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중심인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는 위대한 미국인들을 기리는 현대판 신전(神殿)들이 즐비하다. 토머스 제퍼슨 기념관(Thomas Jefferson Memorial)도 그중 하나다. 내셔널 몰 한가운데 서 있는 워싱턴 기념탑의 남쪽에 있는 제퍼슨 기념관은 북쪽의 백악관과 마주 서 있다. 제퍼슨 기념관으로 가는 길은 내셔널 몰의 인공 호수인 타이들 베이슨(Tidal Basin)을 따라 나있다. 길 좌우는 3000여 그루가 넘는 벚나무로 가득하다. 이 길은 언제 와도 좋지만 특히 벚꽃 만발하는 봄이 최고다.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보이는 제퍼슨 기념관은 홀로 웅장하지만 주변과 조화롭다. 그렇게 벚나무 길을 걸어 제퍼슨 기념관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진다. 기념관이 내뿜는 ‘후광(後光)’ 때문이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닫게 된다. 그중 하나가 선진국의 의미 부여다. 선진국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떤 인물, 사건, 건물에 의미를 부여한다. 제퍼슨 기념관도 예외가 아니다. 이곳은 단순히 제퍼슨이란 사람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며 신조(信條)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건국의 근간이며 미래의 희망이다.
◇모든 형태의 독재에 반대하다
외관부터 그렇다. 고대 로마 양식의 높은 열주가 원형 건물을 따라 도열해 있고, 지붕은 반원형이다. 로마의 판테온과 똑같다. 왜 하필이면 ‘만신전(萬神殿‧모든 신을 모시는 신전)’을 뜻하는 판테온일까? 판테온이 관용과 종교의 자유를 상징하기 때문이다(세계 문명 기행 35회 참조). 제퍼슨이 평생에 걸쳐 투신했던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관용과 종교의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미국인들은 그런 사실을 나라를 세울 때부터 알고 있었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제퍼슨의 동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썰렁하거나 외롭지 않다. 오히려 강렬하다. 건물 안쪽 벽면에는 제퍼슨이 남긴 문장들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서, 버지니아 종교 자유헌장 등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벽면과 내부 돔 사이에 적힌 제퍼슨의 맹세다.
‘I HAVE SWORN UPON THE ALTAR OF GOD, ETERNAL HOSTILITY AGAINST EVERY FORM OF TYRANNY OVER THE MINDS OF MAN’
‘나는 신(神)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를 영원히 용서치 않겠노라 맹세했다.’ 나는 갈 때마다 제퍼슨의 맹세를 읽고, 또 읽는다.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다. 이 문장이 제퍼슨의 전부다. 그는 왜 자유와 독립을 꿈꿨는가? 그는 왜 공화국을 세웠는가? 그는 왜 종교의 자유를 주장했는가? 그는 왜 대학을 세웠는가? 모두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적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독재(tyranny)’였다. 육체를 억압하는 물리적인 독재만이 아니다. 다수결의 원칙을 내세운 형식적인 독재만이 아니다. 제퍼슨은 인간의 정신을 조정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형태의 독재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다
단호히 독재와 맞섰던 투사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버지니아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그의 가족은 개척지에서 농장을 일구며 부를 축적했다. 청년이 된 제퍼슨은 개척지를 벗어나 대학에 갔고,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됐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으로 꽉 찬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당대의 애국주의자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제퍼슨은 자유와 자치를 중시했고, 영국이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에 분노했다. 그는 2차 대륙회의(1775~1781)에 버지니아주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함으로써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탁월한 문장력과 소탈한 태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대륙회의는 그에게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맡겼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인간에게는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양도할 수 없는 권리가 있다. 그것은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다.”
영국의 대헌장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자유와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이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는 문장은 그렇게 제퍼슨에 의해 탄생했다. 제퍼슨은 문장가로서뿐 아니라 법률가·외교관·정치가로서도 유능했다. 대륙회의 대표를 시작으로 버지니아주 의원, 연방의회 의원, 버지니아 주지사, 프랑스 대사, 국무장관,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 당시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주요 관직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직접 묘비명을 작성하다
토마스 제퍼슨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에 이어 미국의 3번째 대통령에 당선됐다(1800년). 임기는 1801년 3월부터 1809년 3월까지였다. 재임 기간 가장 큰 업적은 루이지애나를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에게서 매입한 것이었다(1803년). 미국에는 ‘루이지애나’란 이름의 주(州)가 있지만, 1800년대 초반의 루이지애나는 미시시피강 서쪽에 위치한 광활한 영토를 뜻했다. 이때 매입한 땅의 규모는 214만㎢로 오늘날 미국의 13주에 걸쳐있다. 루이지애나 영토 매입을 통해 미국은 서부 개척의 기반을 마련했고,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북부와 남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입 과정에서 제퍼슨은 헌법을 엄격하게 해석해야 한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저버렸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새로운 영토를 획득할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는데도 루이지애나 매입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매입 자금으로 당시로서는 거금인 1500만달러를 지출함으로써 재정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대통령 선거 공약도 스스로 폐기했다. 왜 그랬을까? 모두 국익을 위해서였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자신의 신념과 공약을 현실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민주공화국의 상식을 제퍼슨은 알고 있었다.
그의 결단은 애국과 용기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끝이 아니다. 그의 참된 가치는 고향 땅 몬티셀로에 세워져 있는 묘비명에서도 읽힌다. 묘비명은 제퍼슨이 살아생전에 직접 썼다.
‘여기 토머스 제퍼슨 잠들다.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의 저자이며, 버지니아 종교 자유 법안의 입안자이고, 버지니아 대학의 아버지다.’
묘비명 어디에서도 ‘대통령’을 비롯해 그가 거쳤던 수많은 관직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나라의 독립과 고향 버지니아의 종교 자유에 기여했고, 민주주의의 기둥이 될 시민을 기르기 위해 대학을 세웠다는 세 ‘업적’만이 새겨져 있다. 제퍼슨에게는 어떤 자리에 올랐느냐보다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다. 국익을 위해 신념을 포기할 줄 알았던 용기와 더불어 그의 이런 태도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제퍼슨 기념관이 워싱턴 DC의 심장에 서 있는 이유다. 꼭 방문해보기를 추천한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생각하는 시민이라면 그곳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저 자리만 탐할 뿐 그 자리에서 어떤 업적을 남길지 고민하지 않는 수많은 소인배에게 지친 시민이라면 작으나마 위안을 받을 것이다. 물론 그 모든 이유를 떠나 제퍼슨 기념관은 눈부시게 아름답다./워싱턴 DC, 몬티셀로=송동훈
파리의 한복판에도 제퍼슨 像 우뚝
제퍼슨을 기념하는 가장 인상적인 동상은 프랑스 수도 파리 한복판에 있다. 프랑스와 미국의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의 정확한 위치는 튀일리 정원과 오르세 미술관을 잇는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다리의 남단이다. 인도교이기 때문에 오가며 편하게 만날 수 있다. 워싱턴 D.C.의 제퍼슨에게서 범접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느껴진다면, 파리의 제퍼슨은 소박하고 인간적이다. 표정에서는 단호함과 영민함이 동시에 읽힌다. 예술과 문화의 도시 파리답게 제퍼슨의 손에 들린 문서는 독립선언서와 같은 거창한 문서가 아니라 제퍼슨이 로마의 판테온을 모델로 직접 설계한 버지니아 몬티셀로의 설계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