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에서 남들 다 아는데 혼자 모르는 낭패감 혹은 혼자만 아는 사실을 떠벌리며 대화를 주도하는 통쾌함. 낭패를 막고 쾌감을 얻는, 알면 재미있고 몰라도 행복한 ‘박종인의 땅의 잡사’> - 오늘은 조금 묵직한!
일본과 악연은 실체적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고려 민심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 토벌 작전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구체적인 계기다. 그리고 200년 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한번 거덜나고 또 300년 뒤 일본에 의해 나라가 사라졌다. 이 길고 긴 악연. 1920년대 총독부 경상북도경찰부는 이렇게 기록했다. ‘폭도의 봉기와 만세소요는 임진왜란 후 실제로 배양돼 온 배일사상에서 연유하고 있음이 명백하다.’(경상북도경찰부, ‘국역 고등경찰요사’(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3), 25p) 그래서 가위바위보도 일본한테는 이겨야 한다는 말이 돌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한일 축구전 대표단에게 “지면 돌아오지 말라”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이 악연을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사실 뒤에 뜻밖의 일들이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리미엄 독자들과 함께 이 비밀의 문을 열어보자.
1591년 3월 3일 히데요시 저택
인도에서 온 예수회 사절단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저택을 방문했다. 교토에 막 완공된 저택 이름은 주라쿠다이聚樂第다.
일본 측이 제공한 말과 가마를 타고 사절단이 주라쿠다이로 행진했다. 인도 청년이 양산을 들고 말을 몰았고 포르투갈 기수가 뒤를 따랐다. 226대 교황 그레고리오13세가 준 금빛 테두리 장식의 빌로드 외투를 걸친 20대 특별 수행단 4명도 끼어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들은 포르투갈 사제단이 아니라 위풍당당한 인도 사절단이었다.
주라쿠다이는 기와에 금박을 둘렀고 건물 사방에는 해자가 설치돼 있었다.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청결한 넓은 방에서 이들은 히데요시를 만났다.(루이스 프로이스) 의전이 오가고, 젊은 수행단이 유럽 고악기古樂器 클라보, 아르파, 라우데, 라베키냐를 연주하며 성가를 노래했다. 연주가 끝나고 히데요시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구나.” 일본인! 그것도 20대 청년들! 아름답고 화려한 유럽식 제복을 입은 그들이 일본 청년들이었다.
유럽으로 떠난 아이들
이들 이름은 이토伊東 만쇼, 지지와チチ石 미켈레, 하라原 마르티노, 나카우라中浦 줄리아노. 열두세 살에 유럽으로 떠나 8년 반 만에 성인이 되어 돌아온 덴쇼견구소년사절단天正遣歐少年使節團이었다. 1582년 기리시탄 다이묘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가 교황 접견을 목적으로 파견한 소년들이다. 그때 예수회 순찰사였던 발리냐노가 적극적으로 후원해 이뤄졌다.
1582년 2월 20일 오무라를 떠난 이들은 2년 6개월 만인 1584년 8월 11일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마카오, 믈라카, 고아를 거쳤고 리스본 이후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당시 세계 최고 권력을 누리던 펠리페2세를 만났다.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 베로나를 거치며 교황 그레고리오13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585년 3월 24일 성베드로성당으로 가는 행렬에는 기병대 300명이 호위를 했고, 축포가 200발 넘게 울렸다. 나가우라 줄리아노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 행렬에는 다른 소년 3명만 참가했다. 예수를 찾아갔던 동방박사 3명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가끔 지지와는 엄마가 만든 주먹밥을 먹고 싶다고 울기도 했고, 하라는 천연두를 앓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 국왕, 제후들도 이들을 초청했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다. 순찰사 발리냐노는 최대한 조용하게 다니라고 당부했지만, 황금의 나라 지팡구에서 온 소년들은 어딜 가든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소년들은 로마시의회로부터 명예 로마시민권과 귀족 작위를 받았다. ‘지팡구 왕자들’에 관한 소문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1585년 한 해에만 유럽 전역에서 이들에 관한 보고서가 48권이 쏟아졌다. 종교개혁 이후 위축됐던 교회 권위가 동쪽에서 온 젊은 기독교도들에 의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일정을 마친 이들은 구텐베르크 식 활판인쇄기 한 대와 유럽지도와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왔다. 1586년 4월 13일 리스본을 떠난 배는 4년 항해 끝에 마카오를 거쳐 1590년 7월 21일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바테렌들은 모조리 추방됐고 기리시탄은 앉을 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듬해 이들을 앞세운 예수회 신부들이 히데요시와 재회한 것이다. 히데요시 접견을 기다리는 동안 이들은 기리시탄 다이묘 고니시 유키나가 집에 묵었다. 재회하던 그 순간 히데요시와 발리냐노는 말없이 건배를 했고 히데요시는 발리냐노에게 은 100냥, 성인이 된 소년들에게는 5냥씩 선물했다.
조선만 몰랐던 전쟁
예수회 사절단이 히데요시를 접견하기 넉 달 전인 1590년 11월 7일 조선통신사가 똑같은 대저택 같은 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방문 전 부사 김성일을 제외한 일행은 평복을 입었다.
‘왜국 경계에 들어가자 상사와 서장관은 왜인의 가마 타기를 좋아하였으나, 공(김성일)은 반드시 예복을 갖추고 다녔다. 국도에 이르러서도 상사와 서장관이 평복을 입고 들어가려 하자 공이 말했다. “왕명을 받들고 나와서 예복을 입는 것은 왕명을 공경하는 일이다. 다른 나라 도성에 들어가면서 예복을 입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상사와 서장관이 따르지 않아 공만 홀로 예복을 입었다. 그날 왜도倭都 남녀들이 구경하러 많이 나와서 궁녀宮女들과 고관高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궁궐 앞에 모였는데, 모두 부사副使(김성일)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손을 맞잡아 예법대로 공경을 다하였으나 상사와 서장관에 대해서는 보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서장관이 비로소 후회하였다.’(해사록, ‘김성일 행장')
접견 나흘 뒤 국서가 전달됐는데, “글이 오만하고 ‘한걸음에 대명국大明國으로 들어가겠다’느니 ‘귀국이 앞잡이가 되어 입조入朝해 달라’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크게 놀라 의리에 의거하여 거절하였다.” 1591년 3월 25일 귀국한 정사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난다”고 했다. 결국 선조는 마음 편안하게 해주는 부사 김성일 판단을 취했다.
그 해 9월 12일 히데요시는 인도 부왕 앞으로 편지를 썼다. “반드시 중국 왕국을 정복하리라 결심하였다.” 이미 오다 노부나가가 한 번, 1586년 히데요시가 또 한 번 공포했던 전쟁이었다.
히데요시는 즉각 16만 대군으로 군단을 편성했다. 군단에는 가토 기요마사 1만 명, 고니시 유키나가 7000명, 오토모 6000명, 아리마 2000명, 오무라 1000명 등 규슈 지역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그 중심에 섰다. 1592년 4월 700척의 대선단으로 조선 남부, 부산을 쳤다. 히데요시 군단 명부에 편성된 다이묘들 총 40명 중 25명이 기리시탄 장군이었다.
세상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가톨릭 신부도 알았고 일본 다이묘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신부들은 전쟁을 돕겠다고도 했다. 그 신부들과 같은 때 같은 공간에서 조선 엘리트들은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그런데 조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 바보였거나 무능했거나 아니면 둘 다였거나.
아이들이 유럽으로 떠난 1582년 10월 조선 퇴역 공무원 이이李珥가 선조에게 올린 ‘진시폐소陳時弊疏’에는 개국 200년 만인 조선 경제가 이렇게 표현돼 있다.
‘200년 겹겹이 쌓인 나라가 지금 2년 먹을 양식도 없다.’
二百年積累之國 今無二年之食(이백년적루지국 금무이년지식)
동래로 귀국한 통신사 일행을 선위사 오억령이 맞이했다. 동행했던 일본 승려 현소가 오억령에게 말했다. “내년에 길을 빌어 명나라를 침략하겠다.” 오억령이 즉각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놀란 조정에서는 오억령을 해임해버렸다.(億齡聞蘇明言來年將假途 入犯上國 卽具以啓聞 朝議大駭 卽啓遞之·억령문소명언래년장가도 입범상국 즉구이계문 조의대해 즉계체지, 1591년 3월 1일 ‘선조수정실록’)
문명사가 충돌한 임진왜란
도도하되 막지 못할 강물이 조선에서 과격하게 만났다. 대항해의 시대, 코페르니쿠스의 과학과 군사기술과 자본이 만난 사건이 임진왜란이었다. 흐름을 역행했던 폐쇄 왕국 조선은 국민과 국토가 망가졌다.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깃발은 십자가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았을 때 고니시는 가톨릭 교리에 따라 할복자살을 거부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 쇄국鎖國은 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
조선이 쇄국을 고집하는 동안 나이 어린 일본 소년들이 인도양을 건너 바티칸에서 신을 만나고 있었다. 유럽대륙에서는 이들 신인류를 반기는 행사가 곳곳에서 열렸고, 성인이 되어 금의환향한 소년들은 히데요시로부터 자랑스럽다는 환대를 받았다. 그들이 환대를 받는 그 순간 조선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성리학적 아집과 세계관에 사로잡혀 정세를 읽지 못한 것이다. 일본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에 와 있던 세계를 읽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언제 일본으로 왔는가. 서기 1543년, 정확하게는 1543년 9월 23일이었다.<다음편에 계속> /선임기자(‘매국노고종’, ‘대한민국징비록’, ‘땅의 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