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백성이 오랑캐에게 끌려간 사이 많은 권력자들은 자기 가족 안위를 챙겼다. 자식을 보내지 않기 위해 삼공육경(三公六卿:현직 정승과 판서)은 앞 다퉈 사표를 냈다.(2021년 3월 24일 ‘박종인의 땅의 역사: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참조) 난세에 가장 먼저 희생되는 사람은 약자다. 가난하고 권세 없는 백성이 그 첫째다. 그리고 17세기 또 다른 희생자가 있으니, 여자(女子)였다. 오랑캐에게 한 번, 가짜 도덕군자들에게 한 번.

경기도 의정부 금오동 산45-21번지 ‘족두리 산소’. 금오동 사람들은 무덤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1650년 청나라 친왕 도르곤에게 강제로 시집간 의순공주가 압록강을 건너기 전 투신자결하고 족두리만 남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추모하며 꽃다발을 가져다놓았다. 17세기 남정네들의 무책임한 위선은 많은 여자들을 불합리한 억압 속으로 몰아넣었다./박종인

[박종인의 땅의 歷史] 253.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②위선의 희생, 의순공주

청나라 도르곤의 청혼

1650년 봄날 청나라에서 돌아온 사신 수행원 나업이 왕에게 이리 보고하였다. “상처(喪妻)한 구왕(九王)이 조선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저들이 모두 안다. 혼인이 성사되면 대국에서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놀란 왕에게 나업이 말을 이었다. “현재 공주가 두 살이라 하니 저들이 ‘종실 여자 가운데 선택해도 무방하다’고 답했다.”(1650년 3월 5일 ‘효종실록’)

인조를 이어 둘째 아들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른 다음 해였다. 함께 청나라 심양 인질 생활을 하며 개방과 교린을 꿈꿨던 형 소현세자와 달리 효종은 대청 복수심을 잔뜩 키워온 왕이었다. 그런데 감히 오랑캐 따위가 내 딸을?

구왕 도르곤(多爾袞·이하 도르곤)은 청 태종 홍타이지 이복동생이다. 1644년 북경을 함락시켜 명나라 마지막 숨통을 끊은 사람이 이 도르곤이었다. 1643년 홍타이지 사후 그 아들 푸린(福臨)이 아홉 살에 황위에 오르자 섭정왕에서 숙부섭정왕으로, 황숙부섭정왕에 이어 황부섭정왕으로 격을 높여가며 권력을 강화해온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그 오랑캐 권력자가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미 두 달 전인 1월 28일 도르곤은 조선에 여자 간택을 위해 관리를 파견했다.(1650년 1월 28일 ‘세조장황제실록’) 그 관리가 조선 사신과 함께 와서 대기 중이었다.

‘두 살 먹은 딸이 있다’는 나업의 말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효종은 딸부자였다. 여섯은 왕비 장씨 소생이고 하나는 후궁 안빈 이씨 딸이었다. 요절한 맏딸과 결혼한 둘째를 제외하고 모두 미혼이었다. ‘경국대전’은 여자 적령기를 14세로 규정하고 있지만 13세 이하라도 논의에 따라 혼인이 가능했다.(‘경국대전’ 예전 ‘혼가(婚嫁)’) 그때 셋째 숙명공주는 열 살이었다. 1651년 이조참판 심지원 아들 심익현과 혼인할 때 숙명공주는 열한 살이었다.

이틀 뒤 청나라 칙사가 효종을 독대해 섭정왕 칙서를 바쳤다. ‘왕 누이나 딸, 혹은 근족이나 대신 딸 중 정숙하고 아름답고 훌륭한 자(淑美懿行者·숙미의행자)를 택해 보내라.’(1650년 3월 7일 ‘효종실록’)

군주(君主)는 안도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다. 자기 딸은 지켰다는 군주의 이기심이 불 댕긴, 자기 자식은 죽어도 인질로 못 보내겠다며 정승과 판서 자리를 던졌던 도덕군자들의 위선 전쟁.

없다가 자꾸 나타나는 딸들

3월 12일 효종은 비변사에 정2품 이상 관리들을 소집하라 명했다. 느닷없는 소집령에 한성 전체가 밤새 시끄러웠다. 이튿날 2품 이상 문신과 음서직(고위직 아버지를 통한 특채 관직)을 조사한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성 좌윤 허계 딸 외에는 다 결혼했거나 어리거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비변사가 무신까지 확대해 재조사하니 판돈령 민형남 손녀, 호조참판 여이재와 양원군 허선의 딸과 무신인 행호군 박심의 딸이 나왔다.

오전에는 없었던 문신 여식이 셋이 나온 것이다. 무신 박심의 딸을 대상에서 제외한 비변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네 명'만으로는 시늉만 했다고(塞責·색책) 비난받을까 두렵다.” 과연 청나라 사신들이 따졌다. “2품 이상 녹을 먹는 자가 200인 이상인데 선발된 수가 이와 같이 적음은 무슨 일인가. 품계와 무관하게 여자를 고르라.” 비변사가 보고했다. “한낱 여자를 희생시켜(捐一女子·연일여자) 국난을 풀 수 있다면 신하로서 사양할 바가 아니다. 숨겼다가 드러나게 되면 사법처리하라고 명하시라.”(이상 1650년 3월 13일 ‘비변사등록’)

결국 비변사는 문무관과 음서직 3품 이상으로 확대해 처녀 40명과 종실 처녀 16명을 골라냈다. 3월 14일 처녀들을 면접한 청나라 사신들이 말했다. “하나같이 못생겼다. 우리를 시험하는 것인가?”

3월 20일 청 사신 파흘내 일행과 조선인 역관 정명수가 창덕궁 내전으로 들어갔다. 내전에는 종실 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 나온 파흘내가 말했다. “열여섯 먹은 여자는 행장을 꾸리고 열세 살 여자는 대기시키라.” 마침내 도르곤 아내가 간택된 것이다.

청나라로 시집간 의순공주

조정에서 저렇게 난리를 피웠지만 청나라로 보낼 처녀는 일찌감치 간택돼 있었다. 청나라 사신이 효종을 독대하고 이틀 뒤, 종실 관리부서인 종부시 제조 오준이 효종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일찍이 성상 하교를 듣고 금림군(錦林君)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고 하였나이다.” 효종이 즉시 대답했다. “어제 이미 선택하여 들어오게 하였다(昨日已令選入矣·작일이령선입의).”(1650년 3월 9일 ‘효종실록’)

금림군 이개윤은 왕실 제사 담당관인 대전관(代奠官)이었다. 효종과 10촌지간이었다. 모두가 자기 딸을 감추기에 급급한데 이개윤은 혼사에 관한 ‘성상의 하교를 듣고’ 자기 딸 자랑을 했다는 뜻이었다.

3월 20일 청나라 사신들이 창덕궁 내전에서 간택을 하고 나온 열여섯 먹은 처녀가 바로 ‘자색이 있는’ 금림군의 딸이었다.

닷새 뒤인 3월 25일 효종은 금림군 딸을 의순공주로 삼았다. 금림군은 품계를 올려주고 비단과 쌀과 콩을 후하게 내렸다. 4월 22일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떠났다. 효종은 한성 서쪽까지 나가서 그녀를 배웅했다. 시녀 열여섯 명과 여의(女醫), 유모가 호종했다. 도성 백성이 모두 비참해 하였다.

떠나기 전 공주를 호종할 사신들에게 왕이 일렀다. “누가 묻거든 이리 대답하라. 금림군은 내 5촌이고 의순공주는 내 6촌이며 양녀다. 금림의 자식이 아니다.”(1650년 3월 26일 ‘승정원일기’) 효종과 10촌 형제뻘이던 금림군은 5촌 아저씨로 둔갑했다. 11촌 조카딸은 6촌 누이며 동시에 양녀가 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5월 1일 의순공주 오라비 이준과 이수가 인조릉인 장릉 종9품 참봉과 행사용 장막 관리부서 전설사 종8품 별검에 임명됐다. 금림군은 청황실에서 보낸 채단 40필과 은 1000냥을 받고 4년 뒤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떠났다.

국가와 왕실을 위한 충정으로 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100여 년 뒤 고증학자 이긍익은 아니라고 보았다. ‘오로지 나라를 위함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채폐(采幣·혼인 선물)가 많음을 탐낸 것이다. 개윤은 집이 극히 가난했는데 부자가 되었다.’(‘연려실기술’ 효종조고사본말 경인년 3월)

의순공주로 간택이 결정되고 사흘 뒤 효종이 관료들에게 이리 물었다. “근래에 사대부집에서 서로 다퉈 혼사를 치른다는데 사실인가?” 사정을 모르는 양반들이 간택을 면하려고 결혼행진곡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청나라 요구도 요구지만, 열 살 된 세자와 열한 살과 아홉 살 먹은 공주 혼인도 문제라며 효종은 8~12세 사대부 자녀 혼인 금지령을 내렸다.(1650년 3월 23일 ‘효종실록’) ‘두 살배기 공주 하나뿐’이라는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가짜라는 자백이었다.

인천시 강화도 해변에 펼쳐진 나문재 밭. 해변을 붉게 수놓은 나문재는 병자호란 때 백성을 죽음으로 처넣은 한성판윤 김경징 이름을 따 ‘경징이풀’이라고도 불린다./박종인

불쌍한 경징이풀, 그리고 위선

13년 전인 1637년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강화도를 지킨 부대장은 한성판윤 김경징이다. 그런데 김경징은 김포에서 자기 가족 친지만 배에 태우고 다른 사람들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빈궁이 외쳤다. “경징아, 경징아, 네가 차마 이런 짓을 하느냐.” 사람들이 적병에 차이고 밟혀 끌려가거나 빠져 죽어 휘날리는 낙엽과 같았다. 김경징의 아들 진표는 아내를 다그쳐 자진하게 하였다. 할머니와 어머니도 잇달아 자결했다. 일가친척 부인들도 모두 자결했다. 진표는 홀로 죽지 않았다.(‘연려실기술’ 인조조고사본말)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 풀이 자라는데, 사람들은 그 풀을 경징이풀이라고 불렀다.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환향녀(還鄕女)라 부른다. 1638년 끌려갔던 신풍부원군 장유 며느리가 돌아왔다. 장유는 인조에게 “며느리와 함께 제사를 지낼 수 없으니 이혼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좌의정 최명길은 “몸을 더럽혔다는 증거가 없다”며 불가를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사대부집 자제는 환향녀와 다시 합하는 자가 없었다. 실록은 최명길을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라고 평했다.(1638년 3월 11일 ‘인조실록’)

환향녀와 천보산 족두리 산소

1650년 12월 의순공주를 ‘흰 소나무를 닮은 매(白松鶻·백송골: 성해응, ‘연경재전집속집’ 15 - ‘송골'은 몽골어로 ‘매'를 뜻한다. 백송골은 ‘흰 매'라는 뜻이나 이 글에서는 의순공주 미모를 은유한 단어로 풀이했다)’라 반겼던 도르곤이 죽었다. 청실록은 의순공주가 도르곤의 형 단중친왕 보로(博洛)에게 개가했다고 기록했다. 단중친왕마저 죽자 동지사로 갔던 아버지 이개윤이 황제에게 청하여 딸을 데려왔다.(1656년 2월 19일 ‘청실록’) 공주는 도르곤 목소리를 듣고자 무당을 부르며 살다가 죽었다.(1662년 8월 18일 ‘현종실록’, 이덕무, 청장관전서 69권, ‘의신공주’)

1948년 소설가 이광수는 ‘인조가 “환향녀들은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들어오라”고 명했다’는 ‘회절강(回節江) 신화’를 만들어냈다.(이광수, ‘나의 고백, 홍제원 목욕’, 이명현, ‘환향녀 서사의 존재 양상과 의미’, 동아시아고대학 60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재인용) 수필에서나마 옛 여자들 한을 풀어준 것이다.

경기도 의정부 천보산 기슭에 금림군 가족묘역이 있다. 동쪽 끝 비석 없는 묘는 족두리산소라 불린다. 의정부시 금오동 산45-21, 산장아파트 뒷산이다. 사람들은 이 묘에 의순공주 족두리가 묻혀 있다고 믿는다. 오랑캐 땅을 밟기 전 공주가 압록강에 투신해 족두리만 모셨다고 믿는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무책임한 남정네들 위선이 만들어낸, 측은한 전설.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