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도 마음만 먹으면 1억원이라는 큰돈을 기부할 수 있다는 걸 널리 알리고 싶었어요.”
지난 19일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에서 만난 권분자(72)씨는 이렇게 말했다. 권씨는 지난 9월 사랑의열매에 1억원을 기부해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대구 지역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252명 가운데 가정주부는 권씨가 유일하다.
권씨는 스물일곱 살, 당시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아이를 임신하고 10여 년간 남편과 함께 대구의 여러 시장을 돌며 옷 장사를 했다. 쉬는 날 없이 새벽 일찍 일을 나갔다. 권씨는 “좁은 단칸방을 옮겨 다니며 아이들을 키웠다. 그때 참 힘들게 살았다”며 “옛날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라고 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 딸이 4학년 되던 해인 1992년 권씨 부부는 그간 옷 장사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대구의 24평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권씨 남편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중개소를 차렸다. 권씨는 아이 둘을 키우는 데 전념했다.
그러다가 11년 전부터 ‘아름다운 이야기 할머니’ 사업에 참여했다. 이 사업은 여성 어르신이 유아 교육 기관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우리 옛이야기와 미담 등을 들려주는 활동이다. 권씨는 일주일에 세 번씩 어린이집, 유치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하루에 받는 활동비는 3만원. 권씨는 이 돈을 한 번도 쓰지 않고 10년간 저축해 5000여 만원을 모았다.
이 밖에 생활하면서 아낀 돈을 틈틈이 저축해 1억원을 모았다. 돈 관리를 위해 통장도 5개 이상 가지고 다녔다. 권씨는 “돈은 가지고 있으면 쓰기 십상”이라며 “‘낭비란 절대 없다’는 생각으로 알뜰살뜰하게 살았다”고 했다. 치약도 끝까지 쓰려고 끄트머리를 잘라 속에 남은 내용물이 없어질 때까지 3~4번은 더 썼다.
권씨가 사랑의열매에 1억원을 기부하기 전엔 TV 광고를 보고 월 2만원씩 소액 기부를 했다. 그런데 이야기 할머니 활동 등을 통해 받은 돈을 꾸준히 저축하면서 나중에 의미 있는 곳에 기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야기 할머니 활동 마지막 해인 재작년에 기부하려 했지만, 그해엔 마땅한 기부처를 찾지 못했다. 그러다 딸이 사랑의열매를 소개해 줘 지난해 4월 기부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 이후에도 가족들이 큰돈을 기부한다고 말릴까 봐 한동안 알리지 않았다. 권씨는 “살면서 자긍심, 자부심은 손톱만치도 없었는데 계약서를 작성하던 날만큼은 마음이 들떴다”고 했다.
권씨가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기부할 것이라고 처음 주변에 알렸을 때 지인들은 놀랐다고 한다. ‘차라리 그 돈을 생활비에 보태라’거나 ‘나이 들어서 뭐 하러 기부를 하나, 그 돈으로 편하게 여행이나 다녀라’ 등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권씨는 “애초 돈을 벌려는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장사를 했지, 소소하게 모은 돈을 허투루 버릴 생각은 없었다”며 “남편과 함께 번 돈이 아니라 내 힘으로 모은 돈을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언젠가 꼭 기부를 해봐야겠다고 꿈꿔왔는데 정말 이뤄내리라곤 생각 못 했다”며 “실제 기부해 보니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근 권씨는 봉사 활동을 하며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이후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잊고 지냈던 나의 이름 석 자로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고 했다. 지난해 10월엔 미혼모 시설을 방문해 아이들을 돌봤고, 올해 4월엔 중증 장애인 시설을 찾아 자신의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봤다. 권씨는 “젊었을 적 다양하게 기부 못 해본 게 아쉽다”며 “훗날 재산을 사후에 기부하는 ‘유산 기부’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대구=오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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