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땅의 역사 266. 안동별궁에서 벌어진 오만 가지 일들’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1624년 인조가 국가 보유 기와와 목재로 정명공주 저택을 신축하려 하자 사간원에서 이리 비판했다. “재목과 기와는 자식을 팔고 지어미를 잡혀(賣子貼婦·매자첩부) 고혈(膏血)을 짜낸 끝에 나온 것이다.”(1624년 6월 9일 ‘인조실록’)’
‘자식을 팔고 아내를 저당 잡혔다(賣子貼婦·매자첩부).’ 전쟁 포로도 아니고 납치해온 이웃마을 개똥이도 아닌, 자기 아들과 아내를 팔아 세금을 메꿨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포함해 가족을 팔아 노비(奴婢·奴는 사내, 婢는 계집종을 뜻한다)가 된 사람들을 자매노비(自賣奴婢)라고 하고 그 계약문서를 자매문기(自賣文記)라고 한다. 그 기가 막힌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自賣文記)
고려에서 조선까지 노비 약사(略史)
고려는 귀족 국가였다. 노비 노동력은 귀족 권력 기반 가운데 하나였다. 엄마가 노비면 아비가 양인이어도 자식은 노비였다. 왕실과 귀족이 얼마나 노비에 집착했나 하면, 몽골 지배하에서도 노비를 포기하지 않았다.
총독부쯤 되는 원나라 정동행성 평장 활리길사(闊里吉思)가 “부모 가운데 한쪽이 평민이면 자식은 평민으로 하자”고 건의했어도 “고려 옛 법은 그렇지 않고, 법은 절대 바꾸지 못한다”고 거부했을 정도였다.(‘고려사’ 권108, 열전21, 김지숙) 원나라는 5대 황제 쿠빌라이 세조 이래 ‘불개토풍(不改土風)’ ‘고려의 풍습은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땅의 역사 135. 고려 대몽항쟁과 세조구제(世祖舊制) 참조)
부모 양쪽 노비 세습이라는 악풍을 부계(父系)만 따르도록 개혁한 사람은 조선 3대 국왕 태종이었다. 1414년 6월 27일 예조판서 황희 건의에 따라 태종이 이리 선언했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 본래 천민은 없었다. 이제부터 노비 여자가 양인(良人)에게 시집가 낳은 자식은 모두 양인이다.”
그 종부법(從父法)을 종모법으로 환원시킨 사람은 세종이다. “(질서를 파괴하는) 양민과 천민이 서로 관계하는 것을 일절 금지시키되, 범법할 경우 그 소생들은 공노비로 삼도록 하자.”(세종) 그러자 대신들은 “낳은 자식들을 (국가가 아니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자”고 역제안했다.(1432년 3월 25일 ‘세종실록’)
어느 쪽이 됐든 양인과 노비 사이 혼인은 불법이 됐고, 그 불법행위로 생긴 자식은 노비가 됐다. 1485년 조선 정부는 ‘경국대전’을 반포하며 이를 성문으로 규정했다. ‘천민 자식은 어미를 따른다(從母役·종모역). 만일 천민 남자와 양민 여자 사이에 아이를 낳으면 아비를 따른다(從父役·종부역).’(‘경국대전’ 권5 형전, 공천조(公賤條)) 마치 하늘에서 그물이 떨어진 듯, 노비 부모를 가진 사람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는 노비였다.
자기를 파는 사람들
그래서 노비는 노비였다. 주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생존을 보장받는 대신 인신의 자유와 존엄(尊嚴)을 박탈당한 존재였다. 실록은 이들을 천민(賤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저 천구(賤口)라고 부르기도 했다.
양민을 팔려는 유혹도 노비로 팔려가려는 유혹도 늘 존재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양민을 노비로 삼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양민을 노비로 팔다가 적발되면 장 100대에 3000리 유배형이 기다리고 있었다.(대명률강해 권18, 298조 ‘약인약매인·略人略賣人') 자기 자손을 노비로 팔면 80대 장형에 아내를 팔면 남을 판 범죄와 동일하게 100대 장형에 3000리 유배형을 당했다.
세종이 즉위하고 넉 달 뒤 시강관 정초(鄭招)가 경연장에서 이리 말했다. “우리나라 백성 생계가 아내를 팔고 자식을 파는 처지에는 이르지 않았나이다.” 세종이 이리 답했다. “어찌 곤궁한 사람이 없겠느냐.” 세종이 이리 덧붙였다. “내가 궁중에서 나고 자랐으므로, 백성 살림이 힘들고 고됨은 다 알지 못한다.”(1418년 12월 20일 ‘세종실록’)
애민(愛民)으로 무장한 지도자였지만, 백성의 삶은 그리 쉽게 굴러가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30년이 되지 않은 세종 즉위년에는 상상할 수 없던 ‘가족 판매’ 행위가 임진왜란이 끝나고 가족을 팔아서 세금을 내는 상상 초월 사태로 확대된 것이다.
가족과 자기 몸을 노비로 파는 계약서를 ‘자매문기’라 하는데, 18세기 정조 때 작성된 관용 문서양식집 ‘유서필지(儒胥必知)’에는 ‘비문권(婢文券)’이라는 제목으로 이 자매문기 양식이 포함돼 있을 정도로 가족 판매가 일상화됐다.(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범죄가 있기 때문에 법이 있고 처벌이 있는 것이다. 인신의 자유와 존엄을 포기하면 생존이 보장되기에 가족과 자기 자신을 노비로 파는 일이 빈번해졌고, 그러기에 관용 서식집에도 이 자매문기가 공식적으로 포함됐다. 처벌은 법전에만 남았다. 그 서글픈 군상이 이 지면에 있는 자매문서들에 그려져 있다.
다섯 냥짜리 여자 안낭이(安娘伊)
‘건륭 21년 병자 2월 20일 조세희 앞으로 글로써 밝힙니다. 죽음의 세월을 살아낼 방도를 찾을 수 없고 험난하고 즐겁지 않지만 노모를 살릴 방도 또한 없습니다. 부득이 다섯 냥을 받고 제 몸을 팔겠습니다. 또 이후 자식이 생기면 아이 또한 영원히 노비로 팔겠습니다. 만약 훗날 이에 대해 말이 나오거들랑 이 문서를 관아에 제시해 바로잡을 일입니다.’
조선 영조 32년인 서기 1756년 봄이 올 무렵, 안낭이(安娘伊)라는 여자가 자기를 노비로 팔았다. 문서에 따르면 안씨는 양인 여자(良女·양녀)다. 그런데 ‘죽음의 세월에 살 방도가 없어서’ 스스로 남의 집 노비가 되는 길을 택했다. 늙은 어미를 봉양할 방도가 없었다. 몸값은 ‘다섯 냥’이었다. 그리고 향후 어찌어찌하여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 또한 ‘영영 노비로 판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기에 그녀는 오른손을 종이에 대고 그려서 서명을 대신했다. 김씨 성을 가진 유생이 문서를 작성하고 본인이 서명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21788)
이 문서에서 나오는 ‘글로써 밝힌다(明文)’ ‘이 문서를 관에 제시해 바로잡는다(持此文告官 卞正事)’ 따위 문구는 자매문서 공통으로 보이는 서식이다.
서른 냥짜리 정일재 가족
‘건륭 51년 12월 22일 최생원 댁 노비 유성 앞에서 문서로 밝힙니다. 흉년을 당해 팔십 노모를 부양할 방도가 없기로, 마흔 먹은 아내와 스무 살짜리 둘째아들 창운, 열여섯 먹은 셋째딸 흥련과 열두 살 먹은 아들 용운, 여덟 살인 다섯째 용재, 세 살 난 창돌이를 각각 다섯 냥씩 그리고 뒤에 태어날 일곱째 아이까지 노비로 영원히 파나이다.’
정조 10년인 서기 1786년 정일재라는 사내가 온 가족을 최생원 집에 노비로 팔았다. 이유는 ‘흉년에 노모 봉양 불가’. 아내 배 속에 있는 일곱째 아들까지. 문서에는 정일재 본인을 재주(財主), 물건 주인이라고 적었다. 문제가 있으면 관에서 바로잡는다는 문구도 보인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800)
1793년 정월 아기연이(阿其連伊)라는 양인 여자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흉년(大殺年)에 기근과 역병이 만연해 명을 보전 못 할까 두려워(飢饉癘疫塡壑迫·기근려역전학박) 본인과 13세 맏아들 용복, 여섯 살 먹은 딸 초래를 25냥에 팔고, 뒤에 낳을 자식들도 모두 영원히 노비로 팔았다. 아기연이의 남편 원차세와 아이들 삼촌 원명순이 증인으로 계약에 참석했다.(규장학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40391)
복쇠 부부, 박승지 댁 노비가 되다
‘빚을 갚을 도리가 없어 서른아홉 먹은 소인 박종숙은 본인과 마흔두 살 먹은 아내 구월이, 서른 살짜리 첩 시월이와 여섯 살짜리 맏아들과 세 살배기 둘째를 노비로 팔겠나이다.’ 건양 원년 11월에 작성한 이 자매문기는 ‘첩까지 둔’ 박종숙이라는 사람이 온 가족을 노비 시장에 내놓겠다는 문서다. 문서에는 누구 손인지는 불명인 손바닥 세 개가 그려져 있다. 건양 원년 11월은 1896년 11월이다. 고종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살해된 직후 만든 문서다. 증인도 없고 노비로 구매한 사람도 없다.(대전시립박물관 소장 자료)
도광 2년 11월 서른두 살 먹은 복쇠(福釗)는 스물여덟 먹은 자신과 아내 복섬(福譫)이를 박승지 댁에 팔았다. 자식은 기록에 없다. 생활고가 이유였다. 이 또한 조건은 ‘영영 노비로 판다’였고 가격은 스물다섯 냥이었다. 문서에는 복쇠 본인 글씨인 듯한 필체로 복쇠와 복섬 이름이 적혀 있고 누군가의 손바닥이 가로로 누워 그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번호 ‘접수 2972-18’) 도광 2년은 1822년, 순조 22년이다. 한 해 전 조선 팔도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흉년이 겹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정조 이후 구한말까지 ‘엄청나게 많은’ 자매문서가 박물관과 역사 관련 기관에 보관돼 있다.
망국까지 이어진 자매(自賣)
대한제국이 건국되고 4년째인 광무 4년(1900년) 재금(再金)이라는 여자가 열 살 난 딸 간난이(干蘭伊)를 윤 참판 댁에 팔았다. ‘이 작은 계집은 지아비를 잃고 빚이 수백 금이라 부득이 열 살 난 여식 간난이를 오백 냥에 윤 참판 댁에 영원히 팔려 하오니 훗날 족친 가운데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오리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79)
이듬해 조봉길이라는 사내는 ‘살길이 없어’ 여섯 살 먹은 딸 완례를 윤 참판 댁(간난이가 팔려간 그 윤 참판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에 당오전 일천냥에 팔았다. 당오전이니까 200냥이다. 조봉길은 현금 대신 찰벼 다섯 섬, 메벼 네 섬, 츄모(?) 한 섬 해서 10석을 받았다. 재금이도, 조봉길도, 자기 딸 간난이와 완례를 ‘영원히’ 노비로 판다고 계약했다.(규장각학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0583)
그리고 어느 겨울날 최씨 성을 가진 여자가 열 살짜리 자기 딸 간난이를 노비로 팔겠다고 내놓았다. ‘긴급히 사용하기 위해(緊用次·긴용차)’라 적어놓았으니 급전이 필요했던 듯하다. 그녀가 딸에게 매긴 몸값은 362냥53전이었으니, 이게 빚 규모가 아니었을까. 문서에는 최씨 손바닥만 그려져 있을 뿐 간난이를 사간 사람도 증인도 없다. 거래 불발. 최씨가 간난이를 내놓은 때는 망국 1년 전인 대한제국 융희 3년, 1909년 음력 11월 한겨울이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86981)
인륜을 저버린 금수(禽獸)였을까. 가족 판매에 증인이 됐던 아기연이(阿其連伊) 남편 원차세는 무능한 본인을 탓하며 가족에게 살길을 열어준 건 아닐까. 노비를 둘러싼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주 계속>
* 유튜브 https://youtu.be/Vf8PT_5hvjM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