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현국

“빨리, 숨 쉬기 힘들어. 주사 좀.”

백발의 70대 할아버지가 손수건으로 입을 막은 채 병원으로 들어와 바로 진료실 문을 열고 의사에게 고함쳤다. 의사는 청진기를 환자 등과 가슴 등에 댄 뒤 “가래가 심하세요”라고 했다. 이 환자는 주사를 맞고 호흡기 치료를 받은 뒤 병상에 누워 안정을 취했다. 9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강남구 일원동의 한 소아과. 대기실의 좌석 17개는 남녀노소 환자들로 꽉 차 있었고 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병원 문 앞에도 엄마들이 아이를 안거나 업은 채로 진료 순서를 기다렸다.

이날 오후 2시, 서울 구로구의 소아·청소년 전문 병원인 우리아이들병원. 고열에 시달려 우는 딸을 안고 있는 아빠와 콜록거리는 남매 둘을 데려온 엄마 등으로 대기실은 꽉 차 있었다. 이날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 만에 환자 411명이 다녀갔다.

발열·기침을 일으키는 급성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이 동시에 유행하고 있다. 독감은 8년 만에 최대 유행 중이고 영유아에게 특히 위험한 RSV(호흡기 세포 융합 바이러스) 환자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 사람 메타뉴모 바이러스(HMPV)의 확산세까지 겹쳐,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 4개가 동시에 유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독감 등이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달 말이 고비”라며 “특히 이 시기에 민족 대명절인 설까지 겹쳐 호흡기 바이러스의 폭발적 확산이 우려된다”고 했다.

그래픽=이철원

◇독감 입원 한달새 10배, RSV 환자 9주째 증가 “봄까지 유행 이어질수도”

정재훈 고려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여러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이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유행하고 있다”며 “코로나 시기에 상대적으로 눌려 있던 다른 호흡기 감염병들이 다시 올라왔다고 봐야 한다”고 했다.

감염 속도가 가장 빠른 건 독감(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이다. 9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해 마지막 주(12월 22~28일) 전국의 병의원 300곳을 찾은 통원 환자 중 독감 환자는 1000명당 73.9명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 31.3명에서 2.4배로 뛴 것이다. 이어 올해 첫째 주 집계(12월 29일~1월 4일)에서도 독감 환자가 99.8명으로 전주 대비 1.4배로 또 늘었다. 질병청 관계자는 “2016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사상 최고치”라고 했다.

RSV(호흡기 세포 융합 바이러스) 입원 환자 수도 9주 연속 증가했다. 질병청에 따르면, 이 질환 표본 환자는 지난해 10월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지난달 마지막 주엔 603명으로 급증했다. 전주(503명)보다 20% 늘었다. RSV는 어린아이들을 둔 부모 사이에선 ‘공포의 바이러스’로 불린다. 기침·고열 등을 동반하는 이 바이러스는 특히 영유아에게 폐렴이나 모세기관지염을 일으킬 수 있어 위험하다. 정재훈 교수는 “독감과 RSV는 심할 경우 아이들이 사망할 수 있는 질환”이라고 했다.

코로나도 지난달 마지막 주 입원 환자가 113명이었다. 일주일 만에 71% 뛰었다. 여기에 중국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사람 메타뉴모 바이러스(HMPV)의 국내 환자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 바이러스는 주로 영유아에게 감염된다. 발열과 가래, 쌕쌕거림 증세가 나타나고 폐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질병청은 “환자 수는 11월부터 지난달 마지막 주까지 6주가량 계속 늘었다”며 “지난달 마지막 주 입원 환자 수는 183명으로 2주 만에 2.2배로 뛰었다”고 했다.

대다수 전문가는 “여러 바이러스가 동시 유행하는 피크(정점)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했다. 김홍빈 분당서울대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예년엔 코로나 유행으로 다른 호흡기 바이러스가 유행하지 않거나 지금보다 작은 규모였는데, 올해는 12~1월에 (동시에) 급격히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런 추세가 몇 주는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정용필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이달 말 설 연휴가 변수”라며 “올해는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자 수가 내려앉았다가 설 연휴에 다시 올라가서 정점을 찍을 수 있다”고 했다. 유행이 더 오래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의료계에선 작년 2월부터 1년 가까이 이어진 의정 갈등이 이 같은 상황의 강도와 기간을 가르는 주요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많다. 작년 2월, 24시간 응급실과 입원실을 지키던 전공의(인턴·레지던트)가 집단 이탈하면서 서울의 대형 병원 수술·입원은 크게 줄었다. 남아 있는 의사 중 번아웃(극도의 피로)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정용필 교수는 “독감 등 감염자가 워낙 많다 보니 중증 환자들이 계속 응급실을 찾고 있다”며 “중증 환자 치료에 대한 의료진 부담이 많이 늘고 있다”고 했다. 허약해진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밀려드는 호흡기 질환 환자들을 감당 못 해, 이 같은 상황이 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최원석 고대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고령자와 영유아는 독감에 걸리면 중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다른 연령대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독감 백신을 지금이라도 맞는 것이 좋다”며 “마스크를 꼭 착용하고, 외출 후 돌아왔을 때는 손을 30초 이상 씻는 등 기본적인 위생 수칙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