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고양동에 있는 벽제관지(碧蹄館址)는 조선시대 명‧청 사신이 한성으로 들어오기 전 묵었던 객사다. 이들이 서대문 바깥 모화관에 이르면 국왕이 나아가 사신을 영접하곤 했다. 임진왜란 동안 반파된 벽제관은 쓰레기로 덮여 있었다.(1593년 윤11월 21일 ‘선조실록’) 인조 3년인 1625년 조선 정부는 고양군 관아를 5리 북쪽으로 이전하고 벽제관도 함께 이전했다. 6‧25 때 불탄 뒤 주춧돌만 남은 폐허가 지금 벽제관지다.
그 사이 대륙은 청(淸)으로 넘어갔다. 벽제관 객사는 청나라 사신이 차지했다. 사신 옆에는 사신보다 유세를 떨며 자기 나라를 등쳐먹은 자가 있었다. 직업은 역관(譯官)이었다. 청나라 권세에 올라타 오로지 일신영달에 매진했던 매국노 굴마훈(孤兒馬紅), 역관 정명수(鄭命壽)다.
254.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③고양 벽제관과 매국노 정명수
누르하치의 만주 문자 창제
1599년 후금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 문자를 응용해 만주 문자를 창제했다. 1632년 그 아들 홍타이지가 이 문자를 개량해 반포한 이후 청은 모든 문서를 한자와 만주어와 몽골어로 기록했다. 청 관리는 한문을 읽지 못했고 조선 관리는 만주어를 읽지 못했다.(김선민, ‘조선통사 굴마훈, 청역 정명수’, 명청사연구 41권, 명청사학회, 2014)
청 예부 관리들은 심양에 있는 소현세자에게 “모든 일은 말로 하고 문자는 쓰지 말라”고 했다.(소현세자, ‘심양일기’, 이석호 역, 양우당, 1988, p78) 한문 못 읽는 청나라 관리와 만주글 못 읽는 조선 관리 틈에서 권력이 자라났다. 조선 출신 청나라 역관이다. 문자는 몰라도 조선어와 만주어 회화에 능했던 사람들이다. 굴마훈 정명수가 그랬다.
조선 노비, 청나라 칙사가 되다
‘연려실기술(이긍익)’에 따르면 정명수는 1627년 정묘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사내였다. 원래는 평안도 은산(현 순천) 관노였다가 만주어를 익히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전담 역관으로 활동했다. 청으로 귀화한 그는 굴마훈(孤兒馬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토끼’라는 뜻이다.(김선민, 앞 논문)
조선은 그를 ‘본래 교활하여 본국 사정을 몰래 고해바친 자’라고 했다.(1637년 2월 3일 ‘인조실록’) 청에서는 ‘조선을 다스리며 황명을 어기고 법도를 거스르며 권력을 남용한 자(把持朝鮮 違旨悖法 擅作威福‧파지조선 위지패법 천작위복)’라고 했다.(‘동문휘고’1(한국사료총서 24집), 원편 38, ‘형부 정명수 감죄 원제 자문’)
난세였다. 숱한 백성이 폭압적으로 청나라로 거처를 옮겼고 숱한 여인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폭압적 수모를 겪었다. 부국강병에 더더욱 매진해야 할 숱한 권력자들은 권력으로 금력으로 자기네 몸을 보전했다.
난세를 극복하는 졸렬한 방법을, 천출인들 배우지 못했겠는가. 정명수는 호역(胡譯), 정역(鄭譯)으로 불리다가 칙사로 임명돼 정사(鄭使)라 불렸다. 그리고 본 대로 배운 대로 흉내 내며 나라를 영달 도구로 삼았다.
노비 정명수의 분풀이
병자호란 이후 기록에 나오는 조선인 출신 청나라 역관은 스무 명 정도다.(김남윤, ‘병자호란 직후 조청 관계에서 청역(淸譯)의 존재’, 한국문화 40권,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7) 김돌시, 박돌시, 이엇석 같은 이름으로 추정컨대 노비 출신도 상당수였다. 이들은 조선 정부 역관들과 함께 소현세자가 살고 있는 심양관과 조선을 오가며 활동했다.
조선은 용골대와 마부대가 전담했다. 두 사람은 홍타이지 이복동생 도르곤의 심복이었다. 정명수는 조선 사정을 고해바치는 스파이를 자임해 칸(汗)에게서 신임을 얻었다.(1637년 2월 3일 ‘인조실록’) 청나라 실세를 등에 업은 정명수는 그 권력을 마음껏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
1633년 정명수는 황해도 평산에서 관아로 달려가 현감 홍집에게 행패를 부렸다. 은산 노비 시절 자기를 곤장 때린 분풀이를 한 것이다.(1633년 10월 22일 ‘인조실록’) 행패를 익히 알고 있던 평안도관찰사 홍명구는 병자호란 때 평양에서 정명수 사위 목을 베어버렸다.(이식, 택당집 별집 9권 ‘홍명구 행장’) 설움과 원한은 복수심을 동반한 권력 남용으로 증폭됐다.
하늘 찌르는 오만한 권세
1637년 1월 남한산성에서 굶주리고 있던 조선 정부 관료들에게 청나라 역관 이신검이 귀띔했다.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면 강화가 가능하다.” 인조는 정명수에게 은 1000냥,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각각 3000냥을 은밀히 바쳤다.(1637년 1월 13일 ‘인조실록’) 17일 뒤 삼전도에서 항복 의식이 치러졌다. 그리고 2월 5일 소현세자가 청으로 끌려갔다. 세자가 걸음을 멈추자 정명수는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해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1637년 2월 5일 ‘인조실록’)
그 위세는 이용 가치도 높았다. 용골대는 정명수를 통해 소현세자에게서 여자 속환금 명목으로 은 200냥을 받아 갔다. 정명수는 자기가 데리고 있는 여자도 돈 내고 속환하라고 요구했다.(‘심양장계’ 1640년 5월 16일) 도르곤 또한 병이 있다며 귀한 약을 ‘몰래’ ‘넉넉하게’ 구해달라고 정명수를 통해 요구했다.(앞 책 1643년 9월 6일)
호란 당시 조선 총사령관이던 김류는 용골대에게 자기 서녀 속환금으로 천금을 제시해 가난한 백성 원망을 샀다. 답을 듣지 못한 김류는 정명수를 끌어안고 “판사와 더불어 일을 하게 됐으니 한 집안이니 판사 청은 내가 꼭 따르겠다”며 서녀 속환을 간청했다. 일국 사령관이 일개 역관을 종1품 판사라 불렀다.(나만갑, ‘병자록(남한산성 항전일기)’, 동인 역, 주류성, 2017, p138)
패악과 인사 농단
‘두 나라 사정은 일체 그가 조종하는 대로 되었다. 조정에서는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려주고 피붙이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그가 태어난 고을을 승격해 은산부라고 하였다. 명수가 임금을 업신여겼으나 삼공과 육경은 질책과 모욕을 했을 뿐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오직 돈으로 달래려 애쓸 뿐이었다.’(연려실기술 26권 인조조고사본말 ‘삼학사’)
조선 정부는 한심할 정도로 끌려다녔다. 이하는 ‘인조실록' 기록이다.
소란을 피우는 자기 기생을 제지한 정6품 병조좌랑을 정명수가 몽둥이로 때려도 그냥 보기만 했다.(1639년 12월 2일) 세자 교육기관인 심양 시강원 종3품 보덕 황감, 문학 신익전은 정명수 요구로 교체됐다. 1644년 사신으로 뽑힌 이덕형도 정명수 요구에 따라 교체됐다.(1641년 3월 8일, 25일, 1644년 4월 29일) 이듬해 사신에 임명된 호조판서 민성휘는 자기가 정명수 심복을 처형한 옛 기억을 떠올리며 지레 보복이 두려워 사표를 던졌다. 평안감사, 은산부사, 강서현령도 정명수가 갈아 치웠다.(1645년 11월 24일, 1647년 3월 3일)
정부 내에 정명수가 심어놓은 간첩도 많았다. 평안도 무장과 수령은 대부분 정명수 청으로 임명됐다. 자연히 정명수는 정보를 장악했다.(1651년 10월 23일 ‘효종실록’) 정명수가 말했다. “우리 이목이 매우 많은데 우리를 속일 수 있는가.”(1650년 3월 1일 ‘효종실록’) 정명수를 ‘판사’라 불렀던 영의정 김류는 “국가 안위가 모두 이 사람 희로(喜怒)에 달려 있다”고 했다.(1645년 8월 25일 ‘인조실록’)
세상이 어찌 되든 나와 내 가족만
1639년 조선 정부는 정명수를 조선정부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했다. 임명 날짜를 1628년으로 소급해달라는 청까지 들어줬다. 매부 임복창은 군역을 면제받았다.(1639년 7월 1일) 1644년 정명수가 역관에서 칙사로 승진해 조선을 찾았다. “분수에 넘게 칙사 칭호를 얻었으니 영광이 더 할 수 없다.” 영광으로 끝날 리가 없었다. “사생(四生)이라는 평안도 숙천 관비가 내 조카다. 일을 시키지 말라. 또 다른 조카 이옥련을 문화현령 시켜줘 고맙다. 그런데 내 부모 묘가 있는 영유현감으로 전근 보내라.” 정부는 요구대로 들어줬다.(1644년 4월 28일)
이듬해 이옥련은 평안도 순천군수가 됐다. 품계는 목사급인 당상 통정대부로 승급했다. 이옥련은 친척 여동생인 사생을 첩으로 삼고 살다가 다툼 끝에 사생에게 살해됐다.(1645년 윤6월 6일, 11월 20일) 역시 관노인 처남 봉영운은 만호(萬戶)에서 첨사(僉使)로, 군수로 속속 영전했으나 “나는 천한 노예”라며 사양했다.(1639년 8월 6일 등)
1648년 정명수는 정1품 영중추부사로 승진했다. 노비였던 조카 장계우는 그날 종4품 무관 강원도 방산 만호(萬戶)에 임명됐다.(1648년 3월 7일) 처남, 조카에서 동생 사위까지 굴마훈 정명수 혀는 무소불위(無所不爲) 무소부재(無所不在)였다.
심판당한 매국노
1640년 마부대가 죽었다. 1648년 용골대가 죽었다. 그리고 1650년 12월 도르곤이 죽었다. 섭정에서 벗어난 청 황제 순치제는 죽은 도르곤의 권력 일체를 회수했다. 비빌 언덕 사라진 정명수는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을 보였다.’(1651년 6월 3일 ‘효종실록’) 결국 정명수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돼 조사를 받았다.
1653년 4월 20일 청나라 형부에서 조선에 보낸 정명수 심문 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작위복(擅作威福‧권력 남용)’. 죄목은 이러했다. ‘조선에 첩을 둘이나 둠. 황명에 앞서 사무 처리. 관리와 상인을 결박해 강제로 거래. 식품 부당 거래. 친인척 인사 농단. 뇌물 수수 등등.’(앞 ‘동문휘고’1 원제) 사형을 면한 정명수는 재산을 몰수당했다. 본인은 노비로 추락했다.
조선 왕 효종은 “죽이지 않았으니 걱정스럽다”고 했다.(1653년 6월 3일 ‘효종실록’) 걱정을 없애기 위해 정부는 만호에서 현감까지 올랐던 조카 장계우를 처형했다. 정명수 고향 은산은 부(府)에서 현(縣)으로 환원시켰다. 정명수 민원으로 면천됐던 노비들은 모조리 노비로 되돌려버렸다. 패거리 가운데 심한 자는 죽이고 가벼운 자는 유배보냈다.(1653년 7월 3일, 15일 ‘효종실록’)
그런 시절이 있었다. 역관 하나가 남의 나라에 빌붙더니, 자기 집 곳간과 가족들 안녕만 챙기던 조선 지도자들 상투를 쥐고 흔들던, 그런. 정명수에게 붙은 마지막 호칭은 ‘정적(鄭賊)’, 도둑 정가놈이었다.(1657년 8월 19일 ‘효종실록’) <’위선의 계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