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경복궁 앞 월대의 복원은 조선 시대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화합하던 상징적 공간의 복원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서울시장 오세훈, 2021년 4월 27일 ‘긴급브리핑’) 현 서울시장이 말하는 ‘경복궁 앞 월대’는 광화문 월대를 뜻한다. ‘조선 시대’ ‘왕과 백성의 소통 공간’을 복원하겠다는 뜻이다. 월대(月臺)는 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 건물 앞에 설치된 넓은 기단을 말한다.
역사를 복원하는 작업은 숭고하다. 숭고하려면 역사적 사실(事實)에 부합해야 한다. 이건 어떤가. ‘세종은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하고 광화문 월대 공사를 윤허하지 아니하였다.’(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3. 그때 광화문 앞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1431년 세종의 농번기 특별대책
조선 왕국은 농업 국가였고 농업은 사대부 사회의 필수적인 경제 기반이었다. 춘분부터 추분까지 농번기에는 농사에 방해가 되는 잡스러운 소송까지 금지했다. ‘경국대전’에는 모반, 불경, 불효, 내란 따위 소위 10대 중범죄와 강력범죄를 제외한 소송은 농번기에는 법적으로 금지였다. 무정무개(務停務開), ‘농사에 방해될 업무를 정지하고, 농사가 끝나면 재개한다’는 원칙이다.
그 ‘농번기’를 두고 말이 많다가 세종 때 춘분~추분 사이를 농번기로 정했다. ‘무정무개법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니, 임금이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으로 한정지었다.’(1431년 3월 19일 ‘세종실록’) 넉 달 뒤 세종은 ‘농민에 한해’ 이 원칙을 적용하라고 일렀다.(1431년 7월 14일 ‘세종실록’)
춘‧추분 무정무개법을 정하고 열흘 뒤 예조로부터 “광화문이 누추하니 월대를 만들겠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러자 세종은 즉시 이를 불허했다. 이유는 ‘농번기 민력 동원 불가'.(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월대, 과연 있었는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월대’를 검색하면 단 한 번도 광화문 월대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경희궁 숭정전 같은 궁궐 정전 월대만 나온다. 광화문 월대는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 문화재청 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세종 때 조성된 월대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판단되며,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광화문과 함께 다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 ‘경복궁 광화문 월대 및 동·서십자각 권역 복원 등 고증조사 연구용역 보고서’, 문화재청, 2018, p45) 이 ‘추정의 근거’라고 인용한 기록이 바로 이 글 앞쪽에 있는 ‘세종실록’ 기록이다. 다시 한번 읽어본다.
‘예조판서가 아뢰기를, “광화문 문밖에 섬돌이 없어서 관리들이 문 지역까지 타고 와서야 말에서 내리니 타당치 못하나이다. 그리고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곳을 낮고 누추하게 버려두는 것은 부당하니 계단과 둘레를 쌓고 안바닥을 포장해 한계를 엄중히 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은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불과 열흘 전 송사마저 농사에 해가 된다고 금지했던 왕이었다. 당연히 월대를 만들겠다는 보고는 일고의 여유도 없이 기각됐다. 실록에 따르면, 월대 공사 보고서 기각 19일 만인 4월 18일 ‘광화문이 이룩되었다(光化門成‧광화문성).’(1431년 4월 18일 ‘세종실록’)
이 기사가 문화재청 보고서에 나온 ‘세종 때 조성된 월대’의 유일한 근거다. ‘세종이 공사를 금했다’는 기록이 ‘월대를 만들었다’는 근거인가? 실록에는 19일 뒤 광화문이 완성됐다고 기록돼 있는데, 문화재청은 ‘이때 월대도 완성됐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실록을 포함한 각종 고문서는 물론 그 어떤 고지도에도 광화문 월대는 보이지 않는다.(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 앞 보고서, p69) 문헌만 아니라 땅에서도 근거가 나오지 않았다. 2011년 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고종 연간 월대 기단석 하부, 태조 연간 층위에서 잡석이 일부 확인되었다. 20x30x25㎝ 크기의 잡석이 4~6개가량 월대 기단 석렬에 맞춰 확인됐으나 조사 면적의 한계로 태조 연간 월대 시설의 흔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국립문화재연구소, ‘경복궁 발굴조사 보고서’, 2011, p82)
태조 연간, 그러니까 경복궁 건설 때 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도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월대 시설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단하기에 무리가 따른다’는 문장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세종로 쪽으로 확장 조사가 가능할 때 선대 유구에 대한 추가 조사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조사를 실시한 뒤에 복원 여부를 결정하는 게 순서라는 뜻이다.
백성과 소통했던 공간이라고?
인간이 하는 일이니, 실록 사관(史官)이 ‘세종이 다시 공사를 허가했다’라는 사실을 잊어먹고 기록하지 못했다고 상상해본다. 문제는 또 있다. 과연 그 월대가 왕이 백성과 소통했던 공간인가?
‘광화문과 월대는 원래 하나의 건축물로서 월대는 광화문의 얼굴이며, 월대 복원은 왕도정치와 시민주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역사적 가치와 화합·통합의 미래적 가치를 담는 상징적 표현임.’(2020년도 문화재위원회 9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광화문 월대는 행사용 무대와 같은 기능으로 사람들에게 구경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었다는 점에서 금단의 영역인 궁궐과 백성의 거주지 사이를 연결해 주는 역할로 의미가 있다.’(명지대 보고서, p47)
과연 그랬을까. 기록을 보면 그리 소통의 공간은 아니었던 듯하다.
“금후로는 광화문에 부녀자들 출입을 금하고, 영제교 뜰과 근정전 뜰에도 또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1431년 12월 10일 ‘세종실록’)
‘(세종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와 (영빈 강씨 소생 6남) 화의군 이영이 야밤에 여자 둘을 광화문을 통해 궁으로 들여보내다가 적발됐다. 두 왕자는 방면하고 두 여자는 장 100대를 치고 제주 관비로 쫓아버렸다.’(1441년 8월 12일 ‘세종실록’)
‘광화문 밖에서 산대(山臺‧’산디'라고도 읽는다) 놀이를 봤는데, 본래 이는 중국 사신을 위한 잡희가 아닌가.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라.’(1545년 4월 27일 ‘인종실록’) 보름 뒤 이 산대가 무너져 군중 수십 명이 깔려 죽었다. 세 살 난 주인집 아이를 업고 온 노비도 죽었다.(1545년 5월 11일 ‘인종실록’) 군중을 동원해 광화문 앞에서 벌인 접대용 매스게임을 금하라는 명이었고, 결국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는 기록이다.
요절한 인종 다음 왕인 명종은 명 황제 칙서를 들고 귀국한 사은사를 그 광화문 밖까지 나아가 맞이했고(1555년 7월 11일 ‘명종실록’), 임진왜란 발발 직후 북쪽으로 달아난 선조와 관료들을 보면서 백성은 경복궁에 난입해 궁궐을 불태웠다.(1592년 4월 14일 ‘선조수정실록’) 전후 경복궁을 중건하는 공사에 그 백성이 투입됐는데 ‘겨우 벌목을 시작했을 뿐인데도 산골 마을에는 도망하여 떠도는 자가 즐비한’ 참담한 일이 벌어졌다.(1606년 11월 7일 ‘선조실록’)
경희궁에서 근 20년을 살았던 영조는 창덕궁에 들렀다 돌아오며 ‘흥화문에 이르러’ 백성의 상언을 받아들였다.(1744년 9월 9일 ‘영조실록’) 영조는 또 광화문 밖에 유생 수천 명을 모아놓고 “오늘 상소를 하면 불문에 부치되 앞으로는 역률(逆律‧역적죄)로 다스린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모인 유생들 리스트를 작성한 뒤 어린 유생에게 구두 시험을 치고 성적 불량자는 대사성(大司成‧성균관 관장)에게 매를 치게 했다.(1770년 4월 5일 ‘영조실록’)
49년 동안 존재했던 월대, 100년 동안 있었던 길
1760년대 ‘도성대지도’에는 그 당시 경복궁이 그려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은 폐허가 돼 있다. 목조 건물은 다 불탔지만 석조물은 대개 살아남았다. 주춧돌, 기둥 같은 석재다. 경회루는 돌기둥 몇 개만 남고 사라졌다. 이런 폐허 장면은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똑같이 묘사돼 있다. 이 지도 속 광화문을 본다. 광화문은 아치형 홍예문이 세 개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돌로 만든 홍예문은 그대로인데 지붕을 포함한 위 목재 구조물은 오른쪽(동쪽) 지붕만 남고 사라져 있다.(월대는 표시돼 있지 않다. 이 지도에 그려진 창덕궁 돈화문과 경희궁 흥화문 월대도 표시돼 있지 않다.)
‘광화문 월대’라는 단어 자체가 기록에 등장한 시기는 고종 3년인 1866년이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해 중건한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궁 안에서 짊어지고 온 잡토가 4만 여 짐에 이르렀다.’(국역 ’경복궁 영건일기'1 1866년 3월 3일, 서울역사편찬원, 2019, p404). 이 ‘영건일기’는 경복궁에 남아 있던 옛 석재와 목재를 재활용할 때는 반드시 재활용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근정전 앞 문무품 품계석 각 12개는 헐어버린 간의대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는 식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2 1867년 10월 9일, p334) 그런데 ‘광화문 월대 완성’ 기록에는 월대 자리에 있었어야 할 옛 석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재활용할 부재가 없었다는 뜻이다.
이 월대는 백성을 위한 공간도 아니었다. 사진에서 드러나듯, 경복궁 담장 동서로 육조 건물이 붙어 있고 그 가운데에 월대가 들어서 있다. 궁장과 육조 건물 사이 비좁은 골목에서 월대 남쪽 끝까지 우회해야 동서 통행이 가능했다. 백성이 함부로 지나갈 수 없었던, 조선왕실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월대 복원을 진행 중인 서울시는 1923년 광화문 앞 전차 선로 개설과 함께 월대가 철거됐다고 추정한다.(서울시, ‘광화문광장 개선 종합기본계획’, 2018)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1915년 총독부가 경복궁에서 개최한 ‘조선물산공진회' 사진에는 이미 월대가 공진회용 가구조물 받침대로 사용되고 있다. 실질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1866년에 신설돼 짧으면 49년 길면 57년 동안 존재했던 구조물 복원을 위해 100년 넘게 존재했던 도로가 사라지는 것이다.
과연 고종 이전 조선시대에 월대는 존재했었는가. 복원에 앞서 조사는 이뤄졌는가. 과연 왕과 백성이 소통하고 화합하던 상징적 공간인가. 근거는 무엇인가. 광화문 앞 도로를 T자형 및 Y자형으로 순차 재구조화, 광장 조성 및 월대 복원 사업 예산은 국비 290억 원과 서울시비 738억 원, 합계 1028억 원이다.(2020년도 문화재위원회 9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이래서 사실에 근거한 명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