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사상(思想)과 실천(實踐)을 겸비한, 우리나라의 대표 지식인이다. 1950~60년대 당시 한국 문제를 주제로 외국에서 학위를 받던 상당수 유학생들과 달리, 그는 19세기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Tocqueville) 연구로 7년 만에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2년 기준 86세인 노재봉 전 국무총리는 지금도 '실천적 공부'의 끈을 계속 붙잡고 후학 제자들과 정례 공부 모임 등을 하고 있다./조선일보DB

1967년부터 88년까지 서울대학교 사회대 외교학과 교수 시절, 동서고금과 한국을 종횡(縱橫)하는 그의 국제정치학 강의는 타교 학생들까지 와서 듣는 최고의 명강의였다. 1988년말부터 1991년까지 청와대 정치특보, 비서실장, 국무총리로 봉직한 그는 14대 국회의원(1992~95년·비례대표)으로 활동했다.

2005년 서울디지털대 총장에서 물러나 야인(野人)으로 있는 그는 지금도 ‘실천적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2022년 새해 벽두인 1월 3일 낮, 기자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에 있는 노재봉 전 총리의 개인 연구실을 찾았다. 90㎡(약 27평)쯤 규모의 공간은 수 천여권의 외국 원서들로 가득한 작은 도서관이었다. ·

19세기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사상가인 알렉시스 드 토크빌(오른쪽, 1805~1859년)과 존 스튜어트 밀(왼쪽, 1806~1873년). 당시 새로운 시대정신이 된 자유·평등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고민한 두 사람은 길이 남는 명저를 낸 뒤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해 정치에 투신했으나 현실 정치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조선일보DB
노재봉 전 국무총리의 저서 <시민민주주의>. 정치학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가필한 책으로 1975년과 1980년에 각각 초판과 재판이 나왔다./송의달 기자

◇“인터넷 검색...새벽 2~3시까지 공부”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거의 매일 이곳으로 나와 철학과 사상 관련 책과 자료를 읽고 사람을 만난다. 2012년 시작한 제자들과 공부 모임도 매주 1회씩 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론적으로 규정해 보는 모임이다. 집에서 긴장해 공부하다 보면 종종 새벽 2~3시를 훌쩍 넘긴다.”

- 최근 인상적으로 읽으신 게 있다면?

“며칠 전 미국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Politico) 기사를 읽던 중, 링크를 따라가다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다룬 독일TV의 다큐멘터리 동영상 2편을 봤다. 제작진이 동남아 해안을 돌며 취재했는데, ‘일대일로’의 문제점과 현지 반응 등을 생생하게 잘 짚고 있더라.”

미국에 맞서서 유라시아 대륙 지배를 목표로 하는 중국의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프로젝트에서 육상연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국-유럽 열차. 사진은 중국 동부 연안 장쑤성의 롄윈항(连云港)에서 카자흐스탄 알마티(阿拉木图)까지 개통한 열차이다. 알마티에서 다시 독일 북부 항구도시 함부르크까지 이어진다./조선일보DB

- 고령(高齡)인데 인터넷을 직접 사용하시는가?

“당연하다. 서울대 명예교수 신분이다 보니 내 연구실에서 인터넷으로 서울대 도서관에 접속하면 외국의 최신 학술저널들을 맘껏 검색해 읽을 수 있다. 좋은 내용은 인쇄해서 다시 정독한다.”

◇“올 3월 대선은 한국의 존재이유 결정짓는 분수령”

- 두달 후인 올 3월 20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보시나?

“대한민국 존재이유가 유지될 것인가, 소멸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문재인 정권을 계승하는 측이 승리하면, 대한민국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반대라면 일단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2022년 3월9일 실시되는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한 후보 중 지지율 순위 3강(强)인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후보(왼쪽부터)/조선일보DB

- ‘대한민국의 존재이유가 사라진다’는 지적은 무슨 의미인가?

“‘개인’과 ‘자유’의 문제이다. 두 개념은 한반도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 생겼다. 북한에는 지금까지 존재해 본 적도 없다. 문재인 정권은 출범후 두 가지를 줄기차게 없애려 했다. 올 3월 대선에서 문 정권을 따르는 후보가 당선되면, 자유와 개인이 더 빨리 사라지고 한국의 존재이유도 소멸되어갈 것이다.”

- 문재인 정권의 4년 7개월을 평가한다면?

“건국 후 대한민국 발전의 생명줄이자 원천인 해양문명 세력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고 대륙 중국과의 밀착을 꾀해 오고 있다. 그 결과 해양세력인 미국, 일본과 소원해져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한반도 적화(赤化)통일 노선을 바꾸지 않은 북한에 대해서는 ‘평화 환상’에 빠져 스스로를 무장해제했다.”

◇“文 정권, 자유 없는 ‘노예의 평등’ 추구해”

노 전 총리는 “현 정권의 핵심 기조는 평등”이라며 “하지만 자유가 없는 ‘노예의 평등’(equality of slavery)과 자유가 살아있는 ‘자유의 평등’(equality of liberty)은 하늘과 땅 만큼 다르다”고 했다.

- 지금 정권도 ‘법(法)’으로, 다수결로 통치하지 않나?

“‘법치’(the 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the Rule by Law)는 외관상 비슷해도 엄연히 다르다. 공산당 일당독재국가도 ‘법에 의한 지배’를 한다. 문 정권은 법치를 하는 게 아니다. ‘법’이라는 수단을 악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 전 총리는 이렇게 말했다.

“역대 정부는 도로·항만 같은 기간산업으로 국가의 역할을 한정하고 민간 기업들이 세계로 나가 경쟁하며 힘을 키우는 자조(自助·self help) 전략을 취했다. 덕분에 시민사회와 관료 조직이 성장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이 시민단체들을 관변(官邊)화함으로써 국가 권력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방법도 없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식에서 ‘국민통합’과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조선일보DB

-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후퇴시킨 것인가?

“대한민국이 70년여 이룬 성장과 힘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비해 도약할 기회를 맞았으나 문 정권은 그것을 차버렸다. 또 국민의 잠재력을 활용하기는커녕 그것을 죽이는 방향으로 시종일관 갔다. 지배권력 집단이 한국의 세계사(史)적 위상과 문명사적 사명(使命)을 파악하지 못하고 거꾸로 잘못된 방향을 잡은 탓이다.”

◇“한국은 세계적 ‘자유와 야만’ 투쟁의 전초 국가”

- 우리나라의 세계사적 위상은 무엇인가?

“식민지를 경험한 신흥국가들 중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한국은 아프리카,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이 본보기를 삼는 모범적인 모델이다. 정치적으로도 한국은 자유·민주·인권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뤘다.”

- 대한민국의 ‘문명사(文明史)적 사명’이라면?

“대한민국은 지도상으로 보면 작은 나라이지만 유라시아 대륙과의 관계에서는 ‘작은 거인(巨人)’이다. 우리 주변 대륙은 중국, 러시아 등 온통 독재의 전체주의(全體主義) 국가들이다. 대한민국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자유’와 ‘야만’이란 투쟁의 최일선(最一線)에 서있는 전초(前哨) 국가이다.”

그는 “대한민국은 중국·북한 같은 대륙국가의 전체주의를 바꾸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반대로 한국이 무너지면 대륙 전체가 전체주의화된다. 한국의 운명은 한국만이 아니라 인류의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이 2021년 12월13일자에 실은 '김정숙평양제사공장' 모습. 공장 안에 붙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는 전형적인 전체주의 국가의 구호이다./노동신문-뉴스1

◇韓 주도로 日~北~中~유럽 잇는 KTX 구상

- 작년 10월 노태우 대통령 추도사에서 언급한 ‘KTX(고속전철) 구상’도 문명사적 맥락에서 볼 수 있나?

“우리 주도로 일본, 중국, 러시아, 유럽을 관통하는 KTX 구상은 중국의 ‘일대일로’와 달리 상대 국가들과 호혜적으로 윈·윈(win-win)을 지향했다. 또 자유문명권의 자유·민주·인권의 생기(生氣)를 북한, 중국, 러시아로 흘려 보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수 있다.”

(※1991년 초 노재봉 당시 국무총리는 사업자 선정을 앞두고 있던 고속철도(KTX) 사업을 유럽국가들과 콘소시엄을 구성해 남쪽으로는 해저터널로 일본과 연결하고, 북쪽으로는 북한·만주·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을 잇는 KTX 유라시아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는 “당시 중국과 러시아는 국력이 미약해 한국에 간청하는 입장이었고, 북한도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등으로 어느 때보다 대화가 잘 돼 충분히 해볼만 했으나 후임 김영삼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 반환 조건으로 프랑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구상이 폐기됐다. 아쉽지만 기회는 역사에서 반복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1년 10월 30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에서 노재봉 전 국무총리가 추도사 도중 오열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연합뉴스

◇“중국의 디지털 전체주의는 인류에 最惡”

- 격화되는 미국과 중국간의 패권 대결은 어떻게 보시는가?

“미·중 대결은 유럽 근대질서와 전통을 공유하고 벌인 미소(美蘇) 냉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미·중 대결은 제국 패권(覇權·imperial hegemony)을 놓고 벌이는 격돌이자, 체제 대(對) 체제(system to system)의 전면전이다. 발단은 자유, 인권, 소유권, 종교적 관용, 자연법, 개방된 시장 등을 근간으로 하는 현대문명 질서를 중국이 전면부정하는 것이다.”

조 바이든 마국 대통령이 2021년 11월 15일 저녁(미국 동부시간 기준)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취임 후 처음 화상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뉴시스

- 중국이 꿈꾸는 세계 질서가 인류에 위험하다는 말씀인가?

“중국은 위계적 조공(朝貢)체계 같은 왕조시대 중국적 천하질서의 현대판 복원을 꾀한다. ‘일대일로’ 프로젝트만 해도 진출국가 엘리트들을 매수하고 나라 전체를 빚더미로 만들어 해당국을 장악·복속시키려 한다. 세계 최고의 디지털 통제를 접목해 인류가 여태 경험못한 최악의 디지털 전체주의 완성이 목표다.”

- 문재인 정권은 중국에 줄곧 ‘굴종’하고 있는데.

“시진핑은 2017년 4월 트럼프를 만나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라고 했다. 안중근기념관을 중국에 세우고 한국 임시정부청사를 중국이 리모델링해줬다. 항일 독립운동을 ‘중국내 조선족 활동’ 정도로 격하한 꼴이다. 이런데도 ‘중국과 한국은 운명공동체’라며 순종하는 문 정권은 이질적이고, 역사를 거스르는 반동(反動) 정권이다.”

발트해 연안의 소국인 리투아니아가 유럽연합(EU)내 반중(反中) 전진 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대만외교부가 소셜미디어에 올린,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2021년 11월 18일 열린 대만대표부 개소식 모습/대만외교부 제공

◇“자유시민과 지식인들이 각성해야”

- 올해는 한중(韓中) 수교 30주년이기도 한데.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선견지명으로 화교(華僑)들을 쫓아내 한국은 세계에서 차이나타운이 없는 유일한 나라였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서 중국인 수가 급증하고 그들의 경제력이 급팽창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일찌감치 자국내 중국인의 토지 구입을 금지했다. 우리도 마냥 방치해서는 곤란하지 않나.”

그는 이어 말했다.

“올 3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중국에 복속, 해양문명 세력과 단절, 개인·자유가 소멸된 나라로의 길이 더 빨라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종착점은 혹독한 전체주의 국가이다. 자유 시민과 지식인들이 각성해야 한다.”

왕이(왼쪽) 중국 외교부장이 2017년 12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북대청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의 팔을 툭툭 치며 말을 거는 장면. 왕 부장이 문 대통령을 만만하게 본다는 외교 결례 논란이 일었다./조선일보DB

-미국·중국 대결은 어떻게 귀결될까?

“중국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을 뿐 더러 세계 각국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일대일로’에 대한 해당국들의 불만도 엄청나다. 유럽연합이 미국에 합세하고 있으니, 결국 중국이 밀릴 것이다. 세계 경제규모 9~10위국인 한국의 선택도 중요하다. 미·중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세계사의 향방(向方)이 달라질 수 있다.”

◇“‘패거리 人事’로 문민 대통령들 줄줄이 실패”

-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리더십 품질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군(軍) 출신들은 스스로 한계를 인정하고 외부 전문가들을 중용했다. 그러나 민간인 대통령들은 내 패거리 안에서만 인재를 쓴다. 그러니 국정 성적표가 좋을 수 없다. 또 김영삼부터 문재인까지 대통령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 남북 관계에 매달렸다. 북한에 퍼주고 선의(善意)로만 대하면, 남북관계가 좋아질 거로 임했지만 예외없이 모두 실패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 사진 왼쪽부터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조선일보DB
박정희 대통령은 민간 기업들의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자조'(self help)적 경제발전, 산업 정책을 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박근혜 영애와 함께 현대그룹 계열사 공장을 둘러 보고 있다./조선일보DB

- 그렇다면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나?

“통일에 대한 착각, 민족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한다. ‘하나의 민족이니 통일돼야 한다’는 주장은 선전문구일 뿐이다. 한 민족이면서도 다른 나라로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체제가 비슷하면 굳이 통일하지 않고 미국·캐나다처럼 자유롭게 교류하고 통상해도 충분하다. 남·북한처럼 체제가 완전히 다르면, 연방제도 불가능하다.”

- 국회의원으로 4년 활동하셨는데.

“통일외교위원회에서 일했는데 4년동안 외국 저널에 실린 논문 한 편 제대로 읽고 오는 의원 한 명 없었다. 북한 핵문제가 터졌는데 규탄 결의안을 내자는 의원이 전무(全無)해 내가 결의안 2개를 만들어 본회의 통과시켰다. 지금까지 북핵 관련 우리나라 국회의 대응은 아직도 그 두 개 뿐이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 주택가 가운데 있는 노재봉 전 국무총리의 개인 연구실은 작은 도서관이다./송의달 기자

◇“국제정치가 한국인의 삶 80%를 지배해”

- 원로로서 리더들에게 조언하신다면?

“무엇보다 국제정치가, 국제적 역학 관계가 한국인 삶의 80%를 지배하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했으면 한다. 일례로 북핵(北核)이나 반도체 등은 국내만의 시각이나 노력으로 활로가 열리지 않는다. 또 하나 한국인의 잠재력과 한국이 부여받은 세계사적 사명을 깨닫고 조직과 국가를 경영하길 바란다.”

- 올해 만 86세인데 언제까지 공부하실 건가?

“교수도 했지만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만년(萬年) 학생’이라는 각오로 계속 배우고 공부할 것이다. 그게 내 천직(天職)이자, 천명(天命)이라고 생각한다.”

노재봉 전 총리가 제자들과의 매주 공부 모임에서 토론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펴낸 책. 모두 2015년에 나왔다./인터넷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