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 가야산 주변에 있는 열 고을을 내포(內浦)라고 한다. 홍주, 결성, 해미, 서산, 태안, 덕산, 예산, 신창, 면천, 당진 같은 마을이 그 내포다. 큰 바다가 내포를 만나면 뭍으로 파고들어 ‘육지 속 바다’가 된다. 그래서 ‘내포(內浦)’다. 바다와 땅이 섞여 있기에 천주교 같은 바깥 문물도 일찍 들어왔고, 비산비야(非山非野) 충청 땅답지 않게 산도 험준해 산이 품은 사연도 많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광해군 아들 이지가 도망가려 했던 땅.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자기 부친 묘를 옮겨 기어이 아들과 손자를 천자(天子)로 만든 땅. 심지어 최근 소유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너무나도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다. 인조반정에서 대원군과 세한도까지, 그 사연 이야기다.
광해군 세자 이지의 탈출극
1623년 3월 13일 능양군 이종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이 죽인 이복동생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유폐 중이었는데, 그녀는 모시러 온 반정 세력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친히 그들 목을 잘라 망령에게 제사하고 싶다.”(1623년 3월 13일 ‘인조실록’) 반정 세력이 겨우 뜯어말려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광해군과 왕비는 강화도로, 그 아들인 세자 이지(李祬) 부부는 부속 섬 교동으로 유배당했다.
두 달 뒤인 5월 22일 밤 이지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체포됐다. 땅굴 길이는 70척(약 23m)이나 됐다. 이를 위해 세자는 보름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몸을 줄였고, 세자가 굴을 파면 세자빈 박씨가 그 흙을 받아 방에 쌓았다. 체포된 세자는 6월 25일 자진(自盡) 왕명을 받고 목을 매 죽었다. 세자빈은 남편 체포 사흘 만에 역시 목매 죽었다.(1623년 5월 22일 등 ‘인조실록’)
그런데 함께 체포된 하인 막덕(莫德)은 이렇게 증언했다. “(세자가) 바로 도망쳐 나와 마니산으로 가려다가 가야산(伽倻山)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최종 목적지가 예산에 있는 가야산이라는 것이다. 왜 가야산인가. 이유가 있었다.
충청도 양반 조극선의 일기
“어제 모두 가야사에 모였다. 가야사는 지금 동궁의 원당이다. 궁중 노비라는 자가 막 와서는 양반 욕질을 해댔다. 그래서 돌아왔다(昨日會伽寺 今爲東宮願堂 所謂宮奴者方來 辱極兩班 故還也·작일회가사 금위동궁원당 소위궁노자방래 욕극양반 고환야).”(조극선 ‘인재일록’ 4책 1620년 10월 1일)
양반들이 승려들을 천민 취급하던 그때, 조극선이라는 예산 양반이 가야산 가야사에 놀러 갔다가 혼쭐이 나서 돌아왔다는 일기다. 여기에 ‘지금 동궁의 원당’이라는 말이 나온다. 가야사가 훗날 왕이 될 세자의 원찰이라는 뜻이다. 왕실 원찰이 되면 그 지역에서 막강한 권력자가 된다. 절은 세금을 면제받고 부역 또한 면제받는다. 천대받던 절집 사람들과 지역 양반들 신세가 완전히 역전되는 것이다. 넉 달 뒤 조극선이 다시 가야사에 가보니 거기에는 하늘 높이 ‘東宮願堂(동궁원당)’이라는 금표(禁標)가 걸려 있었다.(조극선, 앞 책 1621년 2월 30일)
그때 동궁은 바로 광해군 세자 이지였다. 그러니까 2년 뒤 세자 자리에서 쫓겨난 그 원찰의 주인, 세자 이지가 ‘가야산’을 목적지로 정하고 탈출극을 벌인 것이다.
인조반정과 몰락한 가야사
‘본궁(本宮)의 원당이랍시고 양반을 능멸하던’(조극선, 앞 책 1621년 11월 24일) 기세등등한 가야사였다. 그 절이 인조반정 7개월 뒤인 1623년 10월 17일 ‘절집은 텅 비고 승려들은 모두 숨어버리는’ 완전히 몰락한 절로 변해버렸다. 가야사를 들볶아서 종이를 공급받던 양반들은 임박한 과거시험에 쓸 종이를 마련하지 못해 달아난 승려를 잡으러 돌아다닐 정도로 대혼란에 빠졌다. (조극선, 앞 책 1623년 윤10월 6일) 종이 만드는 ‘지역(紙役)’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만, 쿠데타로 왕이 바뀌고 옛 왕 아들이 자살 ‘당한’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이후 가야사는 몰락했다. 1700년대 문인들이 쓴 가야산 답사기에는 ‘가야사’ 대신 ‘묘암사(妙巖寺)’라는 절이 나온다. “옛날에 묘암사는 가야사에 속했다. 가야사가 훼손된 이후 그 이름을 사칭 중이다. 불당 뒤 언덕에 층계가 77계단이 있고, 그 위에 석탑 하나가 우뚝 솟았다. 지세가 쥐 달아나는 형국이라 언덕에 탑을 세워 쥐를 눌렀다고 한다.”(이철환 ‘상산삼매·象山三昧’, 1753)
흥선대원군의 야심과 석탑
100년 뒤 바로 그 가야산 절집에 흥선대원군이 선친인 남연군 상여를 들고 나타나 절을 부수고 선친 묘를 이장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가문 부흥을 염원하던 흥선군 이하응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고 귀띔했다. 이에 대원군이 전 재산을 털어 가야사 주지를 2만 냥으로 매수한 뒤 가야사를 불 질러버리고 석탑을 도끼로 부순 다음 그 자리에 묘를 옮겼다. 형제들이 악몽을 꾸고서 석탑 부수기를 주저하자, 이하응이 직접 도끼로 내려쳐 탑을 없앴다. 그리하여 13년 뒤 아들 명복과 손자 척이 왕이 되었다, 운운.”
지금도 풍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예산 남연군묘 역사는 그러하였다. ‘하늘을 찌르던 외로운 탑’(孤塔撑天·고탑탱천: 송인(宋寅·1517~1584))은 ‘백 척 누대 위에 깨진 채 서 있다가’(百尺危臺破塔留·백척위대파탑류: 임방(1640~1724) ‘수촌집’) 권력을 염원한 중년 사내 손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남연군 묘에서 남쪽 개울가 숲을 ‘남전(南殿)’이라 부르는데, 예산 토박이인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장 이기웅에 따르면 연전에 땅속에서 ‘폭삭 주저앉은 서까래와 기와가 나왔다’.
자, 그러니 대원군이 부순 절은 가야사가 아니라 묘암사다. 그리고 석탑 또한 전설 속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탑이다. 하나 더 있다. 대개 남연군묘에 대해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한 해를 ‘고종이 왕이 되기 13년 전’인 185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남연군묘 입구에 있는 비석에는 역사적 진실이 기록돼 있다.
‘처음 마전 백자동에 장사 지냈다가 바로 연천 남송정에 이장하고 을사년에 덕산 가야산 북쪽 기슭에 이장했다가 병오 3월 18일 드디어 중록 건좌한 언덕에 면례하였다’. 이미 대원군은 연천에서 선친을 한 차례 이장한 뒤 을사년(1845년) 가야산 북쪽에 이장하고 이듬해에 지금 자리에 묘를 썼다는 뜻이다.
을사년에 첫 이장한 자리를 주민들은 ‘구광터[舊壙址·구광지]’라 부른다. 옛 무덤 자리라는 뜻이다. 남연군 묘에서 400미터 북동쪽 산기슭 밭이다. 이기웅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구광터라 불렀다”고 했다.
왜 처음부터 석탑 자리에 옮기지 않았을까. 이기웅이 말했다. “묘암사와 주변 주민들과 땅 문제를 협상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절을 불태웠고.” ‘만세 권력을 누린다는 지관 말에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급히 가야사라는 대찰(大刹)을 방화하고 주민을 내쫓았다’는 대중매체와 공식 안내문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미륵불과 세한도
18세기까지 석탑은 ‘층마다 작은 부처가 있었고 돌 틈에 쇳물을 부어 비바람이 불어도 무너지지 않았다’.(‘가야산기’, 이의숙(1733~1805), ‘이재집’ 권4) 탑 자리에 지금 큰 무덤 하나가 앉아 있다. 풍수를 논하지 않아도, 남연군묘 풍경은 압도적이다. 땅에서 보면 아늑하고 하늘에서 보면 웅장하다. 산줄기가 끝나는 언덕에 나무를 다 베고 묘를 썼으니, 언덕 전체가 왕릉처럼 보인다.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 마을 옛길에 미륵불이 서 있다. 숲으로 들어가는 서쪽 방향을 보고 있다. 남연군묘에 대한 전설에는 “절을 불태우던 날, 탑을 바라보고 있던 돌부처가 돌아섰다”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그 숲속에 웅거할지도 모를 산적과 산짐승에게서 행인을 지키려는 비보(裨補) 석불로 봐야 한다. 전설과 신화와 사실(史實)과 동화가 섞여서 사람들을 유혹하지만, 언제나 사실은 전설을 앞서는 법이다.
예산 마을 사람들 집에는 ‘李山(이산)’이라 새겨진 표석이 눈에 띈다. “우리 아버지가 이장을 했는데, 땅문서에 소유주가 ‘이왕직(李王職)’인 땅이 그렇게 많았다. 나는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이기웅) 이왕직은 식민시대 전주 이씨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법인이다. 망해버린 옛 왕실 땅이 예산에 그리 많았다는 뜻이다. 이기웅은 그 ‘이산’ 표석이 이왕직 재산을 알리는 안내석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끝이 아니다. ‘근래 이하응이 덕산현에 묏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고려 옛 탑에서 용단승설(龍團勝雪) 4덩이를 얻었다. 내가 하나를 얻어 간직하였다.’(이상적, ‘기용단승설’, 은송당집 속집, 정민, ‘한국의 다서’, 김영사, 2020, 재인용) 용단승설은 송나라 때 명차(名茶)다. 700년 전 명차가 이 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로 연결된다.<다음 주 계속>
* 이 기사에 나온 사료는 가야산역사문화연구소 도움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