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세상을 만들고 세상은 사람을 만든다. 사람이 만들었으되 세상은 사람 마음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1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러하다.
절충장군 김백선의 변신
김백선은 경기도 지평(砥平·현 양평 소속)에 사는 사내였다. 1894년 동학전쟁이 터졌을 때, 김백선은 지평 유림 맹영재를 도와 동학을 소탕한 공으로 정3품 절충장군 봉작을 받았다.(1894년 음력 11월 7일 ‘승정원일기’) 이듬해 8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되고 11월 갑오정부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자 김백선은 의병장으로 변신했다. ‘을미의병’이라 불리는 이 의병들은 유림이 주도했다. 김백선 부대를 이끌고 동학을 토벌한 공으로 지평현감이 됐던 맹영재는 단발령을 주민에게 강제하다가 의병 부대에 처형됐다.(황현, ‘매천야록’ 2권 1896년① 9.‘의병에게 살해된 관리들’, 국사편찬위) 동학을 토벌한 절충장군 김백선, 의병장 김백선은 포수였다. 평민이었다. 유림이 아니었다. 많은 일이 이 신분으로 말미암아 벌어졌다.
243. 포수 의병장 김백선의 허무한 죽음
대의(大義)를 위한 을미의병(1895년)
구한말 의병은 크게 두 차례 일어났다. 하나는 1895년 왕비 민씨 살해 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벌어진 을미의병이고 다른 하나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정미의병이다. 두 의병은 성격이 다르다.
1895년 한 나라 왕비가 외세에 살해됐다. ‘상투’로 상징되는 구체제 붕괴 조짐이 겹치며 조선 지배층인 유림은 거국적인 의병을 창의했다. 그래서 타도 대상은 외세인 일본과 구체제 붕괴를 노리는 개화파였다. 그래서 이 의병 진압 부대들은 일본군과 개혁을 지지하는 조선 정부 관군이었다. 그 한가운데에 신분은 평민이요 세계관은 구체제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길 실천력과 무력이 있는 포수 김백선이 있었다.
의병장 류인석의 사상
을미의병은 ‘백면서생과 쑥대머리 농민들이 경서와 쟁기를 던지고 두 주먹으로 일어난’ 사람들이었다.(곽종석, ‘포고천하문’, 이정규, ‘창의견문록’(독립운동사자료집1)) 말 그대로 유림이 주도하고 평민이 참가한 의병이라는 뜻이다.
춘천에 살던 유림 류인석은 대표적인 위정척사파 선비였다. 화서학파라 불리는 이항로, 김평묵, 최익현 등과 함께 류인석은 개화는 매국이라 반대하며 단발령과 함께 의병을 창의했다. 유인석이 내건 구호와 비전은 이러했다. “서양이 주장하는 평등과 자유라는 말은 어지러운 싸움을 부르는 칼자루와 같다. 평등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럽다. 자유가 있으면 다투게 된다.”(류인석, ‘우주문답’(1913), 종로서적, 1984, p36~38) “여학교(女學校)를 주장하는 자는 천지를 본받지 않아 금수 같은 사람이다.”(앞 책, p51) “옛 법이 나라를 망친다고 하는데, 나라가 망하는 것은 개화된 후에 일어나는 일이다. 옛 법으로 망한다고 해도 개화로 더럽게 망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앞 책, p96) 1896년 2월 7일 류인석은 ‘복수보형(復讐保形·왕비 민씨의 원수를 보복하고 옛 의리를 지킴)’을 기치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병부대에 지평 포수 김백선이 수하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의병장 김백선의 죽음
김백선은 함께 동학을 토벌한 지평현감 맹영재에게 거병을 제안했다 거절당하자 그에게 넘겼던 부하 포수 400명을 이끌고 류인석 부대로 들어갔다. 김백선은 선봉장에 임명돼 충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선봉 부대인 김백선 부대는 문경새재를 점령한 뒤 충주성을 함락하고 충주관찰사 김규식을 처형했다. 그런데 일본군이 반격해오자 김백선은 급히 본진 참모장급인 중군 안승우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안승우는 거부했다. 3월 27일 살아 돌아온 김백선은 곧바로 칼을 들고 안승우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김백선은 총사령관 류인석의 군령에 전격 처형됐다. 죄명은 군기 문란이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기록은 조금 차이가 난다. 류인석 참모 이정규가 쓴 ‘종의록’은 이렇다. ‘성질이 거칠고 버릇이 미치광이 같았다. 포군을 모두 빼내 선비들을 죽이려 하니 (류인석) 선생이 기율 유지를 위해 울면서 참형을 내렸다.’(이정규, ‘종의록’(독립운동사자료집1), 독립운동사편찬위, 1971) ‘성질이 사납고 무식한 백선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다가 안승우에게 군사를 청하니 안승우가 거부했다. 백선이 반란을 일으키자 류인석이 부드럽게 책망하여 변을 늦추고 포박하여 목 베었다.’(박정수,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상(독립운동사자료집1))
1910년 경술국치 후 팔도를 유람하며 충신들 행적을 기록한 기려자(騎驢子) 송상도(1871~1947)는 이렇게 기록했다. ‘병권(兵權)이 빼앗길까 시기함인가? 평민에게 욕본 것이 분해서? 안승우가 군사를 보내지 않아서 패배하고 의병도 사기가 꺾이게 되었으니 (김백선이) 분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대의를 내세워 원수를 갚으려 하는 자가 적은 토벌하지 않고 장수를 죽여 방패를 버리고 성을 무너뜨리니(棄其干壞其城·기기간괴기성) 제천의 패전은 당연하지 않은가.’(송상도, ‘기려수필·騎驢隨筆’(한국사료총서2집), ‘김백선 병신 원주 의병’, 국사편찬위)
의병장 류인석의 망명
김백선의 죽음에 대해 송상도는 한 줄 덧붙였다. ‘을묘년(1915년) 가을에 지평 상석리에 가서 이정규가 쓴 창의록을 보았다. 유인석, 이춘영, 안승우, 서상열, 나시운은 그 행적이 소상히 기록돼 있으나 김백선은 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없었다. 이 어찌 한탄스럽고 슬프지 않으랴.’
백면서생과 쑥대머리 연합군에 예견된 일이었다. ‘평등과 자유’를 반(反)질서적 가치로 인식한 유림 류인석에게는 포수들의 저항은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의병의 군사적 기반인 포수들에게 권위로 무장한 지도부의 행태 또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백선 처형 이후 포수 부대는 속속 이탈해버렸다. 주력 부대를 잃은 상황에서 절대적인 열세 속에 류인석 부대는 제천 패전을 시작으로 충청도에서 강원도로,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서북쪽으로 패퇴했다.
6월 10일 류인석이 진중에서 말했다. “중국에 가서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을 청해도 크게 잘못될 것은 없다. 또 우리 사람 1만 명이 사는 요동(遼東)에서 군사를 양성하면 크게는 온 무리를 바로잡을 것이요, 적게는 중화의 명맥을 보존할 것이다.” 8월 25일 부대는 압록강까지 퇴각했고 그날 류인석은 압록강을 건넜다.(이상 원용정, ‘의암유선생서행대략’(독립운동사자료집1)) 그곳에서 류인석은 공자 사당을 지어놓고 제사에 정성을 들이고 농사에도 열중하였므로 그곳 풍속에 감화를 주었다.(‘매천야록’ 2권, 1896년② 6.’유인석의 요동행')
1897년 대한제국을 세운 직후 고종은 류인석에게 귀국명을 내렸다. 류인석은 “나라 원수를 갚고 반드시 중국의 맥을 보존하여 큰 의리에 맞게 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며 귀국했다.(1897년 10월 20일 ‘고종실록’) 이후 그는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벌이다 대한13도의군 도총재에 선출됐다. 1913년 류인석은 자기 세계관과 시국관을 정리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했다. 위에 나온 ‘평등과 자유론’ ‘여학교론’과 ‘개화 불가론’은 이 책에서 나온 주장들이다.
무척 다른 풍경
강원도 춘천에 있는 호수 이름은 의암호다. 호반 옆에는 의암공원이 있다. 호수 이름은 이곳 바위 이름에서 따왔다. 의암공원에는 류인석 동상이 서 있다. 한자는 다르지만 류인석 호 또한 의암이다. 춘천 남면에는 류인석 묘가 있다. 1915년 당시 중국 봉천성(요령성)에서 사망한 류인석은 1935년 이곳으로 옮겨 안장됐다. 묘역 이름은 ‘대한13도의군 도총재 의암 류인석 묘역’이다. .
묘역 안에는 류인석을 기리는 의암기념관이 있다. 묘역 내 석물 하나가 눈에 띈다. 비석이다. 분묘 왼쪽 비석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有明朝鮮毅庵柳先生之墓·유명조선의암유선생지묘’. ‘명나라 속국 조선의 의암 유선생의 묘’라는 뜻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서인(西人), 그 가운데 주로 노론(老論) 명망가 묘소 앞 비석에서 흔히 보이는 문구다. 그가 감내해내고, 그가 저항했던 그 험악한 시대와는 어딘가 각도가 맞지 않는다.
류인석 묘역에서 한 시간 정도 양평 쪽으로 차를 몰고 가면 의병장 김백선 묘역이 나온다. 행정구역은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다. 김백선은 후손들과 함께 한적한 시골 마을 뒷산에 안장돼 있다. 한글로 쓴 비석이 두 개 서 있는데 하나는 ‘항일의병장 김백선 장군’이고 다른 하나는 ‘절충장군 을미의병 선봉장 경주김공 도제 자 백선지묘’다. 본명은 도제이며 백선은 자(字)라는 말이다. 그 오른편 아래에 작은 봉분이 하나 더 있다. 비석에는 ‘천비마의 묘’라 새겨져 있다. ‘하늘을 나는 말’[天飛馬·천비마]이라는 뜻일 것이다. 김백선이 타던 애마 무덤이 아닐까 싶다. 김백선은 1991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됐다. 류인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됐다.
나라와 공동체를 위하는 방식들 사이에도 이렇게 깊고 넓은 심연이 존재한다. 매국과 애국 사이에서 소시민적 행복을 꿈꾸는, 우리네 숱한 범인(凡人)에게는 이해 불가능한 큰 사람들의 삶들이 그러하다. <다음 주는 13도창의군 총사령관 이인영의 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