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흩어져 있는 토역(討逆) 기념비
경기도 안성 낙원동에 있는 공원 이름은 안성낙원역사공원이다. 이곳에는 안성 도처에서 가져온 각종 공덕비가 모여 있다. 공원 한 켠 관리실 옆에는 부러진 팔을 시멘트로 보수한 부처님이 앉아 있는데, 그 옆에는 큼직한 비석이 서 있다. 새겨져 있길, ‘朝鮮國四路都巡撫使吳公安城討賊頌功碑(조선국 사로도순무사 오공 안성 토적 송공비)’. 오명항이라는 사람이 안성에서 역적을 토벌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영조 20년인 1744년에 세웠다.
저 남쪽 경북 성주 예산리 탑거리에도 비석이 모여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성산기공비: 인평부원군 충정 이공 무신기공비’다. 무신년 역적 퇴치에 공을 세운 이보혁을 기리는 비석이다. 세운 해는 정조 8년인 1784년이다. 또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황강을 내려다보는 경남 합천 함벽루 근처에도 비슷한 비석이 있다. 정조 14년인 1790년에 세운 이 비석 이름은 ‘합천군무신평란사적비(陜川郡戊申平難事蹟碑)’, 1728년 무신년 합천군에서 벌어진 역란(逆亂) 평정 기념비. 원래는 대구에도 같은 비석이 있었는데 일제 때 사라졌다. 그 비석 이름은 ‘평영남비(平嶺南碑)’, 영남 평정 기념비(1780년).
전국을 들쑤시며 일어난 이 반란 사건은 1728년 벌어진 ‘이인좌의 난’이다.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영조 집권 초기, 정권의 비정통성에 반기를 든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의 무장 권력 투쟁이었다. 대실패로 끝난 이 반란은 결과적으로 노론 영구 집권으로 이어졌고, 그 잔당이 벌인 일이 ‘나주 괘서 사건’이었다. 그 처리 과정에서 보인 영조의 광기는 지난주 본 바와 같다.(‘땅의 역사 264.남대문에서 폭발한 영조의 광기’ 참조) 수사 기간 1년 동안 궁궐 마당을 250명에 이르는 사람들 피로 물들인, 조선왕조 최대 역모(逆謀)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역사] 265. 1728년 이인좌의 난과 도래한 노론 천하
온건 소론의 집권과 급진 소론의 불만
‘이복형 경종을 독살하고 노론과 함께 왕위에 오른 권력자.’ 영조에게 따라다니던 꼬리표였다. 지금은 야사(野史)로 취급받기도 하지만, 1724년 영조 즉위 당시 목숨을 걸고 대립하던 노론과 소론, 남인에게 ‘경종 독살설’은 권력 쟁취를 위한 제일의 명분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과 함께 권력을 잡은 서인(西人)은 숙종 때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됐다. 영남을 기반으로 한 남인 세력은 권력에서 배제됐다. 그때 서인은 ‘우리 사림(서인)을 중용하자(崇用山林‧숭용산림)’고 밀약했다.(남하정, ‘동소만록(1740?)’, 원재린 역, 혜안, 2017, p302) 이후 권력은 서인 내부 노론과 소론 사이를 오갔다. 영조대에 이르러 노론 권력이 공고화되고, 조선 말까지 변함이 없었다.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한다’는 탕평책은 사실상 말뿐이었다. 그 굳은 정치 질서가 붕괴될 뻔한 사건이 이인좌의 난이었다.
1724년 노론과 연합해 권좌에 오른 영조는 3년 뒤 거듭된 노론의 간섭을 물리치고 소론 온건파를 정계에 복귀시켰다. 정미환국(丁未換局‧1727)이라고 한다. 경종 독살설을 진실로 믿고 있던 소론 강경파는 만족하지 않았다. ‘소론 세력을 다 죽이자’는 노론 강경파에 대한 경고였을 뿐, 영조 권력 기반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니까.
반란 세력은 남인 이인좌가 지휘한 급진 소론‧영남 남인 연합 세력이었다. 1728년 3월이다. 이들은 소현세자 증손자인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 전국에서 반란군을 일으켰다. “노론이 거사해 소론을 모조리 죽이기 전에 제압하기 위해”(1728년 3월 20일 ‘영조실록’) 선수를 친 것이다.
대기근과 부패, 흉흉한 민심
마침 전국을 덮친 대기근도 이들에게는 반역을 위한 호기(好機)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1725년 김제에서 어떤 아낙이 “부엌 안에 개를 묶어놨으니 개 줄을 잡아당겨 죽여서 잡아먹자”고 한 뒤 부엌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윽고 그녀가 신호를 보내니, 남편이 문밖에서 줄을 잡아당겨 개를 죽였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 최후의 만찬 메뉴였다. 그런데 부엌에 들어가니 개는 없고 아내가 죽어 있었다.(1725년 11월 3일 ‘영조실록’) 기근이 낳은 비극이었다. 굶주려 도적이 된 백성이 즐비했지만 수령 열 가운데 여섯, 일곱은 땅을 사고 새 집 짓는 데 여념이 없었다.(1728년 1월 11일 ‘영조실록’)
그해 3월 반역 보고가 올라오자 영조가 이리 말했다. “백성들 고통이 거꾸로 매달린 듯한데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헤아려 난동을 일으키는구나.”(같은 해 3월 14일 ‘영조실록’) 이인좌 무리는 민심을 잡기 위해 ‘신역을 감면하고(除役減役‧제역감역)’ ‘고을 수령은 죽이지 말고(不殺邑倅‧불살읍쉬)’ ‘백성은 단 한 명도 죽이거나 겁탈하거나 재물을 빼앗지 말라’고 반란군에 명을 내렸다.(같은 해 3월 25일 ‘영조실록’)
나라 절반이 역적이 되었다
경남(경상우도)와 호남, 충청에서 동시다발로 거병한 반란군은 순식간에 경기도 안성까지 북상했다. 충청에서는 남인 이인좌가, 경상에서는 남인 조성좌와 정희량, 호남에서는 소론인 태인현감 박필현이 지휘했다.
한마디로 ‘난적(亂賊) 토멸과 종사(宗社) 안정을 위해 문관과 무관, 남인·소북(小北)·소론을 막론하고 동시에 거의한’ 조선 왕조 최대 규모 반란이었다.(같은 해 3월 26일 ‘영조실록’, 박필현 심문) 난을 진압한 뒤 노론이었던 영남 안무사 박사수 또한 영조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나라 절반이 역적이 돼 버렸나이다(半國爲逆‧반국위역).”(같은 해 4월 24일 ‘영조실록’)
반란 첩보가 올라온 그해 3월 14일, 이미 한성 나루터들은 몰려드는 피란민으로 길이 막혔다. 이미 반란군과 정보를 교환한 도성 내 소론들이 난리를 피하려 몰려간 것이다.(3월 14일 ‘영조실록’) 3월 15일 이인좌 군이 청주성을 접수했다. 19일과 20일 정희량과 박필현이 군사를 일으켰다.
온건 소론이 앞장선 토벌 작전
한성 진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3월 17일 뜻밖에도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이 토역을 자처했다. 영조는 즉각 이를 수용하고 역시 소론인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했다.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 오명항은 ‘경기도 직산으로 출정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며 경기도 안성에 부대를 매복시켰다. 이인좌 군이 직산을 피해 안성에 접근할 때까지 오명항은 ‘코를 골며 자는 척하다가 거리가 1백여 보가 될 무렵에야 신기전을 쏘며 적을 물리쳤다.’(같은 해 3월 23일 ‘영조실록’) 체포된 이인좌는 현장에서 능지처사됐다.
오명항은 경상도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던 박문수와 성주목사 이보혁과 합류해 정희량 부대를 격파했다. 현직 현감이 거병했던 호남 또한 한 달이 못 돼 진압됐다. 한 줌 반정세력이 주도한 중종반정(1506)‧인조반정(1623)과 달리 나라 절반이 가담한 초대형 반란이었지만, 결국 실패였다. 4월 19일 사로도순무사 오명항이 남대문으로 개선했다. 영조는 남대문 문루에 올라 이들을 맞이했다. 오명항은 황금투구를 쓰고 붉은 갑옷을 입고서 반군 지휘관 정희량, 이웅보, 나숭곤의 목을 상자에 담아 영조에게 헌괵(獻馘‧목을 바침)했다. 이미 엿새 전 서울로 보내와 소금에 절여 훈련도감 화약고에 보관돼 있던 목들이었다. 영조는 이 목들을 장대에 걸라고 명했다.(같은 해 4월 19일 ‘영조실록’)
도살장으로 변한 창덕궁
‘무신역옥추안’은 무신란에 가담한 반란군 심문 기록이다. 난 발발 직후인 1728년 3월 16일부터 1729년 3월 24일까지, 전사자 및 즉결처형자를 제외한 중죄인 291명 명세가 적혀 있다. 이들은 창덕궁을 위시한 궐내에서 열린 추국청 조사를 받았다. 영조가 직접 심문하기도 했다. 신분을 보면 사회 개혁보다는 권력 쟁취가 주목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291명은 사대부 173명, 군관 6명, 중인 10명, 평민 4명과 노비 12명, 미상 86명이었다.
영조는 무자비했다. ‘경종 독살 혐의’라는 역린(逆鱗)을 건드린 반역자들이었다. 이 249명 가운데 159명이 죽었다. 능치처사형으로 48명, 참수형으로 24명, 교수형으로 3명이 처형됐다. 조사가 조금이라도 더디면 영조는 “이 무더운 날에 7~9회까지 심문하는 건 무능한 일이니 더 엄히 심문하라”고 독려했다.(‘무신역옥추안’ 8책 7월 9일, 고수연, ‘무신역옥추안에 기록된 무신란 반란군의 성격’, 역사와 담론 82, 호서사학회, 2017, 재인용) 결국 사망자 가운데 절반이 넘는 84명이 ‘물고(物故)’ 됐다. 고문사(拷問死)했다는 뜻이다.
벼슬길 막힌 영남 남인들
반역향으로 낙인찍힌 영남은 오래도록 벼슬길이 막혀버렸다. 영조는 “영남은 본디 추로(鄒魯‧공자와 맹자)의 땅이므로 차별 없이 등용하라”고 선언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반란 평정 5년 뒤 공신 박문수는 “탕평이 이름은 있고 실적이 없다”고 비판했다.(1733년 12월 19일 ‘영조실록’) 이듬해 이조판서 송인명은 “영남인은 벼슬 추천을 받아도 등용이 안 된다”고 보고했다.(1734년 11월 11일 ‘영조실록’)
반란 17년 뒤인 1745년 영조가 문득 이리 물었다. “지금도 영남인은 백의(白衣)를 입고 재를 넘는 자가 없는가?” 영남 심리사 김상적이 이렇게 답했다. “영남인들 소원은 일개 진사(進士)가 되기에 그칩니다.”(1745년 5월 13일 ‘영조실록’) 벼슬 없이는 죽령을 넘지 않는 콧대 높은 영남 사람들이 벼슬길이 하도 막혀서 진사나 되는 게 소원이라는 것이다.
인조~경종 연간 당색별 당상관 배출 인원은 서인 76%, 남인 13%, 북인 11%였다. 그런데 영조~정조 연간에는 노론 81%, 소론 14%, 북인 4%, 남인 1%였다. 이후 순조~고종 때는 노론이 83%, 소론 12%에 북인은 3%이며 남인은 2%였다.(차장섭, ‘조선후기 벌열연구’, 일조각, 1997, p182~183, p276) 노론 천하였다. 그 아득한 세월 동안 노론은 전국 각지에 토역(討逆) 기념비를 세웠다.
* 동영상은 유튜브 https://youtu.be/B7EBewzrHws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