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낭비” 관찰사 서유구
올해 복원된 전라감영 동헌 앞에는 낯선 돌이 두 개 서 있다. 하나는 가석(嘉石)이고 하나는 폐석(肺石)이다. 가석은 경범죄를 저지른 자를 그 위에 앉혀서 죄를 뉘우치게 하는 돌이다. 폐석은 억울한 백성이 그 옆에 서 있으면 관리들이 자초지종을 물어 사연을 풀어주는 돌이다. 행정과 사법을 동시에 담당했던 조선시대 지방관 통치 율법을 상징한다.
19세기 초 이 전라감영에서 만 19개월 근무했던 행정가가 있다. 1833년 4월 부임했을 때 나이는 만 69세, 고희(古稀)였다. 이 늙은 관찰사는 임기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이름하여 ‘완영일록(完營日錄)’이다. 그가 결재한 모든 공문서가 첨부돼 있고, 사건과 사고, 민간 풍습과 가뭄 때 고구마를 들여와 시범 재배를 한 사실까지 다 기록돼 있다. 이 사내는 또 한자로 250만 자가 넘는 백과사전을 혼자 지었다. 그 속에는 화훼와 음악, 회화와 건축, 기상과 천문과 의학과 문화예술과 가정경제까지 다 들어 있다. 책 이름은 ‘임원경제지’다.
이만하면 웬만한 업은 다 성취했을 법한데, 그가 스스로 남긴 묘지명에는 이리 적혀 있다. ‘내 인생은 낭비투성이였다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더 남겼다. ‘흙으로 만든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은 만들지 않겠다네.’
자, 이 사내 이름은 서유구(徐有榘)다. ‘榘(구)’는 모날 구자다. 직선과 네모를 뜻한다. 친구들끼리 부르는 이름 자(字)는 ‘준평(準平)’, 목수들이 쓰는 수평계 이름이다.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 선비 치고는 작법이 범상치 않다. 민란(民亂)이 급증하던 19세기 초 흙국과 종이떡을 거부하고 낭비투성이 삶을 살았다는 서유구 이야기.
[240] 실용주의 관리 서유구가 난세에 대처한 자세①
과거 부정과 왕세손 이산
정조가 왕위에 오른 과정은 복잡했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찌감치 떠나보낸 영조는 둘째아들 선(愃)을 세자로 삼았다. 사도세자다. 1751년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 맏아들 정(琔)을 왕세손으로 삼았다. 이듬해 만2세 된 정이 요절했다. 사도세자 둘째아들 산(祘)이 세손으로 책봉됐다. 1762년 윤5월 21일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764년 영조는 사도세자 아들 산을 요절한 큰아버지 효장세자 양자로 입적시켰다. 사도세자는 세자위를 박탈당했지만 산은 왕세손 자리를 유지했다. 11년 세월이 흘러 1775년 11월 30일 영조는 왕세손을 왕좌에 앉히고 본인은 대리청정하는 위치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조정 대신들은 물론 왕세손까지 극구 반대했으나 영조는 ‘결재 거부’ ‘단식투쟁’을 내걸고 관철했다. 대리청정을 못하게 하면 아예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우기기도 했다.(1751년 5월 13일, 1775년 11월 30일, 12월 7일, 12월 8일 ‘영조실록’)
사흘 뒤 대리청정 축하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를 고르고 나니 최수원, 조영의, 조우규 세 응시자 답안지가 똑같았다. 과거 문제지는 물론 모범 답안지까지 유출된 것이다. 왕좌에 앉은 왕세손은 이들 합격을 취소시켰다. 그가 조선 22대 국왕 정조다. 왕이 됐어도 과거장 꼬라지는 변함없었다. 청탁과 남의 글을 베끼는 차술(借述)과, 책을 들고 들어가는 협책(挾冊) 행위가 곳곳에서 적발됐다. 처음에 “일단은 참겠다”며 넘어갔던 정조는 나중에는 “‘부정행위 처벌' 명령을 궐문에 걸라”고 분기탱천하기도 했다.(1782년 1월 10일, 1794년 1월 6일 ‘정조실록’)
친위대 초계문신과 서유구
과거가 난장판이니 또 다른 인재 충원 루트가 필요했다. 그게 초계문신(抄啓文臣·인재를 골라서 왕에게 아뢰어 등용한 문신)이다. 즉위 후 6개월 뒤 정조는 창덕궁에 왕립도서관 규장각을 세웠다. 규장각 간부인 각신(閣臣) 6명은 공무 중 면책특권을 비롯한 많은 특권을 누렸다. 한성 안팎으로 말을 타고 다니는 ‘어마어마한’ 특권도 있었다.(1776년 9월 25일 ‘정조실록’) 그리고 5년 뒤 37세 이하 과거 합격생 가운데 초계문신을 뽑았다. 정조는 이들을 규장각에 근무시키고 직접 가르쳤다. 왕이 관료를 직접 양성한 것이다. 1781년 16명을 비롯해 정조가 죽은 1800년까지 초계문신은 모두 139명이 선발됐다. 1789년 15명에는 정약용이, 1790년 19명에는 문제적 인물 서유구가 들어 있었다.
교육은 혹독해서 초계문신들은 ‘동몽(童蒙·어린아이)같이 맞으며 생도(生徒·학생)같이 단속 당했다.’(정약용, 경세유표 권1 춘관예조 3) 활쏘기 또한 교양 필수였는데, 정약용도 못 쏘았고 서유구도 못 쏘았다. 서유구는 특히나 젬병이었다. 1791년 10월 2일 초계문신들이 활쏘기 훈련을 받았는데 대부분 활을 쏘지 못했다. 실망한 정조는 시험을 중단시키고 병영에서 훈련을 명했다. 많은 이가 재시험을 통과했으나 서유구는 ‘구제불능 최하급이라(下愚不移·하우불이) 깎아내지 못할 썩은 나무 같았다(朽木不可雕也·후목불가조야).’ 고문관 서유구는 또 숙직을 하며 훈련을 해야 했다.(1791년 10월 27일 ‘승정원일기')
그런데 공부는 뛰어났다. 1789년과 1790년 초계문신을 대상으로 한 시경 강의 후 정조가 출제한 시험 문제 590개 가운데 후배 서유구는 181개, 선배 정약용 답안은 117개가 채택됐다.(정명현 등 ‘임원경제지, 조선 최대의 실용백과사전’,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12, p149 이하)
똑같이 전도유망한 초계문신 선후배 정약용과 서유구는 이후 인생도 많이 닮았다. 활쏘기를 잘 못한 것도 닮았고(정약용은 아예 자기 문집 ‘다산시문집’에 ‘북영벌사기(北營罰射記·벌 받은 활쏘기 훈련기)’를 남길 정도였다), 학문에 뛰어난 것도 닮았다. 그런데 우리는 실학, 하면 다산을 떠올리고 서유구는 잘 모른다. 이 사연은 뒤에 얘기하기로 하자.
5020권짜리 백과사전 ‘고금도서집성’
정조가 즉위한 1776년 겨울 청나라로 떠난 연행사 일행이 만 석 달 만에 돌아왔다. 1777년 2월 24일 창덕궁에 입궐한 일행은 이렇게 보고했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5020권이 지금 막 실려 오고 있나이다.”(1777년 2월 24일 ‘정조실록’) 고금도서집성은 청나라 최대이자 지금도 최대인 중국 백과사전이다. 가격은 은화 2150냥이었다.
선대인 영조 시대는 학문의 암흑기였다. 전주 이씨 왕실 계보를 왜곡한 청나라 책이 수입되자 영조는 일체의 중국 서적 수입을 금지하고 책 판매상인 책쾌(冊儈)도 한동안 금지했다.(2019년 7월 10일 자 본지 ‘땅의 역사 172: 서점 없는 나라 조선과 책쾌들의 대학살’ 참조) 정조가 즉위하고, 학문을 통해 왕권 강화를 꿈꿨던 정조는 청나라 학술 서적 수입을 직접 명했다.
도서집성 상자를 열어보니 종이가 저급한지라 죄다 뜯어내고 제본을 다시 했더니 두 권 늘어난 5022권이 되었다. 그 책마다 제목 ‘도서집성’ 네 자를 모두 지사(知事) 조윤형이 썼다. 함께 근무하던 이덕무가 “최소한 도서집성 네 자는 왕희지보다 낫다”고 놀릴 정도였다.(노대환, ’18세기 동아시아의 백과전서 고금도서집성', 2015)
정조가 원했던 책은 당시 현존하는 모든 명저를 모은 총서 ‘사고전서(四庫全書)’였는데 아직 미완성 상태였다. 그래서 연행사 부사 서호수가 청 학계를 잘 아는 유금을 통해 고금도서집성을 대신 구입했다.(김윤조, ’18세기 후반 한중 문인 교유와 이조원', 한국학논집 51집, 계명대한국학연구원, 2013)
핏줄에 흐르는 실용주의
그 서호수의 아들이 서유구다. 서호수는 규장각 각신이었고 동생이자 서유구 삼촌 서형수는 초계문신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서명응은 1776년 규장각이 설립되고 첫 제학(提學)이었다. 서명응은 농서 ‘본사(本史)’를 손자와 함께 지었는데, 그는 손자에게 이리 말했다. “자고로 어렵고 난삽한 말을 써서 읽는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린 듯이 한다면 후세에 글 못 읽는 사람들이 이 책을 장독 뚜껑으로 쓰게 될까 두렵다.” 서유구는 기쁘게 깨닫고 책을 완성했다.(서유구, ‘풍석고협집’ 6 잡저 ‘발본사·跋本史’)
난해하기 짝이 없어서 독자로 하여금 두 번 세 번 읽게 해야 명문(名文) 취급 받던 시대에, 이 서씨 3대는 그렇게도 실용적이었다. 서유구는 중국 고대 실용지식을 담은 ‘주례 고공기’를 삼촌으로부터 배우다가 “대장부 문장은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고 책상을 치며 소리지르는 아이였다.(서유구, 앞 책 ‘서형수 서문’)
모날 구 자를 아들 이름에 넣은 사람이 서호수였고, 그 두 사람에게 실용주의적 시각을 내려준 사람은 고증학의 대가인 할아버지 서명응이었다. 피는 쉽게 속이지 못한다.
민란, 흙국과 종이떡
자, 세월은 바야흐로 민란의 시대로 흐르고 있었다. 국왕을 보필하며 학문과 정치를 찬란하게 빛낼 임무를 띤 초계문신 출신들은 그 민란의 시대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표적인 초계문신 김조순은 정조 본인이 순조의 장인으로 낙점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했던 김상헌의 후손 김조순은 이후 60년 넘도록 이어진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국가를 자기 재산 내지는 금고로 생각했던 세도가들은 금고를 털어내듯 가렴주구와 학정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나라는 빈털터리였다. 예정대로 민란(民亂)이 폭발했다.
1800년 정조가 죽었다. 기둥이 쓰러진 초계문신 출신 관료들은 방황했다. 1801년 천주교를 믿는다는 빌미로 정약용은 18년 동안 유배당했다. 서유구는 삼촌 서형수가 동기 김달순의 역모 사건에 연루돼 정계에서 축출당하자 스스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1806년이었다. 그가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산 세월이 또한 18년이었다.
정약용도, 서유구도 그 민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었다. 정약용은 곧 조정에 복귀해 세상을 바꾸겠노라며 1표2서(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지었다. 서유구는 달랐다. 민란에 대한 답은 굶주림에 있었다. 막강 세도정치를 허물어뜨리고 세상을 바꾸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그 18년 세월을 농사짓고 땔감을 주워 등을 덥히며 백성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한때 경서를 공부했으나 옛 사람들이 이미 모두 말해버렸으니, 내가 거기다 두 번 말한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또 경세학을 공부했으나 처사들이 이리저리 한 말은 못 먹는 흙국이고 종이떡(土羹紙餠·토갱지병)’이었다. 그런 노력이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서유구, ‘행포지서·杏蒲志序’, 1825)
좋은 말과 아름다운 이론이 난무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자기는 먹을 수 있는 국과 떡, 실용적 학문으로 백성을 배부르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그 떡과 국 맛을 보기로 하자.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