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숙취 해소제 ‘컨디션’으로 유명한 제약사 HK이노엔이 이달 초 직원들에게 “가족의 개인 정보 수집 동의서를 제출해달라”고 공지한 것으로 23일 알려졌다. 부모, 배우자, 형제 등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공지문에 명시했다고 한다. 다른 1~2군데 중견 제약사도 비슷한 지침을 준비 중이다.

이 회사가 ‘가족 정보’를 요구한 것은 자사 내 ‘양다리 영업’을 하는 직원들을 잡아내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약사들은 오랫동안 영업팀 직원들이 몰래 다른 경쟁사의 약품도 파는 ‘양다리 영업’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아왔다. 최근 양다리 영업맨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자, 이들 중 상당수가 가족 명의로 사업자 등록·신고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제약사들이 이런 꼼수를 색출하기 위해 가족 정보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양다리 영업맨’들은 기존에 닦아 놓은 병원·약국 등에 다른 제약사 약품을 공급하고, 그 판매액의 40~50%를 수수료로 받는다. 이들 대부분은 그간 사업자를 내지 않고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제약사들이 적발하기 어려웠다. 중견 제약사 간부는 “제약사 영업 직원의 3분의 1 이상이 ‘이중 영업’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약업계에선 “이들이 받는 수수료는 의사 리베이트로도 많이 흘러간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런데 최근 보건복지부가 규정을 강화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정부는 지난 10월 관할 보건소에 신고를 한 업체만 약품을 팔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징역형까지 받을 수 있는 ‘의약품 판촉 영업자 신고제’를 도입했다. 이후 제약사들이 판촉 영업 사업자 자격이 없는 ‘미신고 업체’엔 수수료를 주지 않는 일이 다수 발생했다. 이에 ‘이중 영업’ 직원들이 어쩔 수 없이 최근 대거 가족 등 명의로 사업자 신고를 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의약품 판촉 영업 업체로 등록한 사업자(CSO)는 2019년 3000개 정도였는데, 최근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1만5000여 개로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약업계에선 “올 게 왔다”는 분위기다. 제약업계 한 인사는 “제약사가 이제 정보 공개 청구 등으로 신고 업체 목록상 업체 대표와 소속 직원의 가족 신상을 비교해 색출 작업을 할 것”이라면서 “엄청나게 많은 영업 직원들이 적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