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ZjIPU56hxvQ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71년 12월 10일 서울 동국대학교 정문으로 쓰이던 황건문(皇建門)이 해체되고 학생회관이 신축됐다. 해체된 황건문 부재는 충청남도 부여에 있는 고찰 무량사(無量寺)가 사들였다. 무량사는 세조 계유정난 이후 세상을 떠돌던 김시습이 죽은 절이다. 김시습 부도가 무량사에 서 있다.

세월이 지나 무량사 보살들과 승려들도 모두 바뀌어, 이제는 그 목재를 어느 건물에 사용했는지 알지 못한다. 동국대학교에는 황건문 주춧돌이 어딘가 남아 있다고는 하나, 쉽게 찾지 못한다.

황건문은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 고종이 평양에 만들었던 궁궐 ‘풍경궁(豐慶宮)’ 정문이다. 평양에 있던 그 문이 서울로 왔다가 고찰(古刹)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0. 시대착오의 상징 평양 풍경궁

1906년의 기이한 살인사건

1906년 1월 10일 ‘대한매일신보’에 따르면 대한제국 육군 참령(소령)이자 평북 의주군수 신우균이 군부대를 동원해 민간인 가족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기사는 이러했다. ‘의주군수 신우균씨가 의주군 광성면에 사는 김택간을 풍헌으로 삼아 향록전을 거두게 하니, 백성이 모두 풍경궁 공사가 끝났는데 향전은 어디 쓸 것인가 하며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하여 징세가 불가능한지라. 군수가 풍헌을 잡아들여 장 30대를 친 뒤 얼른 돈을 거두라 한즉 김택간이 풍헌에서 사퇴해버렸다. 군수가 대로하여 순사를 보내 김택간을 체포하라 했으나 순사가 백성에게 저항하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와 다른 데로 날라버렸다고 하더라. 군수가 분노하여 군부대 박동수 참위(소위)와 상의해 병정 10명을 보내니, 병정이 밤에 택간의 집에 들어가 총으로 택간 머리를 쏘고 아이 두 명과 6촌 한 명을 사살했다더라.’(1906년 1월 10일 ‘대한매일신보’) 왜 군수 신우균은 불필요한 공사비를 거두려 했으며 김택간은 이를 목숨을 걸고 거부했을까.

세 가지 겹경사와 평양 행궁

광무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5년이 지난 1902년 여름, 황태자 이척이 황제에게 이리 상소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세 가지 경사가 겹쳤나이다. 폐하가 51세가 되시고 등극하신 지 40년이 되었고, 망육순(望六旬·60세를 바라보는 나이)을 맞아 기로소(耆老所·국가 원로 예우 기관)에 드시니 이 세 경사야말로 천 년에 제일 큰 경사요 천년의 행운입니다.”(1902년 8월 4일 ‘고종실록’)

열두 살에 왕이 된 고종이 쉰한 살이 되었고 등극한 지 40년이 되어서 기로소에 들었다. 한 가지 일에 세 가지 의미를 붙여 천년간 최대 경사라며 황태자는 여러 가지 경축 이벤트를 내놓았다. 이미 거듭 올라왔던 그 청에 떠밀려, 고종은 존호(尊號)를 받고 국내외 귀빈을 불러 파티를 했다.

그런데 더 큰 이벤트는 이미 진행 중이었다. 석 달 전인 5월 1일 특진관 김규홍이 이렇게 상소문을 올렸다.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수도를 두 군데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재결을 바랍니다.” 고종은 ‘깊이 생각한 뒤’ 닷새가 지난 5월 6일 조령을 내렸다. “요즘에는 외국도 수도를 두 군데 세우고 있다. 기자(箕子)가 정한 천년 도읍지로, 예법과 문명이 시작된 평양에 행궁을 세우라.” 그리고 이리 덧붙였다. “백성이 모두 바라고 기꺼이 호응하는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나라의 천만년 공고한 울타리로 삼겠다.”

그해 굶주린 경기도 백성이 교하에 있는 인조릉 장릉(長陵) 송림을 침범해 껍질을 벗겨 먹었다. 솔숲에는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황현, ‘매천야록’ 3권 1902년 15. 경기도의 기근, 국사편찬위) 8일 뒤 고종은 “당장 경비가 궁색하다고 해서 그대로 둘 수 없다”며 황실 자금인 내탕금 50만 냥을 내려보냈다.

1903년 12월 1일 평양성 객사를 떠나 풍경궁으로 가는 고종 부자 초상화 행렬을 그린 어진예진서경풍경궁봉안반차도(御眞睿眞西京豊慶宮奉安班次圖) 부분. 왼쪽 가마에 고종 초상화가 실려 있다. /부산시립박물관

고종 부자 초상화

다음 날 고종은 행궁을 만들려는 구체적인 목적을 털어놓았다. “어진(御眞)과 예진(睿眞)을 서경에 봉안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다 말하였다.”(이상 1902년 5월 1일, 6일, 14일, 15일 ‘고종실록’) 어진은 고종 본인 초상화를, 예진은 아들인 황태자 이척 초상화를 말한다. 그러니까 평양 행궁은 임금 본인이 행차하기 위한 궁궐이기에 앞서 자기네 부자(父子) 초상화를 모시는 궁궐이라는 것이다.

6월 7일 황명에 따라 그 황제와 황태자 초상화가 임시로 평양 관사(객사)에 봉안됐다. 6월 23일 궁궐 명칭이 풍경궁(豐慶宮), 정문 이름은 황건문(皇建門)으로 결정됐다. 9월 17일 황제 초상화(어진)와 황태자 초상화(예진)을 운반하는 행렬이 평양으로 출발했다. 일주일이 지난 9월 24일 행렬이 객사에 도착했다. 행렬 규모는 300명이었다.

평양 행궁 공사가 한창이던 10월 19일 대한제국 법궁 경운궁(덕수궁) 정전인 중화전이 완공됐다. 고종이 선언했다. “이렇게 해야만 임금의 지위가 더없이 엄하여 존귀함과 비천함의 구별(尊卑之別·존비지별)을 보일 수 있느니라.”(1902년 10월 19일 ‘고종실록’)

러시아를 향한 풍경궁(豐慶宮)

‘기자가 문명을 가져온’ 평양에 행궁을 짓는 일은 ‘요와 순 임금의 예악과 법도를 이어받은 대한제국’ 황제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다.(1897년 10월 13일 ‘고종실록’ 대한제국 선포문)

외교적으로는 ‘인아책(引俄策)’, 친러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친러로 외교 노선을 바꿨다. 대한제국 초기 군사고문, 재정고문과 총세무사는 모두 러시아인이었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잇따라 주최한 만민공동회에서 ‘러시아 축출’을 들고나와 주춤해졌지만, 대한제국은 이후로도 친러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0년 3월 30일 대한제국은 마산을 러시아 군함 기항지로 조차해줬다.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으로 진출한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대립하던 영국에도, 만주를 놓고 갈등하던 일본에도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런 극도로 긴장된 국제 정세 속에서 평양 행궁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평양은 러시아식으로 편제된 지방군, 진위대 주둔지였다. 을미사변 같은 정변이 터지거나 국내에서 러일 충돌이 발생하면 평양은 고종이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이기도 했다.(장영숙, ‘대한제국기 고종의 풍경궁 건립을 둘러싼 제인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03, 2020)

역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막중한 이 공사를 맡은 사람은 평남관찰사 민영철이었다. 1902년 6월 10일 고종은 민영철을 서경감동당상(西京監董堂上)에 임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서도(西道) 백성이 흉년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니 방책을 상의하고 조치를 취하여 백성이 힘들고 지치지 않게 하라.”

공사비의 출처, 백성

풍경궁은 총규모 360여 칸짜리 대형 궁궐이었다.(1927년 3월 16일 ‘조선일보’) 터는 평양성 외부 기자묘 옆이었다. 고종은 이를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내탕금 100만냥을 내려보냈다.

1903년 10월 주요 전각이 완공됐다. 그런데 백성에게서 거둬들인 공사비 장부 ‘평안도향전성책’에 따르면 내탕금 100만냥을 제외한 풍경궁 총공사비는 1005만1368냥이었다. 이 가운데 소위 ‘향례전(鄕禮錢)’이 673만1368냥, ‘원조전(援助錢)’이 나머지 332만냥이었다. 평양 백성이 분담한 금액만 120만냥에 달했다.(김윤정, ‘평양 풍례궁의 영건과 전용에 관한 연구’, 부산대 석사논문, 2007) 향례전은 평남북 향안(鄕案)에 등록된 양반에게 부과된 돈이다. 향록전이라고도 한다. 원조전은 가구와 토지당 부과된 돈이다.

향례전과 원조전 1000만 냥을 당시 원(圓)으로 환산하면 200만원이다. 1902년 대한제국 세입예산 758만원의 26%다. 한 나라 예산 4분의 1을 백성을 털어서 궁전 건축에 투입한 것이다. 고종이 내려준 내탕금 100만냥은 1000만냥이 넘는 총공사비 10%에 불과한 착수금 정도였다.(이영호, ‘향인에서 평민으로’, 한국문화 63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3) 고종은 “기꺼이 동원된 백성들이 가상해” 2년 동안 이 지역 토지세 증가분의 3분의1을 깎아주라고 명했다.(1903년 1월 18일 ‘고종실록’)

그해 11월 6일 태극전과 중화전이 완공되고 14일 객사에 임시봉안돼 있던 황제 부자 초상화가 각각 태극전과 중화전에 봉안됐다. 12월 10일 봉안을 맡은 의정부 의정 이근명이 보고했다. “병정들이 소와 말을 빼앗고 재물을 노략질하며 부녀자들을 겁박하고 있다. 잡세가 번다해 100리도 안 되는데 세금을 거두는 곳은 열여덟 곳이나 된다.” 고종이 답했다. “여전히 그렇다고? 그중에는 반드시 올바른 세금(正稅·정세)도 있을 것이다.”(1903년 12월 10일 ‘고종실록’)

사천왕문에서 바라본 부여 무량사. 사천왕문을 비롯해 이 절 어디엔가 풍경궁 흔적이 숨어 있다. /박종인

식민지, 그리고 황건문의 이건

나라가 사라지고 1927년 ‘조선일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풍경궁은 광대한 건물인데, 건축비로 실상 사용된 금액은 인민으로부터 공취된 총금액의 5분의1밖에 되지 않는다 하며 대다수는 민영철, 김인식, 궁내부 기타 중간 협잡배의 배를 채웠으니 평안남도의 피폐는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하였다.’(1927년 3월 16일 ‘조선일보’) 민영철은 평남관찰사 겸 공사 총책임자였고 김인식은 평양감리였다.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풍경궁 공사는 미완으로 종료됐다. 이후 일본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풍경궁은 식민시대 병원으로 전용됐다. 1924년 그 정문인 황건문이 일본 사찰인 경성 조계사 정문으로 이건됐다. 그때 신문 기사는 이러했다. ‘몇백만 민중의 원망 덩어리요, 몇몇 대감 배에 기름을 찌우게 한 원한의 기념각이 황건문이다.’(1924년 9월 4일 ‘조선일보’) 광성면민 김택간 가족 학살 사건은 끝나지 않은 탐학(貪虐)의 결과였다.<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