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비드-19는 14세기의 흑사병, 16세기의 천연두, 20세기의 스페인독감과 같은 역사적인 팬데믹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병이 어느 날 홀연 사라지고 과거 좋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함께 살아갈 공산이 크다. 역사적으로 이 비슷한 현상을 찾는다면 콜레라가 있다.
코로나와 비슷한 현상은 19세기 콜레라
콜레라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817년 인도의 캘커타(2000년부터 ‘콜카타’로 개명했다)에서 처음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도시는 수많은 사람이 밀집하여 살아가는 더러운 환경에다 상인⋅행정가⋅군인⋅순례자 등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곳이며 중요 도로와 철도, 항로의 기착점이다. 한마디로 전염병이 발발하여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는 데 이상적인 곳이었다.
콜레라의 원인균은 비브리오 콜레라(Vibrio Cholerae)라는 쉼표(,) 모양의 균으로 진동하는 모습에서 그 이름(vibrio)을 얻었다. 이 균이 인체에 들어오면 6시간에서 5일의 잠복기를 거쳐 소장에서 콜레라 독소를 증식한다. 이때 극심한 설사와 구토⋅발열⋅복통이 일어난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대부분 설사로 인한 탈수가 심해 신체의 수분량이 치명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토와 설사를 통해 환자의 체외로 나온 엄청난 양의 세균은 수원으로 들어가서 그 물을 마시는 다른 사람들에게 병을 옮긴다. 19세기의 콜레라는 병세가 어찌나 심한지 아침에 멀쩡했던 사람이 해 질 녘에 죽을 수도 있었다. 탈수가 워낙 심하여 모세혈관 파열로 얼굴빛이 검푸르게 변하고 심하면 몸이 쪼그라든 채 죽었다고 한다. 당시 이 병의 사망률은 적게는 20%에서 많게는 50%에 달했다. 원인도 모르고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사람들이 콜레라에 대해 얼마나 큰 공포에 휩싸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순조 21년 평안도 지방에도 유입
콜레라의 제1차 대유행은 1817~1824년에 일어났는데, 주로 동아시아로 퍼져갔다. 인도를 떠난 선박들이 믈라카해협을 거쳐 중국 동부 연안에 도착하며 병균을 옮겼고, 곧 베이징과 중국 동북부 지방을 거쳐 1821년(순조 21년) 가을에 우리나라 평안도 지방으로 유입되었다. 신사년(辛巳年) 괴질로 알려진 이 병에 관해 평안도에서 올린 계장(啓狀)은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평양부 성 안팎에서 지난 그믐간에 문득 괴질이 돌아 사람들이 설사 구토하고 근육이 비틀리면서 순식간에 죽어버렸습니다. 열흘 안에 1000여 명이 죽었으나 치료할 약과 방법이 없습니다. … 이 병에 걸린 자는 열 명 중 한둘을 빼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평안도에서 시작해 여러 읍에 전염되는 속도가 마치 불이 번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정약용 또한 이런 기록을 남겼다. “10일 이내에 평양에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요, 서울 성중의 오부에서 죽은 자가 13만 명이었다. 그 증상은 혹 교장사(攪腸痧) 같기도 하고 전근곽란(轉筋癨亂) 같기도 한데 그 치료법은 알 수 없었다.”(신동원,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중에서) ‘교장사(내장이 뒤틀리듯 아픈 병)’처럼 증상이 비슷한 다른 병명을 거론하는 걸 보면 원인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1830년 이후 제2차 대유행 때에는 콜레라가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와 독일로 전파되는 한편 선박을 타고 영국에 들어갔다. 런던에서는 한 달 만에 2600명이 사망했고, 다음에 다시 발발했을 때에는 한 달에 1만1000명이나 사망했다. 이후 이 병은 아일랜드를 거쳐 아메리카로 떠나는 이민선을 타고 미국과 캐나다로 들어갔고, 운하망을 따라 여러 공업 도시를 덮친 다음 뉴욕을 강타하고 멕시코까지 들어갔다. 이슬람권에서는 메카로 순례를 간 사람들이 이 병을 고향으로 실어 날랐다. 이제는 그야말로 전 세계가 콜레라로 고통을 겪었다.
200년 걸린 인류와 콜레라균의 ‘화해’
병이 이처럼 퍼진 원인 중 하나는 당시 도시 환경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런던만 하더라도 시내에 돼지와 닭을 치는 집이 많아서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를 메웠다. 이때까지도 곳곳에 인분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를 운반하여 거름으로 팔았다. 점차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자 이번에는 오물을 그대로 템스강으로 흘려보내서 오히려 상황이 악화했다. 온갖 오물을 템스강에 버린 다음 시민들이 다시 그 물을 먹고 있었으니, 수인성 전염병이 폭발적으로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드디어 체계적인 대응 조치들이 마련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는 대도시 사업 위원회(Metropolitan Board of Works)가 중심이 되어 도시 위생 시설과 상수도 체계를 건설해 나갔다. 더 중요한 것은 정교한 지하 하수도망의 건설이다. 런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하수관을 빼서 오수를 하류로 보냈다. 새로운 하수 처리 시설의 효과는 극적이었다. 다음 번 콜레라가 다시 유행했을 때 런던에서 피해를 본 유일한 집단은 새로운 하수도망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지역 사람들이었다. 미국이나 일본 같은 국가들이 런던의 사례를 배워 근대적 위생 시설들을 마련해 갔다.
과학과 의학 분야에서 마침내 콜레라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860~1870년대 파스퇴르와 코흐에 의해 세균을 통해 병이 발생한다는 세균 이론이 정립되었다. 1883년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나서 상수원의 염소 소독이 이루어졌고, 1893년에 드디어 콜레라 백신이 개발되어 예방접종이 일반화하였다. 코흐는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05년 노벨상을 받았다. 그렇다고 콜레라가 당장 정복되지는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콜레라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창궐하며 가공할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인류는 예전처럼 눈 뜨고 당하지는 않고 나름대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 갔다. 콜레라균으로서도 숙주를 너무 많이 죽이면 자신도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적당한 정도로 사람들에게 병을 일으키면서 자신도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해 갔다. 오늘날 콜레라의 병세는 19세기보다는 훨씬 완화되었다. 인류와 콜레라균이 이런 식으로 ‘화해’하는 데 거의 200년이 걸린 셈이다.
사회 내부 갈등 폭발시킨 19세기 콜레라
“전염병은 갠지스강 삼각주의 따뜻한 습지에서 생겨났다. 사람들이 피하고, 대나무 숲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황량한 섬의 울창하고 쓸모없는 원시림에서 전염병이 악마 같은 숨결과 함께 발생해 맹위를 떨쳤다. … 병에 걸린 육체는 혈관에서 다량으로 분비되는 수분을 전혀 배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몇 시간 만에 바짝 말라 버린 환자는 역청처럼 끈적끈적해진 피 때문에 경련을 일으키고 목이 잠겨 한탄하며 질식해 죽게 된다.” (토마스 만,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중에서)
토마스 만의 소설에서 고대 그리스적인 우미(優美)를 완전히 무화하는 끔찍한 죽음의 공포는 아시아에서 들어온 콜레라다. 빛나는 ‘유럽’ 문명이 ‘아시아’에서 들어온 암흑의 질병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설파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유럽 중심주의를 노출한다.
콜레라는 사회 내부 갈등을 분출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단정했던 상층 부르주아가 어느 날 자신의 토사물과 배설물 속에서 뒹굴며 비참하게 죽는 모습은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부르주아는 주로 하층민 구역에서 콜레라가 터져 나오는 현상에 주목했다. 더럽고 축축한 기운이 병을 일으킨다는 전통적 장기(瘴氣) 이론은 노동자와 하층민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이 독기를 만들어낸다는 기이한 논리로 변형되었다. 이에 대해 하층민은 그들의 방식으로 대응하여, 귀족과 의사들이 일부러 병을 퍼뜨린다고 주장했다. 런던에서는 의사들이 해부용 사체를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병을 퍼뜨려 환자를 죽였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러시아⋅프랑스⋅독일⋅영국⋅이탈리아⋅일본 등지에서 ‘콜레라 폭동’이 일어나 ‘독을 퍼뜨린’ 의사와 귀족⋅장교 등을 살해했다.
질병은 사회에 내재해 있던 편견⋅갈등⋅증오를 분출한다. 그런 것들을 잘 무마하고 통합에 힘쓰는 대신, 오히려 분노와 증오를 조장하여 정치적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은 까마득한 원시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