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18일 청나라 북양통상대신 이홍장과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천진(天津)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한 해 전 12월 벌어진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입은 피해 보상과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조약문에는 ‘한 나라가 조선에 출병하면 다른 나라에 통보한다’는 조항이 삽입됐다. 이 조항을 청은 단순한 통보로 이해했고 일본은 ‘동시 출병’으로 이해했다. 장차 천하를 뒤집어엎을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88. 갑오년 삼국지, 운명의 청일전쟁 ②풍도(豐島)의 포성
“우리가 속방을 사랑하여 왔노라”
9년이 지난 1894년 조선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탐학과 학정에 저항하는 민란, 동학농민전쟁이다. 민란을 해결할 의지도 진압할 치안력도 없는 조선 정부는 청나라 조정에 파병을 요청했다. 당시 농민들이 죽창을 겨눴던 선혜청 최고책임자가 조선에서 1인자 행세를 하던 청나라 관리에게 파병을 부탁했고 그는 수용했다. 최고책임자는 훗날 민영휘로 개명한 민영준이고 청나라 관리는 훗날 중화민국 총통이 된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다. 보고를 받은 청국 총리각국사무아문 통상대신 이홍장은 북양함대 소속 순양함 제원호와 양위호를 조선으로 출항시켰다. 북양함대 소속 나머지 군함도 속속 조선으로 진입했다. 육군 또한 인천과 아산을 통해 속속 조선에 진입했다. 아산에 상륙한 청 육군 엽지초(葉志超) 부대는 주민들에게 이렇게 포고문을 내걸었다. ‘애휼속국(愛恤屬國·속국을 사랑하고 돕기 위해 출병했노라)’(‘주한일본공사관기록’ 2권 6.철병청구 및 담판 파열까지 왕복문서 (5)속방문제와 청국군 철퇴건) 그리고 6월 6일 청나라는 군사를 조선으로 파병하겠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통고문은 다음날 접수됐다.
학수고대했던 일본
역설적이게도, 조선은 물론 나아가 대륙 진출을 계획하던 신흥 강국 일본에 기회가 왔다. 일본은 청일수호조규(1871),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런데 1882년 청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다시 조선을 속국으로 규정한 데 이어 군사력까지 동원해 조선 내정에 개입한다고 통보한 것이다. 일본 정치권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폭증하던 내부 실업 문제와 정치 문제 돌파구를 이 ‘외사(外事·국외의 일)’에서 찾았다. 전쟁 준비는 이홍장 통고 이전에 시작됐다. 5월 31일 일시 귀국한 주조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렇게 보고했다. “동양 정계의 신천지를 열기 위해 조속히 출병하자.”(‘무쓰 무네미쓰 관계문서’,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일조각, 1989, p16 재인용)
이미 5월 하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데라우치 마사타케 대좌(초대 조선총독) 팀을 꾸려 군사 수송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이홍장 통고 도착 닷새 전인 6월 2일 일본군 제5사단이 파병 부대로 결정됐다. 5일 일본 정부는 대본영을 설치한 뒤 곧바로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혼성여단 선발대를 출항시켰다. 10일 선발대는 조선 수도 한성으로 전격적으로 진입했다. 또 인천에는 이미 일본 최신 군함 쓰쿠시, 지요다, 야마토, 아카기함이 파견돼 있었다. 인천에 6척, 부산에 1척 이렇게 일본 해군 군함 절반이 조선에 도착해 있었다.(이상 박종근, 앞 책, p17) 그렇게 인천과 한성은 일본군에 점령됐다. 남쪽 아산 땅과 바다는 청나라 군사에 점령됐다. 동학란 해결 능력이 없는 조선 정부의 SOS 요청이 부른 살벌한 풍경이었다.
풍도의 포성(砲聲)
1885년 청은 북경에 ‘총리해군사무아문’을 설치했다. 1840년 아편전쟁 참패 이후 근대 해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기관이었다. 1885년 11월 청은 독일로부터 정원(定遠)과 진원(鎭遠) 두 철갑함을 수입했다. 당시 세계 최고 전함이었다. 1888년 청 북양함대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일본은 충격을 받았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가 동경만에 나타났을 때 받았던 충격이 자발적 근대화로 나타났듯, 아시아 최강 북양함대는 일본에게는 공포 대신 군비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일본이 경쟁에서 승리했다(그 승리의 근본 계기는 자만에 빠진 청나라가 제공했다. 이는 다음 회에 이야기하자).
1894년 7월 25일 새벽, 아산만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청나라 북양함대 소속 철갑 어뢰순양함 제원호가 안개 속에 나타났다. 제원호는 광을, 위원호와 함께였다. 광을호는 소형 순양함이었고 위원호는 연습선이었다. 오전 6시 매복해 있던 일본 제1유격대 소속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호가 나타났다. 이미 대본영으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은 일본 함대는 곧바로 포격을 시작했다. 화력이 가장 강한 제원호가 첫 목표물이 됐다. 교전 개시 직후 제원호 함장 방백겸이 백기를 내걸고 도주를 명했다. 승무원들이 항의하자 방백겸은 백기를 거두고 계속 도주를 명했다. 철골 목제선인 광을호는 나니와와 아키쓰시마호로부터 집중포화를 맞고 침몰했다.
오전 8시 청 해군 병력 1116명을 수송하던 영국 상선 고승호가 전투 지역에 나타났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함장이던 나니와호가 항복을 요구했으나 승선한 청군은 거부했다. 오후 1시 영국인들이 하선한 직후 나니와호가 고승호에 어뢰를 발사했다. 30분 만에 고승호는 침몰했다. 피격 전 고승호 임검 장면을 목격한 군량미 수송선 조강호는 퇴각 도중 아키쓰시마호에 포획됐다. 오후 2시였다.(조세현, ‘청프전쟁과 청일전쟁에서의 해전’, 중국사연구 vol 84, 중국사학회, 2013)
전투 개시부터 종료까지 8시간 걸렸다. 그 8시간 동안 천하무적 북양함대 소속 군함 1척은 파손된 채 도주했고 한 척은 침몰했고 한 척은 피랍됐고 임차했던 상선은 침몰했다. 상선에 탑승했던 병력 1116명 가운데 871명이 전사했다. 일본군 피해 상황은 전무(全無)였다. 2000년 중-일 교류사 가운데 가장 치욕적인 패배가 청조(淸朝) 말 조선 내해(內海)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300년 만에 재현된 소사평 전투
사흘 뒤인 7월 28일 이번에는 육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충남 아산에서 엽지초가 지휘하는 청 육군과 일본 육군이 맞붙은 것이다. 아산만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 엽지초 부대 3500명은 두 부대로 나뉘어 1진은 천안 성환, 다른 1진은 공주로 이동한 상태였다. 이미 본격 전쟁을 염두에 두고 출병한 일본은 서울에 주둔한 혼성여단 가운데 4000명이 아산으로 남하 중이었다.
28일 새벽 성환 벌판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안성천에서 조우한 첫 전투는 청이 승리했지만 이후는 일본군이 승리했다. 무엇보다 사흘 전 풍도 바다에서 함대가 궤멸돼 병력 지원이 끊긴 사실이 패배 원인이었다. 일본군은 이 모든 전개 상황을 예측하며 개개 전투를 설계한 것이다. 전투마다 일본은 각국 종군기자를 동행시켜 그 ‘문명이 야만을 이기는’ 상황을 세계에 적극 홍보했다.
1894년 여름 성환 전투로부터 자그마치 300년 전인 1597년 음력 9월 중국과 일본은 동일한 장소에서 격전을 치른 적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였다. 북상하는 일본군과 이를 저지하는 명나라 군사가 바로 성환 ‘소사평’에서 맞붙어 명군이 승리했다. 이 소사평 전투는 행주대첩, 평양대첩과 함께 임란 3대 육전으로 불린다. 명군에 패했던, 그래서 대륙 진출이 무산됐던 옛 일본의 야망이 300년이 지난 1894년 동일한 장소에서 활활 재발화하고 있었다.
“중국은 일본 못 이긴다”
북양함대는 천하무적이었다. 하지만 첫 전투부터 청나라는 참패했다. 참패는 청일전쟁 내내 계속됐다. 집요하고 계획적인 일본군 전략과 강력한 공격에 청은 힘을 쓰지 못했다. 1888년 북양함대가 출범했을 때 움츠러들었던 일본이 아니었고, 출범했을 당시 위풍당당했던 북양함대가 아니었다.
청일전쟁 개전부터 끝날 때까지 종군했던 일본 박문관 ‘일청전쟁실기’ 기자들은 이렇게 보았다. ‘지나(중국) 병사는 공동을 위한 마음이 없고 오직 자기 혼자만의 안전을 기도한다. 군대가 곤경에 처하면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도망간다. 인종을 개량하지 않는 한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긴다.’(‘일청전쟁실기’ 2편, 박문관, 1894년 10월 3일)
역시 종군기자였던 미국 ‘뉴욕 월드’ 특파원 제임스 크릴먼은 이렇게 기록했다. ‘군사과학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 요새 하나를 무장시킬 수 있다. 교묘하게 만든 무기와 불량품 하나 없는 탄약으로 병사들을 무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 기계들 뒤에 훈련된 두뇌와 눈과 육체가 없고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없다면 소총도 대포도 반복되는 무장도 헛된 것이다.’(J. 크릴먼, ‘On The Great Highway’, 로드롭 출판, 보스턴, 1901, p38)
아편전쟁 이후 나름대로 근대화를 추구해왔던 청이었다. 하지만 그 근대화는 근대정신이 빠져 있는 근대화였다. 근대화 자체도 이가 빠진 근대화였다. ‘이홍장은 해군아문과 호부에 북양해군에 필요한 속사포 구입 예산을 배당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승인되지 않았다.’(유전홍, ‘독일 군사기술이 북양해군에 미친 영향’, 중국과기사료 19권 4기, 청화대과학기술사사기고문헌연구소, 1998) 왜? ‘당시 권력의 정점인 서태후는 여름궁전 이화원을 짓기 위해 해군아문 예산을 넘봤다. 해군 건설에 투입해야 할 예산 가운데 2000만 냥이 이화원 건설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해군아문 창설 이후 외국으로부터 주문한 군함은 한 척도 없었다.’(김영림, ‘청조의 근대식 함선 도입과 동아시아의 충격’, 동국대 석사논문, 2006)
철저하게 봉건적인 부패한 권력 탓이었다. 풍도에서 청나라 철갑선 제원호를 포격한 대포가 바로 이홍장이 원했던 그 속사포였다. 제원호 함장 방백겸으로 하여금 공포 속에 도주하게 만든 그 포탄이 속사포로 퍼부은 포탄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