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명(孔魯明) 전 외무장관은 한국 외교의 거목(巨木)이자, 산 증인이다. 그는 1958년부터 38년동안 아시아, 남·북미, 유럽, 아프리카, 호주 등 6대주에서 총영사(카이로·뉴욕)와 대사(브라질·러시아·일본) 등으로 일했다.
1964년 한일(韓日) 국교정상화 회담, 1983년 중국 민항기 송환협상 같은 한국 외교의 중요 고비마다 현장에 있었다. 1992년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와 남북핵통제위원회 남측 위원장으로 북한도 상대했다. 1996년 말 외무부 장관을 끝으로 퇴임한 그는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 한일포럼 의장 등을 지낸 뒤 현재 비영리 공익재단인 동아시아재단의 상임고문으로 있다.
◇올해 만90세...‘한국 외교의 거목’
작년 11월 공로명 전 장관의 구순(九旬)기념문집을 대표편찬한 유명환 전 외교장관은 그의 덕망(德望)과 실력을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8글자로 표현했다. “복숭아와 자두는 꽃이 곱고 열매가 맛있어, 누가 오라고 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달 5일 오후 서울 경복궁 인근에 있는 동아시아재단에서 공 전 장관을 만났다. 그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1995~96년), 필자는 당시 외무부 출입기자로서 외교 현장을 취재했다.
수 년 만에 만난 공 전 장관은 걸음걸이가 조금 느릴 뿐, 기자와의 대면 인터뷰에서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래 전 인명(人名)과 날짜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말했다.
◇“새벽 4~6시 기상...매일 책·신문 읽어”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매일 오전 4~6시 일어나 거의 매일 재단으로 출근한다. 일본 문예춘추(文藝春秋)를 비롯한 국내외 잡지와 책, 신문, 저널들을 읽는다.”
- 고령인데도 건강하신 비결이라면?
“특별한 건 없다. 마음 편히 먹고 지내는 것 뿐이다.”
◇“文 정부 외교는 ‘말’만 요란해”
- 최근 한국 외교를 어떻게 보시는가?
“문재인 대통령이 화려한 말은 많이 했지만 뚜렷하게 남는 게 없다. 외화내빈(外華內貧)이다. ‘대북(對北) 지향적’이라는 것 빼면 눈에 띠는 게 없다. 외교안보의 지향점을 잡지 못하고 북한에 미소(微笑) 정책만 한 것 같다.”
- 그런 북한 접근은 잘 한 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미소를 던져도 북한은 자기들이 필요하지 않으면 절대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이 필요하다면 꼭 나온다. 그런 점에서 문 정부는 북한에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했다. 좀더 북한의 본질을 잘 알았더라면 허망한 꿈을 덜 가졌을 것이다.”
◇“굳건한 韓美 동맹이 한국 외교의 핵심”
- 대선 후 출범하는 새 정부에 조언한다면?
“외교의 지향점을 뚜렷하게 잡아야 한다. 핵심은 굳건한 한미(韓美)동맹이다. 대미(對美) 관계를 가장 중요한 근간(根幹)으로 삼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 일본과는 위안부, 강제 징용공 배상 같은 난제가 있지 않나.
“위안부 문제는 사실상 해결됐고 강제 징용 문제는 국교정상화 때 대일(對日)청구권 협정에서 정산됐다. 문재인 정부가 이 합의를 송두리째 뒤집었는데, 헌정 질서를 승계해 출범한 정부는 앞 정부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 혁명으로 생긴 정부가 아닌 한 말이다.”
◇“가치공유하는 일본과 ‘準동맹’ 맺어야”
- 대일 관계를 왜 회복해야 하나?
“동북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밖에 없다. 미국의 동맹국인 점도 같고, 중국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는 공통의 가치 국가이다. 지리적 근접성과 역사적 관계를 봐도 그렇다.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정식 동맹은 아니라도 일본과 준(準)동맹(virtual alliance)을 맺어야 한다.”
- 국내에 반일(反日) 감정을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때인가. 중국이라는 큰 힘을 가진 나라가 우리를 자기 영향 아래 두려고 강력한 팽창 정책을 펴고 있다. 중국에 ‘짝사랑’만 하지 말고 일본과 함께 대응해야 한다.”
◇“3불 정책 계속하면 나라 잃는다”
- 바람직한 우리의 대중(對中) 외교는 어떤 것인가?
“중국에 저자세로 계속 한다고 해서 중국이 우리를 존경하지 않는다.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중국에 당당하게 해야 한다.”
-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굴욕적인 ‘3불(不) 정책’을 내놓았다.
“‘3불 정책’은 우리의 주권(主權)을 포기하는 정책이다. 그런 자세로 외교를 하면 나라를 잃는다. ‘3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사드 보복 때 일방적으로 내린 ‘한한령’(限韓令·중국내 한국 제품 및 한류 제한 조치)을 아직 풀지 않고 있다. 중국을 상대로 우리의 국가이익을 깊이 생각하면서 의연한 외교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공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은 한국을 쉬운 콘트롤(control·통제) 대상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저자세이면 더욱 그렇다. 우리 혼자서 중국을 대하면 난쟁이와 어른의 싸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뒤에 미국과 일본이 있다면, 사정은 다르다.”
◇“한국 외교의 최대 위협은 중국”
- 지금 한국 외교에 가장 심각한 위협은 무엇인가?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세계지도를 가리키면서) 중국이다.”
- 왜 중국이 위협인가?
“덩사오핑이나 원자바오 때의 중국에 대해 우리와 세계 각국이 모두 중국에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지금의 시진핑은 중국몽(中國夢)을 노골화하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깔보고 윽박지르고 있다. 전 세계에 중국의 친구가, 동맹이 없지 않나.”
공 전 장관은 이렇게 밝혔다.
“1983년 민항기 사건 때 접촉한 중국 관료들은 겸손했다. 시진핑의 중국이 자기의 존재를 너무 세게 과시하는 바람에 전 세계의 반감(反感)을 사고 있다. 곡식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겸허함은 중국인의 미덕인데 시진핑은 이걸 잊어 버렸다.”
◇“쿼드와 오커스에 옵서버로 참여해야”
- 우리는 중국의 공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거듭 강조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를 근간으로 삼고 일본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강점인 외교를 살려야 한다. 미국도 중국에 홀로 맞서지 않고 쿼드(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이 참여하는 비공식 안보협의체), 오커스(AUKUS·2021년 9월 15일 발족한 미국, 영국, 호주 3국의 안보협의체) 등을 만들어 뜻을 같이 하는 나라들(like minded countries)과 연합 세력을 구축해 대응하고 있다.”
- 앞으로 미·중 대결을 전망하신다면?
“20년은 몰라도 최소 10년은 더 갈 것이다. 올해 시진핑이 3연임(連任)하고 한 번 더 집권하면 10년이다. 시진핑이 최고지도자로 있는 한, 중국의 외교 기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대결적인 미·중 관계도 계속될 것이다.”
- 미·중 대결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어떻해야 할까?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조정자니 뭐니 하면서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일이다. 우리와 이해를 같이 하는 동맹국과 손잡고, 의연하면서도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자세로, 중국과도 협력하면 된다. 우리가 반중(反中) 전선에서 첨병 역할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국을 의식해 쿼드와 오커스 참여를 기피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쿼드와 오커스에서 옵서버(observer·회의 참가·발언권은 있으나 의결권은 없는 국가) 지위(status) 정도는 갖는 게 좋다.”
공 전 장관은 “우리는 미국의 대중(對中) 정책과 충분히 보조(步調)를 맞춰야 한다. 이를 위한 소통을 충분히 하는 게 국익에 도움된다”고 말했다.
◇“해양 세력과 손잡는 게 우리의 살 길”
- 외교는 얼마나 중요한가?
“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외교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20세기초 나라를 잃었다. 지도를 보면 우리 옆에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 한반도가 숨 쉴 구멍은 해양으로 나가는 것 밖에 없다. 그게 우리의 지정학(地政學)적 운명(運命)이다.”
그는 “한 나라의 외교정책은 그 나라의 지리(地理)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워싱턴DC 외곽 버지니아주에 있는 미국 전쟁대학(National War College) 현관 벽에는 ‘Everything changes but geography’(모든 것은 변해도 지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지정학의 진리를 보여주는 말이다. 중국, 일본이라는 대국(大國)에 끼여있는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은 해양 쪽이다.”
◇“한미 동맹은 하늘이 내려 준 선물”
- 바다 건너 편에 동맹이 필요하다는 말씀인가?
“그렇다. 우리에겐 동맹국이 꼭 필요하다. 16세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왔을 때, 우리를 도와준 동맹국은 중국이었다. 그런데 동맹국은 상대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자존(自尊), 자부심을 세워주는 우호적인 나라여야 한다. 다행히 지금의 미국이 그렇다. 미국이 우리에게 영토를 내놔라하나, 뭘 내놔라고 하나. 한미 동맹은 안보 동맹인 동시에 가치 동맹이다.”
공 전 장관은 “한미 동맹은 19세기 우리에게는 없었지만 20세기 들어와 생긴,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다. 이걸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외교 가장 잘 해”
-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외교를 가장 잘 한 분을 꼽는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단연 으뜸이다.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6.25동란을 겪고도 주권을 보존했고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그가 미국을 상대로 억지춘향식으로 따낸 것이다. 카이로선언에서 한국 독립조항도 이 박사의 개인 외교 덕분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올바로 평가해야 한다.”
◇“총 안 든 외교관...국익 수호 첨병”
- 한국 외교가 가장 어려웠던 때는?
“박동선 사건 등으로 한미(韓美)관계가 악화된 1970년대 후반이었다. 국내의 반대 시위와 인권 문제 등으로 많이 어려웠다. 이를 통해 외교는 내정(內政)의 연장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경제와 국내정치가 잘 돼야 외교도 힘을 얻어 잘 될 수 있다.”
- 외교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면?
“국가안보에 관한 의식이다. 외교관은 군복 입지 않고 총만 안 들고 있을 뿐 군인처럼 국가이익을 지키는 첨병(尖兵)이다. 이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sense of duty)이 제1 요건이다. 이게 없으면 외교관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