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암 최익현은 1834년 1월 14일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1907년 1월 1일 일본 대마도에서 죽었다. 그 사이에 최익현은 상소를 통해 대원군을 끌어내리고 고종 친정을 이끌었다. 각종 위정척사 상소를 통해 나라 문을 닫고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경계하라고 주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됐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체포돼 대마도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죽었다. 그 공로로 해방 후 최익현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최익현은 지금 충남 예산에 잠들어 있다. 많은 인물들이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경로와 명분은 다양했으나 순국이라는 결과는 동일했다. 그런데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입체적이어야 하고 사실(史實)에 맞아야 한다. 이 글은 최익현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다.
247. 위정척사파의 태두 최익현의 파란만장한 일생
킹메이커 최익현
고종이 즉위하고 10년이 된 1873년 음력 11월 3일(양력 12월 22일) 호조참판 최익현이 사표와 함께 작심 상소를 올렸다. 열두 살에 즉위한 고종에게 아버지 대원군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회수하라는 요구였다. 이미 여러 차례 올린 상소에 나온 내용이었지만, 이번 상소는 수위가 높았다. ‘(명나라 황제 사당인 만동묘와 서원 철폐, 노론의 정적인 남인들에게 시호를 내리려 하고 청나라 돈인 청전(淸錢)을 유통시킨) 몇 가지 문제는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정리하시라.’(1873년 11월 3일 ‘고종실록’) “명나라가 서원을 두 번 철폐했는데 그에 따라 왕실이 뒤집혔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7년 전인 1866년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둔 이래 흥선대원군이 시행한 모든 정책을 부정하라는 상소였다. 아니면 왕실이 뒤집힌다는 경고도 함께.
그다음 날 밤 고종은 벌떼처럼 궁중으로 몰려든 친대원군 대신들에게 친정을 전격 선언했다. 이로써 스물한 살 먹은 고종의 시대가 열렸다. 권력 기반은 노론과 척족 민씨 세력이었다. 고종 시대는 그렇게 마흔 살 먹은 차관(참판) 최익현이 열었다. 최익현은 킹메이커였다.
위정척사의 선봉에서
1876년 1월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 협상 와중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궁궐 앞에서 상소를 올렸다. ‘화친은 사학(邪學)의 지름길이며 기자(箕子)의 오랜 나라가 오랑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순조와 헌종 때 서양인들을 주륙했듯 계책을 세우시라.’(1876년 1월 23일 ‘고종실록’) 나흘 뒤 고종이 명을 내렸다. ‘임금을 속이고 핍박하는 말을 만들어 방자하게 지적하여 규탄하였다. 한 가닥 남은 목숨을 용서하여 흑산도로 유배 보내되, 사흘 길을 하루 만에 걷게 만들라.’ 3년 전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사람이었지만 왕명 거역은 있을 수 없었다.
1월 30일 흑산도에 유배된 최익현은 4년 동안 가시덤불 가득한 집에 갇혔다. 위리안치(圍籬安置)라고 한다. 최익현 또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최익현은 흑산도 곳곳을 유람하며 흔적을 남겼다. 1878년 4월 친구들과 함께 천촌(淺村) 마을을 찾았다. 그가 말했다. “섬 바깥에서는 풍속이 퇴폐해졌으나 이곳 사람들은 명나라 관(冠)을 쓰고 공자, 맹자가 아니면 읽지 않으니 진실로 존숭할 만하구나.” 그러고 마을 바위에 글을 새겼다.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 ‘기자(箕子)가 봉한 땅이요 명나라 첫 황제 주원장의 세월’이라는 뜻이다. 바위에는 주자가 쓴 시에 나오는 ‘지장(指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면암선생문집’20 ‘지장암기·指掌嵒記’) 최익현은 1879년 2월 9일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때는 19세기 후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격변의 시대였다. 갑돌이는 이런 계책을 논하고 병순이는 저런 계책을 논하며 나라를 걱정했다. 누군가는 철저한 쇄국을 해결책으로 삼았고, 누군가는 개방을 내세웠다. 최익현을 포함한 위정척사파는 쇄국을 주장했다. 체제를 파괴하는 삿된 학문을 배격하고 바른 학문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한 최선이라 여겼다. 그들에게 ‘기자가 봉한 땅과 주원장이 세운 세월’은 벗어나면 큰일이 날 프레임이었다.
다시 등장한 투쟁가 최익현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과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1894)이 조선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최익현은 침묵을 지켰다. 1894년 7월 갑오개혁 시대 고종이 최익현을 공조판서로 임명했다.(1894년 7월 1일 ‘고종실록’) 집에서 임명 소식을 받은 최익현은 “김홍집과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명을 조작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리고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됐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고종은 최익현을 민심을 안정시키는 선유대원에 임명했다. 최익현이 사표를 던지며 붓을 든다. “원수를 갚겠다는 의병을 내가 어찌 선유하겠는가.”(1896년 양력 2월 25일 ‘고종실록’)
1905년 2월 최익현은 경기관찰사에 임명됐다. 그는 “나라 파는 무리를 처벌하라”며 사직했다. 최익현은 일본군에 체포됐다 석방됐다.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됐다. 최익현은 “폐하께서는 명나라가 망할 때 의종이 사직을 위해 죽은 의리를 듣지 못하셨는가?”라고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헤아릴 일이 있다”고 답했다.(1905년 11월 29일 ‘고종실록’)
1906년 1월 19일 최익현은 논산 궐리사에서 집단 상소를 결의했다. 그리고 3월 15일 그때 살던 충남 청양 정산(현 청양군 목면)에서 거병을 결의하고 호남으로 출발했다. 그가 말했다. “내 나이 80에 가깝지만 사생(死生)은 깊이 생각할 것이 아니다.”(‘면암선생문집’ 부록4 연보) 6월 14일 최익현은 제자 무리와 함께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거병하고 일본의 16가지 죄목을 적은 문서를 작성한 뒤 순창으로 행군했다. 순창에서 관군에 포위되자 “민족끼리 전투는 불가하다”고 선언했다. 무리들이 흩어지고 최익현은 남은 제자 21명과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 ‘맹자'를 읽다가 체포됐다.(위 연보) 그리고 3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대마도에 끌려가 죽었다. 이제 최익현의 신화가 탄생한다.
대마도에 유폐된 최익현
충남 예산 광시면에는 최익현 묘가 있다. 묘 앞에는 그를 기리는 ‘춘추대의비’가 서 있다. 1973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렇게 적혀 있다. ‘산 몸으로 적이 주는 한 알의 쌀과 한 모금의 물마저 물리치고 74세 일기를 들어 아사순국(餓死殉國)으로’. 대마도에서 일본군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하다가 순국했다는 뜻이다. 끌려간 날은 8월 27일이었고 죽은 날은 1907년 1월 1일이었다. 70 노인이 자그마치 4개월 넘도록 단식 끝에 죽었으니, 조선인에게는 우국충정과 반일 투사의 극단적 상징이었으리라.
그런데 사실은 다르다. 함께 대마도에 갇혔던 제자 임병찬의 ‘대마도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일본군 대대장이 통역을 통해 관을 벗고 경례를 하라고 했다. 선생이 벗지 않으니 일본인이 다시 말했다. “일본이 주는 밥을 먹으니 일본 법을 거역하지 말라.” 병정이 칼로 찌르려 하자 선생이 나와서 꾸짖었다. “이놈, 어서 찔러라.” 이에 선생은 “밥을 먹지 않고 자결(自決)하게 되었으니 이 역시 운수로다”라 말하며 나를 시켜 황제에게 아사 순국하겠다는 상소를 적어내렸다. 그런데 대대장이 와서는 “통역이 잘못 전했으니 안심하고 밥을 먹고 나라를 위해 몸을 조심하시라”고 전했다. 이를 선생에게 전하니 죽을 드셨다. 우리 모두 밥을 먹었다.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다. 12월 4일 선생이 풍토병을 얻었다. 아들과 의사가 건너와 병구완을 했다. 선생은 끝내 돌아가셨다. 1907년 1월 1일이다.’(임병찬, ‘대마도일기’, ‘독립운동사자료집’2)
죽어서 신화가 된 최익현
1907년 1월 5일 최익현 유해를 태운 배가 부산에 도착했다. 수천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제자들이 소리쳤다. “이 배는 대한의 배요, 이 땅은 대한의 땅입니다!” 관(棺)은 군중을 뚫고 하루 짧게는 10리씩 길게는 30리씩 겨우 움직여 보름 만에 도보와 열차를 이용해 청양 정산 본가에 도착했다.
1907년 1월 14일자 ‘황성신문’은 ‘고 찬정 최익현씨를 조상함(吊故贊政崔益鉉氏)’라는 사설을 썼다. 제목과 달리 내용은 매정했다. ‘최면암은 구래 학설을 베낀 것이 아닌 것이 없고(罔非勦襲於舊來之學說·망비초습어구래지학설) 세상은 변했으나 혼자 변하지 않은 사람(時變而我不變者·시변이아불변자)이었도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1907년 4월 25일 제자 임병찬이 뒤늦게 고종에게 올린 스승의 상소문이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전문을 인용한 이 기사는 ‘삼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아뢴다(謹自盡以聞·근자진이문: 여기에서 ‘聞'은 ‘아뢴다'는 뜻이다)’는 상소문 끝 문장으로 끝났다. 원래 임병찬은 이 상소와 함께 ‘스승께서 사흘만에 단식을 푼 이유’를 적은 본인 상소문도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대한매일신보’가 왜 이 제자 상소를 싣지 않았는지 이유는 모른다.
연유야 어찌됐건, 이 불충분한 보도로 최익현은 나이 일흔넷에 적지에 끌려가 자결한 신화적 선비가 되었다. 구시대 인물이라는 황성신보의 평가는 사라지고 최익현은 ‘대마도에서 백이, 숙제처럼 죽은 최면암씨’ 같은(1908년 3월 20일 ‘대한매일신보’)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후손과 제자가 만든 그 문집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압수 대상이 됐다.(1909년 7월 7일 ‘황성신문’ 등) 의도되지 않은 오보(誤報)가 만든 신화였지만, 최익현은 오래도록 조선사람들의 구심점이 됐다.(그런데 대한민국 보훈처에 등록된 최익현 공적조서에는 ‘일본 음식을 먹지 않고 한국 음식만 먹다가 공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옥중에서 아사함'이라고 적혀 있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최익현 공적조서 개요))
예산에 있는 면암 묘소
최익현이 처음 묻힌 곳은 거병 결의를 밝힌 논산 노성면 지경리(옛 노성군 월오동면 지경리) 궐리사 부근 무동산 기슭이었다.(위 연보 1907년 5월 12일) 궐리사는 조선 후기 노론의 본거지였다. 그의 제자들이 충남 연기를 비롯해 여러 곳에 장지를 살폈지만 최종 장지는 궐리사 옆이었다. 그런데 지금 무덤은 예산 광시면에 있다.
왜 예산으로 이장했는지 기록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참배객을 막기 위해 일제가 강제 이장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무동산에 묘를 쓰고 열흘 뒤 ‘대한매일신보’에 박영직이라는 노성면 주민이 이런 광고를 실었다. ‘최선생 묘를 허락 없이 우리 집 선산에 썼기로, 이미 장사를 치러 큰 낭패를 보겠기에 선생의 충절에 어렵게 허락했으나 7개월 연한으로 반드시 이장하라.’ 이장한 이유가 강압인지 이 산송(山訟)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면암은 지금 예산 광시면에 잠들어 있다. 광시면은 대마도에 함께 구금됐던 홍주 의병들의 거병지였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나고 있었다. 페이스북 벗 Bakin Kang의 글로 맺는다. ‘서양에서 400년 동안 여러 세대에 걸쳐 진행된 일들이 우리의 100년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전제군주에게 충성하는 구한말 정서, 일제에 목숨 걸고 항거하는 독립군 정서, 농업 사회 대가족 제도에 느끼는 향수, 산업사회를 넘어 4차 산업혁명으로 가야 하는 성급함. 이 혼합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사회가 한 개의 정리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그때도 참으로 혼돈이었다. 그 혼돈 속에 면암 최익현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