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조선일보 이규태 기자가 ‘한국인의 의식 구조’를 펴내며 부제로 제시했던 질문은 “한국인은 누구인가?”였다. 1965년 한일 외교 정상화 이후 국운을 걸고 추진했던 산업화가 한국 사회 성격을 바꿔내던 참이었으니 시의 적절한 질문과 진단이었다.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85년 ‘광복 40주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시공을 통해, 산업화 시대 신(新)한국인들은 ‘민족 문화 재발견’이라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 바람은 1984~1985년 ‘한국 근현대사 다시 보기’로 이어졌고, 강만길 교수가 쓴 ‘한국근대사’ ‘한국현대사’가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집단적 멘털리티가 그 시기 주조됐다.
한국 사회 신주류로 보수화하고 있는 386세대의 원형은 ‘긴급조치 세대’로 불렸던 주요 대학 77~78학번들이다. 1970년대 대학 캠퍼스는 장발과 나팔바지로 멋을 부리는 유사 히피 문화가 지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77~78학번들은 ‘한국인은 어떤 모습이 돼야 옳은가’라는 질문을 어깨에 이고 진 채 민족민중 문화운동을 개시했다. 1973년 김지하와 임진택의 마당극 ‘진오귀굿’이 나왔고, 1977년 류인렬은 ‘민중 문화운동으로서의 연극’을 논했다. 생활 한복을 입고 사회 비판적 민요를 부르고, 꽹과리와 장구를 치며 마당극을 펼치는 신민족주의자 청년의 정체성과 행동 양식이 제시되면서 미 청년 문화를 어설프게 흉내 내던 유사 히피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77~78학번들은 대략 1958~1960년생들로, 소위 ‘박정희 키드’ 1세대다. 국민학교 3~5학년 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산업화 시대용 표준 국민의 거푸집’에 맞춰 양산된 첫 결과물들이었다.
새로운 민중적 민족 전통 재발견·재해석 흐름의 태동에 영향을 미친 조건으로는 네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한국 미술을 사실상 처음 세계에 알린 국제 순회전 ‘한국 미술 5000년’(1976~1979)을 통한 자존심 회복, 다음은 한일 교류를 통해 조선 민예품 등에서 민중적 미덕을 발견해 새로운 미술 공예 운동을 추진하고자 했던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론의 재발견, 셋째로 박정희 정권의 농촌 공동체 현대화 사업에 맞물렸던 생활 유물 수집 열풍, 넷째는 4·19 세대에 속하는 출판 언론인 한창기가 창간했던 한글 전용 가로쓰기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1976~1980)를 통한 중산층용 비판적 세계관의 유포다.
1960년대 후반 이래 산업화와 새마을운동으로 향촌 공동체가 파괴되는 과정에서, ‘민속 골동품’이 어마어마하게 서울로 유입됐다. 그 골동품은 황학동 벼룩시장을 형성한 토대였다. 인사동과는 결이 달랐다. 특히 박정희 사후~전두환 집권 초기엔 중국 ‘망류(무작정 도시로 유입되는 사람)’처럼 일거리를 찾아 무작정 상경하는 농촌 청년들이 크게 늘었고, 이들이 들고온 생활 유물이 시장에 깔리면서 골동품 공급이 폭증했다. 한창기 세대 골동 수집가들은 앞선 세대와 달리 귀족적 서화고물(書畫古物)을 수집하는 데 치중하지 않고, 투박하고 지역색이 강한 생활 유물을 수집하며, 새로운 정신의 근거로 삼았다. 물론 약점은 있었다. 산업화된 신한국의 비판적 시민 주체를 전제로 농경 시대 한국의 과거를 타자화하고 전유하고 재고찰했다. ‘우리 것’이라고 호명할 수 있다는 점을 빼면 록펠러 집안이 아프리카 토템 조각을 수집한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큰 변화를 겪을 때마다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조금씩 다르게 던지고 조금씩 다르게 답했다.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 회장은 신경영 선언을 하며 변화를 주문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전지구화 시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대두 앞에서 “세계인의 안목으로 미래를 건설하자”고 강조했다. 외환 위기 충격 이후 뉴밀레니엄을 앞둔 시점이었던 1999년 12월, 호암미술관은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전을 열어 “한국인은 누구인가”를 다시 물었지만 한국인의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전시로 그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1세기 한국인의 정체성은 ‘박정희 키드’들이 앞세운 신민족주의자 원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그들의 자녀 세대에게 더 맹목적인 양태로 대물림됐다.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역사적 동태로 파악하는 방식을 창출·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거푸집을 깨고 다시 설계해야 하는데, 경각심을 느끼는 이가 많지 않다. “20년 뒤 한국 사회를 이끌 주역은 이민자 2세 등 비한국계 한국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 반감부터 드러내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 배타적 세계관을 창출하는 정태적 정체성으론 퇴행을 피할 수 없다. ‘박정희 키드’들의 낡은 정체성과 세계관을 해체하고 정의할 때, 비로소 살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