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3/끝: 돈덕전 앞 회화나무의 비애

1. 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

2. 국가 상징축과 광화문광장 : ‘국가 상징 거리’ 만든다더니, 일제가 만든 길 그대로…

‘국가상징축’ 회복을 위한 광화문광장 건설 공사는 덕수궁 복원 계획과 연결된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상징축을 복원하는 작업이 광화문광장 공사이고, 덕수궁 복원 사업 또한 ‘일제강점기 동안 훼손, 훼철된 원형 복원’이 목적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외세에 의해 왜곡, 단절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결해 국가 정체성 확립.’(문화재청, ’2005년 덕수궁 복원 정비 기본 계획') 그래서 복원 기준 연대는 1904년 대화재 후 고종 중창 반포 시점인 ‘1907년’이다. 이제 덕수궁 주요 포인트 세 군데만 답사해본다. ‘국가상징축’으로 시작된 광화문광장 100년사는 덕수궁 복원공사에서 극치를 이룬다.

고종과 두 아들 이척(순종), 이은(영친왕:맨 왼쪽 아이가 이은이다). 고종은 독일 군복과 철모를 착용하고 있다. /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p194

[박종인의 땅의 歷史] 258. 돈덕전 앞 회화나무의 비애

기이한 수문장 교대식

조선왕조 518년 동안 덕수궁에 산 왕은 두 사람이다. 처음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망명하려다 이듬해 환도한 선조다. 경복궁이 불타고 사라져 성종 큰형인 월산대군 집을 궁궐로 삼았다. 두 번째는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가 이듬해 환궁한 고종이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덕수궁은 황궁(皇宮)이 되었다. 그 사이 왕들은 창덕궁에 살았다. 광해군 3년(1611년)부터 고종이 퇴위한 1907년까지 296년 동안 덕수궁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었다.

대한제국 군복은 서양식이다. 게다가 고종은 신식 군복 마니아였다. 1900년 육군참장(현 준장급) 백성기는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나라 군복을 꼭 외국에서 사와야 하겠는가?”(1900년 4월 17일 ‘고종실록’) 그 무렵 두 아들 이척, 이은과 찍은 사진 속에서 고종은 독일 군복과 철모를 착용하고 있다.(버튼 홈즈, ‘1901년 서울을 걷다', 푸른길, 2012, p194) 그런데 1996년부터 25년째 그 대한문 앞에서 열리는 수문장 교대식 군사들은 영·정조 시대 군복을 입고 있으니, 황궁 문턱을 넘기 전부터 불편하다.

광무제 고종이 만든 경운궁 석조전. 전통 정전인 중화전과 함께 대한제국 정전으로 예정됐지만, 망국 후에야 완공되고 결국 이왕가미술관 구관으로 이용됐다. 앞 정원은 중화전 행각을 철거하고 1938년에 조성한 정원이다. /박종인

총독부가 만든 ‘황제의 정원'?

황궁 경운궁에는 정전(正殿)이 두 군데였다. 하나는 중화전이다. 1901년 시작된 중화전 건축은 1904년 끝났다. 그해 바로 대화재로 사라진 뒤 2층짜리가 1층으로 축소 재건됐다. 경복궁 근정전처럼 사방에 행각을 짓고 그 내부에 중화전을 재건했다. 방향은 남서향이다.

또 하나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다. 대한제국 선포 7개월 전인 1897년 3월 대한제국 총세무사인 영국인 브라운의 측량으로 시작한 석조전 건축은 한일병합조약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종료됐다. 건물 방향은 정남향이다.

을사조약(1905), 고종 강제 퇴위와 정미조약(1907)으로 제국이 껍데기만 남아 있던 1908년, 조선통감부는 석조전을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했다.(1908년 2월 19일 ‘경성신보’) 이미 망국 전부터 석조전은 신식 정전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실질적으로도 고종은 이 석조전을 연회장으로 이용했을 뿐 집무실이나 침전으로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 나라가 망하고 두 달 뒤인 1910년 10월 석조전이 완공됐다. 이듬해 3월 총독부는 중화전 서쪽 행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외국 대정원을 모방한 대정원(大庭園) 조성 공사를 시작했다.(1911년 2월 28일 등 ‘매일신보’, 이상 김해경 등 ‘덕수궁 석조전 정원의 조성과 변천’,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집 3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5, 재인용)

2021년 현재 석조전 앞 정원은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성됐다. 행각을 철거하고 박석들을 걷어내고 잔디를 심었다. 1938년 3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쓰이는 이왕가미술관 건물이 준공됐다. 신축 건물은 조선 고미술을 전시하는 신관(新館), 석조전은 일본 근대 미술을 전시하는 구관(舊館)이 됐다. 1938년 9월 두 건물 가운데 있는 정원에 십자형 통로를 내고 분수를 설치했다. 석조전 맞은편에는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얹고 등나무를 심고 벤치를 설치했다. 2021년 공화국 시대 덕수궁을 찾는 대한민국 국민이 석조전 정원을 보며 쉬는 그 쉼터가 이 자리다.(김해경 등, 앞 논문)

바로 이 정원을 문화재청은 ‘황제의 정원’이라고 부른다.(‘춘설이 온 날 김경란과 황제의 정원을 산책하다’, 2020년 2월 27일 ‘월간문화재사랑’, 문화재청)

사라진 중화전 행각과 비석

그렇다면 망국 후 총독부가 만든 이 정원은 어찌할 것인가. 총독부가 없애버린 중화전 행각은 어찌할 것인가. 그렇다면 망국 후 광복까지 해마다 온 가족이 총독부에서 180만 엔씩 세비를 받으며 일본 천황가 조선 왕족으로 살았던 고종과 순종을 황제라고 부를 것인가. 그렇다면 ‘외세에 의해 왜곡, 단절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역사를 연결한 국가 정체성 확립’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무엇보다 ‘1907년’이라는 덕수궁 복원 기준연도는 어디로 갔는가. 정원은 총독부 때 일본이 원형을 훼손하고 만든 구조물 아닌가. 총독부가 훼손한 행각은 2005년 첫 복원 계획 때부터 복원이 예정돼 있지만 그 어떤 움직임도 없다.

고종이 내린 시제에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등이 쓴 시를 새긴 비석. 시는 1909년에 썼고 비석은 1935년 덕수궁 정관헌 옆뜰에 세웠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또 그렇다면 정관헌 옆 뜰에 묻혀 있는 비석(碑石)은 어찌할 것인가. 1909년 전 황제 고종을 알현한 전현직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소네 아라스케,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 궁내부대신 비서관 모리 오노리가 ‘일한합방’ 축시를 썼다. 태황제 고종이 내린 시제에 맞춘 시는 이완용의 ‘두 땅이 한집 되니 천하가 봄이라네(兩地一家天下春·양지일가천하춘)’로 끝났다.

1935년 조선왕공족을 관리하는 이왕직사무소는 이 시를 돌에 새겨 문화재청이 ‘고종의 연회 장소’라는(문화재청, 위 같은 글) 조선왕조 역대 왕 어진(御眞) 봉안소 정관헌(靜觀軒) 동쪽 뜰에 세웠다. 비석 뒷면에는 ‘태황제께서 크게 기뻐하였다(大加嘉賞·대가가상)’고 적혀 있었다.(오다 쇼고, ‘덕수궁사(德壽宮史)’, 1938년, p75) 해방 후 땅에 묻은 이 비석은 어찌할 것인가.

쫓겨나는 역사, 400살 회화나무

비가 내리던 1907년 6월 11일 화요일 오후 2시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경운궁을 방문했다. 데라우치는 경운궁 북서쪽 돈덕전 황제와 황태자, 영친왕에게 속사포 4문과 기관포 2문을 진헌했다.(야마모토 시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기’, 이순우,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재인용)

1907년 6월 11일 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에게 대포를 헌상하는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그 부대. 왼쪽 벽면에 회화나무가 보인다. /'日本之朝鮮-일제가 강점한 조선’

돈덕전은 1902년 무렵 대한제국 세관인 해관(海關) 부지에 지은 양식 연회장이다. 한 달 뒤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고종은 강제 퇴위되고 황태자 이척이 황제가 됐다. 황제 등극식 역시 이 돈덕전에서 열렸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이후 돈덕전은 철거돼 놀이터로 변했다. 사라졌던 그 돈덕전은 지금 문화재청이 복원 중이다.

17세기 이후 융희제 순종 즉위까지 그 지난한 역사를 거대한 생명체 하나가 모조리 목격했다. 이 돈덕전 앞에 서 있는 근 400살 먹은 늙은 회화나무다. 덕수궁 내에서 가장 큰 회화나무다. 돈덕전 옛 사진에는 이 회화나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 나무의 가치에 대해서는 2016년 문화재청이 만든 ‘덕수궁 돈덕전 복원 조사 연구’ 보고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다. ‘회화나무의 역사적 가치 보존할 것.’(p263) ‘1670년 식재 추정. 회화나무 유지하여 정면 외부 공간을 조성해야 함.’(p153). 한마디로 노거수(老巨樹)가 담고 있는 역사성을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문화재청에 의해, 저 모든 역사를 한꺼번에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요 체험자인 이 늙은 나무가 곧 13m 전방으로 이사 갈 운명이다. “건물과 맞붙어 있어 그냥 놔두면 생장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2년 전 잔뿌리를 잘라내 이식 준비를 마쳤다.”(문화재청)

근거가 부실한 ‘신축 건물’을 위해 400년을 그 자리에서 늙어온 나무 하나가 몸을 옮겨야 한다. 원래 벽돌식 건물인 돈덕전은 안정성 문제로 일부 철골 프레임 구조로 건축 중이다. 원 설계도면도 없어서 많은 부분은 상상에 의지해 작업 중이다.

노거수가 담고 있는 역사성이 가치로운가, 철골 프레임으로 건축 중인 건물의 역사성이 가치로운가. 회화나무 이식은 그 역사성을 한순간에 짓밟는 행위다. 나무는 그 자체가 문화재다. 저 큰 나무를 옮길 의지라면 제자리에서 충분히 살릴 수 있다.”(환경발전재단 이사장 심왕섭·전 대한전문건설협회 조경식재공사협의회장)

1670년 무렵부터 근 400년을 현 돈덕전 터에 살고 있는 회화나무. 그 오래고 지난한 역사를 목격한 거대한 생명체다. 철골 프레임을 섞어 신축 중인 돈덕전 건물과 맞붙어 있는 탓에, '생장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 터를 떠나 앞쪽으로 이식될 예정이다. /박종인

황당한 ‘고종의 길'

그 돈덕전에서 담장 하나 너머 ‘고종의 길’이 있다.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할 때 이용했다는 길이다. 문화재청은 이 길을 미국 대사관에서 매입하고 25억원을 투입해 고종의 길로 꾸몄다.

한 나라 군주의 도주로를 현창하는 이유도 알 수 없거니와, 1895년 5월 당시 미국공사 알렌이 작성한 주변 실측도를 보면 이 길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당시 이 길은 사방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영국공사관과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한 출입구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미·영·러 3국이 소통하던 길이었다. ‘엄 상궁과 함께 가마에 탄 고종이’ ‘경복궁을 출발해’ ‘이 꽉 막힌 길 담장을 넘어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진입하기는 ‘불가능’했다.

1895년 5월 당시 미국공사였던 H. 알렌이 작성한 미공사관 부근 실측도면. 문화재청에서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 때 이용했다고 하는 '고종의 길'(붉은색)은 영국, 미국, 러시아공사관 출입구를 제외하고는 담장으로 막혀 있었다. 경복궁에서 고종 일행이 이 길을 통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하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고종의 길 복원 공사를 강행했다. 왜? 역사적 사실이 어찌됐든 ‘일본에 저항해 지켜내려 했던 나라 대한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2005년 덕수궁 복원 계획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종은 열국과 긴밀한 외교적 협조를 통해 일제의 교묘한 침략과 음모로부터 벗어나 독립국으로서의 위상을 지켜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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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미 대사관저와 덕수궁 사이에 난 덕수궁길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신작로다. ‘1907년’에는 없던 길이다. 그 북쪽 덕수초등학교 옆에 서울시는 소공원을 만들었다. 소공원에 ‘자엽자두나무’ 다섯 그루가 있다. 서울시는 이 나무를 ‘대한제국의 상징’이라고 했다.(2021년 3월 11일 서울시 ‘덕수궁길 정비’ 보도자료) 눈처럼 하얀 오얏꽃과 중앙아시아 원산인 붉은 자엽자두꽃은 완전히 다른 수종이다. 가짜 오얏꽃은 활짝 피고, 육조거리는 영문도 모르며 파헤쳐지고, 나이테 한 줄 한 줄이 역사인 늙은 회화나무는 쫓겨난다. 500년 고도(古都)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끝>

선원전 터 앞 덕수초등학교 옆에 있는 소공원의 '자엽자두나무'.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오얏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박종인

터무니없는 ‘국가상징축’ 주장

유물 쏟아지는 육조거리

지난 10일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공사 현장에서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고 발표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외국군과 맞섰던 흥선대원군 시절 합참본부 ‘삼군부’ 청사도 실체를 드러냈다. 삼군부가 사라지고 처음 있는 일이다.

광화문광장 복원을 주도한 前 국가건축정책위원장 승효상은 2009년 이렇게 주장했다. “육조거리 위치를 정확히 찾으면 세종문화회관 쪽에 붙게 되는데 이러면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을 볼 수 있다.”(2009년 8월 25일 ‘경향신문’) 2019년 1월 28일 광화문광장 공모 당선작 발표회에서도 심사위원장인 그가 말했다. “육조가로로 쓰였던 곳인 만큼 가운데가 공간이 비워진 곳이어서 유물이 없다. 다만 육조를 형성했던 관어가의 담장 부분은 기초가 발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땅을 파보니 담장 정도가 아니라 삼군부 행랑과 다른 건물터들이 튀어나오는 중이다. ‘원래 육조거리’라고 그가 주장한 공간이 텅 빈 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서울의 정확한 옛 축’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한산~북악산~관악산을 이은 소위 '국가상징축'.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진 이유가 있다. 광화문광장 공사 배경에는 ‘정도전의 백악주산론’이 있다. 600년 전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 도읍지와 궁궐을 북한산~북악산~관악산 축을 기준으로 설계했다는 이론이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삼각산과 관악산을 잇는 직선상에 경복궁을 축으로 놓습니다. 경복궁을 맨 앞으로 그 뒤로 육조거리, 남대문이 이어지도록 말이죠.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 축을 틀어버렸습니다.”(승효상, 2013년 1월 ‘월간 디자인’ 인터뷰)

터무니없다. 그런 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도에 북한산~북악산~관악산을 잇는 직선을 그어보면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그 축에서 동쪽으로 비껴나 있다. ‘정도전 한양 도시 계획’은 선 하나만 그어 봐도 알 수 있는 괴담이다. 기록상으로도 정도전-무학대사 신화는 임진왜란 이후 탄생한 전설에 불과하다.

지난달에도 승 전 위원장은 이렇게 썼다. ‘정도전이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연결선 위에 경복궁을 두고 광화문 앞의 길을 넓혀 양옆에 관아를 설치하면서 육조거리라는 광장 같은 길이 나타났다. 이곳은 오늘날 국가의 축으로도 상징성을 가지며 우리 모두에게 깊이 인식되어 있다.’(2021년 4월 21일 ‘경향신문’)

지도 한 장과 역사적 기록이 말해준다. 있지도 않은 축(軸), 그래서 일제에 의한 훼손 자체가 불가능한 축을 복원하겠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터무니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