에게 치매가 왔다. 할머니에게 자주 손찌검을 했다. 할머니 얼굴엔 매일 시퍼런 멍이 있었다고 한다. 2010년은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해 외동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주변에 딸의 병명은 물론 나이, 이름조차 말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세상 모든 여자가 좋은 남편을 만날 순 없으니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면서도 “딸은 내 굽은 어깨가 너무 말랐다며 울어주던 유일한 아이였다”고 했다. 2013년엔 남편도 눈을 감았다. 할머니는 “돌보던 남편까지 가고 나니 더 살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고 했다.
할머니는 “장기 기증 약속이 그때 나를 살렸다”고 했다. 할머니는 2006년 사후 장기 기증을 약정했다. 그는 모금회가 2020년 만든 ‘아름다운 생애보’ 인터뷰에서 “알아보니 내 한 몸으로 참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며 “내가 그때 목숨을 끊으면 수많은 생명을 살릴 기회를 놓치게 되는 거니까 죽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집 마련 후엔 월세 절반 깎아줘
할머니는 남편이 떠난 이듬해인 2014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재산을 사후에 기부하는 ‘유산 기부’ 제도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당일에 바로 모금회를 찾아 자신의 ‘평생 고생’이 담긴 집을 기부했다. 홍 할머니는 2014년 모금회 인터뷰에서 “친정 부모처럼 날 아껴준 남양종묘집 사장님, 쉬면서 일하라고 의자를 권했던 액자 공장 사장님, 이제 바닥 그만 좀 닦으라고 밀대를 뺏던 역장님 같은 분들의 인정이 날 살리고 이 집을 살 수 있게 했다”며 “나도 돌려주고 가고 싶다”고 했다.
‘할머니의 전부나 다름없는 집을 내놓는 게 불안하지 않으시냐’는 질문엔 “내가 못 살게 되면 정부에서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주겠지. 평생토록 고생에 단련이 됐는데 뭐가 두렵겠나. 기부한 날이 내 인생 가장 신나는 하루였다”고 했다.
같은 경로당을 다닌 최홍기(72)씨는 “비싸다고 휴대전화도 안 사던 양반이 세입자가 어렵다고 하면 주변 시세의 절반도 안 되는 월세(20만~40만원)를 또 깎아주고, 보증금을 안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할머니 집을 판 7억1000만원은 한 부모 가정, 소년·소녀 가장, 장애인 등 취약 계층에 쓰인다.
마지막까지 독거노인 배달 봉사
홍 할머니는 기부 후 자택 바로 맞은편에 있는 성남동 복지회관에서 독거노인 등에게 도시락을 갖다주는 봉사를 했다. 그러다 작년 9월 다리뼈가 부러져 요양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고관절까지 골절돼 병세가 점점 나빠졌다. 나중엔 산소 콧줄을 달아야 했다. 모금회 강성훈 팀장은 “당시 할머니에게 유산 기부를 취소하시고, 그 돈으로 고급 요양원으로 가서 큰 병원에 다니시라고 한 적이 있다”며 “할머니는 ‘약속 지켜야지’ ‘평생 이골이 난 고생 조금 더 하면 된다’고 하시더라”고 했다.
올 5월 20일 오전 7시 홍 할머니는 영면에 들었다. 같은 경로당을 다닌 최홍기 할아버지가 상주 역할을 했다. 그는 “홍 할머니가 ‘자다가 편하게 가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임종 후 표정이 너무 밝아 다들 놀랐다”고 했다. 경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김효진 사무처장은 “할머니 뜻대로 문상 온 경로당 어르신들께 밥과 고깃국을 대접했다”며 “모금회 직원들과 어르신들이 상가 식당 밥상에 앉아 서로 ‘홍계향 할머니가 주시는 밥이에요’라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모금회는 병원비와 장례비를 치르고 할머니 통장에 남은 1000여 만원으로 성남동복지회관에 경차를 사줄 계획이다. “성남동엔 좁은 길이 많아 어려운 가정을 방문하려면 작은 차가 필요하다”는 홍 할머니 뜻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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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너 소사이어티 가입 문의 080-890-1212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