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이사하면서 일부 인테리어를 손봤는데, 디자이너인 아내가 말했다. “분명 더 괜찮은 손잡이가 있을 텐데, 나중에 그걸로 새로 달자.” 시간은 맞벌이 부부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손잡이를 신경 쓸 새도 없이 반년이 지났다. 그동안 적지 않은 손님들이 집에 놀러 왔고, 우리는 늘 양해를 구해야 했다. ‘연희동 편집자의 강릉 한달살기’에서 손님 중 하나인 아뉴 작가는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S의 집은 아늑했다. (…) 다만 화장실 문 손잡이를 교체한다며 빼놓은 탓에 뻥 뚫린 구멍으로 이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며 숨죽여 오줌을 눠야 했다는 것만 빼고….” 화장실까지 극단의 투명성을 추구할 필요는 없으니 요즘은 임시방편으로 종이컵을 구멍에 끼웠다.
“집이 무슨 쇼룸이야?” 신혼집 때 아내와 다투면서 이런 질문을 던진 적도 있다. 집들이를 준비할 때마다 아내는 예민해졌다. 거실이나 화장실에 있는 생활용품 중 예쁘지 않으면 몽땅 서랍에 넣는 바람에, 나중에 물건들을 찾느라 헤매기도 했다. 참고로 나는 건축을, 아내는 미술을 전공했다. 건축과 미술이 추구하는 미감은 다르다. 건축은 모든 선택에서 논리와 체계를 찾고 때때로 숫자 계산을 요구한다. 제한된 예산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공간을 구성해야 한다. 미술에서 가성비는 중요하지 않다. 논리보다 미학적 판단이 앞선다. 물론 판단은 아내가 한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놀라울 정도로 다툼이 줄었고, 아내의 판단 아래 우리 집에서 ‘쇼룸’은 금기어가 됐다.
미술을 전공한 디자이너에게 집의 스타일링을 전적으로 맡긴 덕분에 집 분위기는 더 따뜻하고 화사해졌다. 인정하건대, 나에게 이 정도 미감은 없다. 둘 다 결혼과 동시에 첫 독립인데, 신혼집은 부부의 새로운 출발과 삶을 대하는 방식을 알리는 데 효과적이었다. 어쩌다 보니 마흔 번 넘게 집들이를 했고, 결혼 1주년 때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는 중고 물품을 파는 장터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두 번째 집은 엄연히 둘만의 공간이지만 타인에게도 열려 있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가는 곳이 되었다. 공간을 내어주고, 새로운 이웃을 얻은 셈이다.
집은 쇼룸이 맞는다. 20여 년 전 전몽각 작가가 사진집 ‘윤미네 집’을 냈다면, 나와 내 친구들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를 만들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공유한다. #하우숭, #융지트, #무과수의집, #찬빈네집, #terrace402 등은 집 자체가 ‘나’의 또 다른 브랜드가 된 좋은 사례다. 다만, ‘쇼’의 대상과 주체가 손님이 아니라, 나와 가족, 친구를 중심으로 한 자발적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가구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하는 현실 속에서도 주거 유형이야 어떻든 나답게 사는 법을 익히고자 하는 움직임이다.
집의 위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과거의 집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장소’였는데, 오늘의 집은 부동산, 일터, 학교, 이제는 나를 드러내야 하는 ‘수단’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집의 본질을 물어야 한다. 정기용 건축가는 “우리 삶에는 유년 시절 보냈던 기억의 집, 현재 살고 있는 집, 살아보고 싶은 꿈속의 집이 있다. 이 세 가지가 하나 된 집에 사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는 지금 사는 집의 문에 손잡이만 달면 당분간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아내에게 묻는다. “우리 이번 주말에는 손잡이 보러 을지로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