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257.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②국가 상징축과 광화문광장
국가상징축과 한성 프로젝트
2006년 12월 5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세종광장 조성방안과 관광 활성화 방향’ 시민토론회에서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도심발전연구단장 김선웅은 이렇게 발표했다.
‘일제는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근정전 앞에 총독부 건물을 일본에 의해 강화된 태평로 축에 맞추어 건설함으로써 경복궁의 남북 축을 차단함. 또한 해태상과 광화문을 이전하고 경복궁을 파괴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함. 총독관저(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조선신궁(天)에 이르는 일제의 축이 형성됨.’(김선웅, ‘세종광장 조성방안’, ‘세종광장 조성방안과 관광 활성화 방향 학술자료집’,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6, p8)
3년 뒤인 2009년 국토해양부는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을 계획하며 이렇게 규정했다. ‘서울은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에 의하여 조성된 이래 600년 역사의 중심 공간임. 경복궁~서울역~한강(노들섬)을 연결하는 7㎞를 역사와 미래를 아우르는 국가상징거리로 조성함.’ 특히 서울역~한강 구간은 ‘미래 발전 도약의 공간’으로 선언했다.(국토교통부,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 사전기획 연구 요약문’, 2009, p7, 8) 이후 지금 도심 곳곳에서 역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서울 광화문 앞 도로는 300억원을 투입해 광장으로 변신했고 그 광장은 또 그만큼 돈을 투입해 개조 중이다. 어제 서울시장 오세훈은 현 작업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오류는 없는가. 120년 전 대한제국 광무제 고종이 개조했던 그 황성(皇城)처럼 조급함으로 인해 만인에게 걱정을 끼칠 우려는 없는가.
모든 역사는 땅에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기록한 옛 사진과 지도에는 진실이 기록돼 있다. 이제 구경해본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국가 축’과 ‘백악주산설로 조성된 도시 한양’이 과연 진실인지.
“내가 참서를 불태우라 했거늘”
권력을 잡고 17년째인 1417년 태종 이방원이 어전회의에서 말했다. “내가 서운관 참서(讖書)를 모조리 불살라 버리라고 했었는데 아직 있다는 말인가? 참서를 후세에 전한다면 사리를 밝게 보지 못하는 자들이 깊이 믿을 것이다. 빨리 불살라 이씨 사직에 손실됨이 없도록 하라.” 한마디 더 했다. “도읍을 천도할 때 진산부원군 하륜이 참서를 믿고 도읍을 무악으로 하자고 했다. 나는 믿지 않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했다.”(1417년 6월 1일 ‘태종실록’) 반년 뒤 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박은과 조말생이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같은 해 12월 15일 ‘태종실록’)
이상한 일이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한양 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학대사와 정도전과 하륜 사이에 풍수지리 논쟁을 거쳐 이뤄진 일’이 아니었나. 그런데 태종은 풍수지리를 논하는 참서를 태우라 명하고 본인은 “나는 믿지 않았다”고 주장하다니.
결론부터 이야기한다. 조선 수도 한성은 오로지 실용적인 기준에 따라 건설된 도시다. 한성 천도와 한성 도시 계획에 풍수지리는 개입되지 않았다. 대신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어서’(1394년 8월 24일 ‘태조실록’), ‘또다시 (큰 비용을 들여) 토목 사업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1404년 10월 4일 ‘태종실록’) 좌청룡 우백호 같은 풍수지리적 해석은 후대에 만들어진 신화다. 게다가 600년 뒤 이 개명 천지 공화국 시대에 도시를 갈아엎는 데 쓰이는 도시 괴담이다.
이성계-방원 부자의 천도 계획
고려를 타도한 이성계에게 개성은 떠나야 할 곳이었다. 그래서 많은 인력을 들여 전국으로 새 도읍지를 물색했는데, 그 가운데 계룡산과 한양이 있었다. 계룡산은 너무 멀었고 한양은 가까웠다. 1393년 2월 태조가 계룡산 현장에서 가부를 묻자 무학은 “능히 알 수 없다”고 답했다.(1393년 2월 11일 ‘태조실록’) 그래도 태조는 계룡산 천도를 결정했다. 대토목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그해 12월 경기좌우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쳤다며 무악(毋岳)을 후보지로 추천했다. 무악은 지금 서울 연희동 부근이다. 이성계는 재상들에게 뜻을 물었다. 정도전이 말했다. “다스림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지리의 성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술수를 쓰는 자(術數者·술수자)만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는가.”(1394년 8월 12일 ‘태조실록’) 태조는 남경(한양) 옛 고려 궁터에 들러 이리 말했다. “조운이 통하고 백성도 편리할 땅이다.”(같은 해 8월 13일 ‘태조실록’) 한양이 도읍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왕자의 난’으로 아들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한 뒤, 정종 동생 이방원이 왕이 됐다. 1404년 9월 13일 태종은 한양 재천도를 선언하고 궁궐수보도감을 설치했다. 그런데 하륜이 또 무악 천도를 주장했다. 그해 10월 태종은 대신, 지관들과 함께 무악을 답사했다. 지관들이 하나같이 무악이 좋다고 주장했다. 태종이 이리 힐난했다. “태조께서 물을 때는 왜 다 나쁜 땅이라 했는가.” 우물쭈물대는 지관들에게 그가 말을 이었다. “왜 한양에 있는 궁실을 놔두고 나더러 이 풀 우거진 땅에 토목공사를 하라고 하는가!”(1404년 10월 4일 ‘태조실록’) 지관들을 불신하고 막대한 비용을 추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이틀 뒤 태종은 측근 다섯을 데리고 종묘로 들어가 동전을 던졌다. ‘척전(擲錢)’이라는 점이다. 개성과 무악과 한양 가운데 한양이 길2, 흉1로 나왔다.(같은 해 10월 6일 ‘태종실록’) 측근들만 참석하고, 흔적도 남지 않는 동전던지기로 결정을 했으니 이는 결론을 정해놓았다는 뜻이었다. 한양은 그렇게 조선 수도로 결정됐다.
무학과 정도전, 종말론적 신화
여기까지가 한양이 조선 왕국 수도로 결정된 경위다. 시작은 풍수지리였으나 천도와 재천도 과정에는 도시 기능과 경비 절감이라는 합리적인 기준이 철저하게 작용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백악산과 인왕산을 두고 논쟁을 벌이다 정도전의 백악주산설이 승리했다, 그래서 무학이 “200년 뒤 내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되리라”라고 예언했다’는 이야기는 공식 기록 어디에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무학-정도전 논쟁과 백악주산설은 차천로(1556~1615)가 쓴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처음 등장한다. 임진왜란 후 나라가 피폐해지며 ‘땅 잘못 골라 나라 망했다’는 종말론적인 신화가 양산되면서 생긴 신화라는 것이다.(이태진, ‘한양 천도와 풍수설의 패퇴’, 한국사 시민강좌14, 일조각, 1994) 오히려 한양으로 재천도한 태종은 풍수를 포함한 도참 일체를 불신하며 이를 일망타진하라고까지 선언했다. 그 어떤 기록에도 도읍 결정 과정에 주산 논쟁은 눈에 띄지 않는다. 백악주산설이 근거가 없으니, ‘풍수설에 입각해 설계한 한양의 백악-경복궁-남대문-관악산 축선(軸線)’ 또한 근거가 없다.
도시 괴담과 국가 대토목 사업
그러니 일제에 의해 국가 축이 훼손됐다는 주장 또한 괴담이다. 없는 축이 어떻게 훼손되는가. 사진을 보면 명확하다. 위쪽 ‘육조거리 실측도(1907)’에 붉은 색으로 표시된 육조거리는 21세기 세종대로와 방향이 정확하게 일치한다. 광화문~월대 구간만 서쪽으로 기울었을 뿐, 육조거리 자체는 100년 전과 지금 똑같다. 무슨 훼손이 있었는가. 그 ‘국가 축’이 일제강점기에 확장돼 광화문통이 되었고, 세종대로가 되었다. 2019년 서울시 공모에 당선된 현 광화문광장 디자인도 동일하다.
‘총독관저(大)~총독부(日)~경성부청(本)~조선신궁(天)에 이르는 일제의 축’을 바로잡겠다는 ‘세종광장 조성방안’은 더욱 어이없다. 위 사진을 보면 총독부~경성부청~조선신궁은 이 축에서 동쪽으로 한참 치우쳐 있다. 그런데 총독부와 경성부 청사는 여전히 옛 ‘조선의 축’ 선상에서 그 축 방향으로 건축됐다.
이 세 건물이 일본이 의도한 축이라고 주장하려면 논리와 증거가 필요한데, 두 가지가 다 없다. 조선신궁은 1925년 열 군데 후보지 가운데 선정된 남산에 건설됐다. 입지 선정기준에는 ‘일본의 축' 같은 고려는 없었다. 경성부청은 1923년 남대문 옆 남대문소학교가 부지로 선정됐다가 조선인 유력자들의 반대로 화재로 불탄 경성일보 자리인 현 장소에 1926년 건축됐다. 이들 건물은 식민 수도 도시 공간의 상황적 필요에 따라 실행된 임기응변적 조치의 산물이었다. 식민권력은 조선의 전통 풍수를 정책 대상으로 삼을 만큼 아둔하지도, 방방곡곡 혈맥을 찾아다닐 만큼 주도면밀하지도 않았다.(이상 김백영, ‘상징공간의 변용과 집합기억의 발명’, 공간과 사회 28집, 한국공간환경학회, 2007)
그런데 대한민국 국토교통부는 이를 역사적 근거로 삼아 ‘국가상징거리 조성사업’을 입안하고 실행 중이다. 서울시는 2009년 ‘세종광장 조성방안’을 통해 광장을 만들었고, 동일한 논리로 지금 그 광장을 뒤집어엎는 중이다. 아둔한가? 주도면밀한가? 둘 다인가?
일본군의 유산 ‘국가상징거리’
더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위 사진 한 장에 광화문광장과 국가상징축 복원 작업의 모순이 다 폭로돼 있다. 1945년 9월 4일 미군이 서울 상공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 전투기 꼬리 아래에 총독부가 보인다. 그리고 전투기 아래에 당시 일본군 병영이 보이고, 병영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보인다.
이 길이 바로 조선왕조 내내 백성이 사용했던 후암동 옛길, 두텁바위로다. 지금은 미군 기지 20번 게이트로 막혀 있다. 게이트를 들어가면 남쪽으로 길이 이어지고 동쪽으로 길이 갈라진다. 이 길은 조선통신사들이 한강을 건널 때 걸어갔던 길이다.(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 2021, p115~117) 남향 길 끝은 용산가족공원이다. 동쪽 길 끝은 반포대교다. 일본군이 직선화를 했지만 엄연히 존재했고 존재할 역사다.
통신사와 백성이 걸었던 이 길들은 ‘국가상징거리’ 계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조가 화성 행궁으로 행차할 때 이용했던 옛 용산길(삼각지~원효로 일대)도 없다. 복원할 역사 혹은 미래에서 삭제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한민국의 상징이라는 말인가. 사진 왼쪽으로 서울역과 철길이 보인다. 병영과 철길 사이에 도로가 있는데, 이 길이 1908년 러일전쟁 직후 한국주차군사령부가 만든 현재의 한강대로다. 국토교통부는 이 길을 대한민국 미래를 상징하는 ‘국가상징축 미래 발전 도약 공간’으로 조성 중이다.
도로 끝은 한강대교로 연결되는데 다리 가운데에는 노들섬이 있다. 옛 이름은 중지도다. 1917년 총독부가 다리 지지 시설로 만든 인공섬이다.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이 노들섬을 국가상징축의 상징적 종점으로 설계하고 지난해 콘서트 하우스를 건설했다.
하지만 신용산 근대화는 애초부터 조선과 무관했다. 일본인에 의해 오늘날 용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철도를 따라 서쪽 공간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철길 동쪽이 개발된 것은 일본 군사 기지가 들어서면서부터였다.(신주백, ‘용산과 일본군 용산 기지의 변화’, 서울학연구 29호,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2007)
위에서 던진 질문을 다시 해보자. 아둔한가? 주도면밀한가? 둘 다인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 역사를 복원하려는 강한 의지.’(2007년 11월 서울시장 오세훈, ‘세종로의 비밀: 추천사’, 중앙북스, 2007) ‘3·1운동, 4·19, 1987년 민주항쟁에서 촛불시민항쟁까지 늘 광화문광장이 지키고 있었다.’(2019년 1월 서울시장 박원순, ‘광화문광장 설계공모 결과 발표 기자회견’) <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