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튜브 https://youtu.be/pBHbecmKWNE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06년 4월 15일 대한제국 황제 광무제가 조령(詔令·천자의 명령)을 내렸다. “듣자니 태학(성균관)이 황폐하여 책을 끼고 다니며 공부하는 선비들을 보기가 드물다고 하니 짐은 대단히 안타깝다. 시급히 건물을 수리하고 뛰어난 선비들을 집결시킴으로써 우리의 도를 빛나게 하라.”(1906년 4월 15일 ‘고종실록’)
고종이 야심 차게 건설하던 평양 풍경궁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군 병영으로 전용됐다. 러일전쟁 승리로 일본은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점령했다. 1905년 11월 17일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다섯 달이 지난 이듬해 봄날 대한제국 황제가 내린 조령이 ‘성균관 부활’이었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282. 평양 풍경궁③/끝 망국까지 성리학에 집착한 고종
황태자 이척의 재혼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졌다. 그달 대한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의정서’를 맺었다. 대한제국 전역을 일본군 군사 용지로 내준다는 협정이다.
전쟁 와중인 1904년 11월 5일 황태자비 민씨가 죽었다. 이듬해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실질적인 일본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넉 달 뒤인 1906년 3월 16일 대한제국 전역에 금혼령이 떨어졌다. “(재혼할) 황태자 가례(嘉禮)를 가을과 겨울 사이에 행하겠으니 13세부터 20세까지 처자들은 금혼(禁婚)하라.”(1906년 3월 16일 ‘고종실록’) 12일 뒤인 3월 28일 가례를 전담하는 예식원 장례경 김사철이 황제에게 이리 보고했다. “간택단자(揀擇單子)를 봉입하는 날짜가 서울에서는 오늘이 마감 날인데 들어온 단자가 여덟 장밖에 없습니다. 허다한 사대부 집안에 적령한 처녀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듯한데 보잘 것이 없습니다.” 고종이 화를 냈다. “도리상 이럴 수 없다. 내부대신을 견책하라. 그리고 처녀가 있음에도 단자를 올리지 않은 자들은 탐문해 벌을 주라.” 나흘 뒤 황제가 다시 한번 조령을 내렸다. “거듭 재촉한 지 며칠이 지났거늘 아직 보잘 것이 없구나. 놀라운 일이다. 조정 명을 무시하고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이게 무슨 도리인가. 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버릇이 너무나 통탄스럽다. 다시 엄히 일러 일일이 간택단자를 올리라.”(1906년 4월 1일 ‘고종실록’)
조선왕조 500년에 유례없는 일이었다. 도무지 ‘도리(道理)’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차였고 위를 무시하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단순한 왕(王)이 아니라 황제의 며느리 황태자비가 아닌가.
어렵사리 후보에 오른 처녀들을 상대로 석 달이 지난 그해 7월 4일 초간택이 이뤄졌다. 통상 보름 정도 걸리던 재간택은 근 석 달 뒤 열렸다. 역시 보름~20일 뒤였던 최종 삼간택 또한 석 달 뒤에야 이뤄졌다.
혼례는 참으로 제국다웠다. 최종 간택된 그날, 미래의 황태자비인 윤택영의 딸 윤씨는 곧바로 가례도감이 설치된 안동별궁으로 모셔졌다. 1907년 1월 24일 안동별궁에서 황태자와 혼례를 치른 황태자비는 경찰 112명과 군인 418명이 호위하는 가운데 경운궁으로 가서 태자비에 책봉됐다. 황태자비는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서봉대수장(瑞鳳大綬章)을 받았다. 여자에게만 주는 훈장이다.
땅에 떨어진 ‘도리’와 황제
1873년 친정을 선언한 이래 고종에게 ‘도리(道理)’는 늘 입에 달고 사는 화두였다. 아버지 대원군을 권력에서 내몰고 그가 시행하던 각종 정책을 적폐로 몰아 청산할 때도 ‘나라에만 이익이 되고 백성에게는 해가 된다(利於國而害於民·리어국이해어민)’(1873년 12월 1일 ‘승정원일기’)는 도리를 들어 청산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도리는 철저한 성리학적 도리였다. 외적으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事大) 제후요 내적으로는 만인에게서 떠받음을 받으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여탈할 수 있는’(‘1894년 11월 24일 이노우에 가오루와 대화’, 주한일본공사관기록 5권 5.기밀제방왕2 (12)내정개혁을 위한 대한정략에 관한 보고) 군주이길 원했다.
대원군 섭정 시절인 1871년 고종은 명나라 황제 3명을 모신 창덕궁 대보단에서 이렇게 읊었다. ‘於赫皇恩幾百年(오혁황은기백년·혁혁한 황제 은혜가 수백 년 내려오니) 我家大義昭如日(아가대의소여일·우리 가문 대의는 해처럼 빛나네)’.(고종, ‘대보단친향일유감·大報壇親享日有感’, 1871, ‘주연집’)
이게 ‘제국에는 수도가 둘이어야 한다’며 평양 풍경궁에 집착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황실 돈에는 인색하고 백성 돈 1000만냥을 투입해 ‘곧 남에게 빼앗길’ 궁궐을 만든 근본 이유였다. 하루하루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그가 하필이면 대규모 궁궐 공사를 국가 생존 방안으로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아래 기록에 나와 있다.
1899년 - 황제밖에 없는 ‘대한국 국제’
1898년 10월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가 종로 거리에서 ‘만민공동회’를 주최했다. 이 토론회에서 ‘입헌군주정’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고종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부추겨 현혹시키는 거짓말 집단”이라며 “패역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모두 잡아들이라”라고 명했다.(1898년 11월 6일 ‘고종실록’) 12월 25일 독립협회는 전격 해산됐다. 이듬해 8월 17일 고종 명으로 대한제국 헌법이 탄생했다. 모두 9조인 이 ‘대한국국제’는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한 1조를 제외하고 8개 조 전문이 황제의 권리와 황민의 의무를 규정했다. 황제의 의무와 황민의 권리 규정은 없었다.
1899년 - 유교를 국교로 만들라
독립협회 해산 후 한 달이 지났다. 1899년 1월 광무제 고종은 전주에 있는 전주 이씨 시조 묘에 조경단이라는 제단을 세웠다.(1899년 1월 25일 ‘고종실록’) 그리고 석 달 뒤 고종이 13도에 이리 유시하였다. “세계 만국에서 종교를 높이고 숭상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정사를 잘 다스리는 방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어째서 존중되지 않고 그 실속이 없는가? 우리나라 종교는 우리 공부자(孔夫子) 도가 아닌가?” 고종이 이리 덧붙였다. “(도가 없기에) 욕심은 하늘에 넘치고 윤리는 퇴락하니 난신과 역적이 뒤따라 나와 변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고종은 그날 초야에 숨은 선비들을 성균관으로 모시도록 성균관을 개혁하라고 명했다.(1899년 4월 27일 ‘고종실록’)
한 달 뒤 고종은 삼척에 있는 이성계 5대조 무덤을 준경묘라 명명하고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명했다.(같은 해 5월 25일 ‘고종실록’) 준경묘는 조선 건국 이래 묘를 찾지 못해 500년 동안 수색 작업을 벌였던 조상 묘였다. 고종은 바로 그해 몇 달 사이에 조상 묘를 찾아내고 성리학을 국교로 선언한 것이다.
1902년 - 주자 후손을 특채하라
1902년 5월 6일 고종이 “기자가 정한 천년 도읍지 평양에 제2수도를 세우라”고 명했다. 1902년은 고종이 만 12세로 등극한 지 40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스스로 황제가 된 지 5년이 되던 해였다. 그해 가을 고종은 성리학을 체계화한 송나라 주희 후손들에 대한 특별 대우를 명했다. 대륙에서 송·원 교체기에 고려로 망명 와 숨어 살던 주자 후손들을 발굴해 특채하라는 명이었다.
“현자를 높여서 후손을 등용하는 것은 본래 이 나라 법이다. 주자 증손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그 후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오랑캐가 두려워 본관을 바꿨던) 후손들을 신안 주씨로 회복해주고 그 후손들을 무시험으로 중용하라.”(1902년 음력 9월 10일(양력 10월 11일) ‘승정원일기’)
1906년 - “성균관에서 어진 선비를”
나라가 망해도 완전히 망한 그 1906년 봄날, 문득 황제가 조령을 내린다. 초라한 숫자의 처자들만 황태자비 후보에 올라 있던 그 즈음이었다. “본왕조는 도리를 존중하고 교육을 급선무로 여겨 성균관을 먼저 세웠다. 그 도리를 부흥시키는 방도를 서둘러 강구하라.” 1906년 4월 15일, 을사조약 5개월 뒤였다. 나라는 간 곳 없는데 도리를 빛나게 하라고, 황제가 명한 것이다.
‘의견을 낸다는 핑계로 국시(國是)를 뒤흔드는 상소를 한 자들을 징계하라’며 상소 금지령을 내렸던 황제였다.(1894년 음력 12월 16일 ‘고종실록’) 귀를 닫은 그가 행한 국정은 ‘역대 유례가 없는 전제정이었고 유교 숭상 논리는 황제 자신을 중심으로 충군(忠君)과 애국(愛國) 신민을 만들겠다는 의도의 표현에 불과했다.’(도면회, ‘대한국국제와 대한제국의 정치구조’, 내일을 여는 역사 17,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2004)
버려진 경복궁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만인의 반대 속에 강행된 평양행궁 풍경궁은 타국 병영으로 변해 있었다. 도리는 어디로 갔는지 행방불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