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개혁은 고종과 민씨 척족정권이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청일 양국 군대를 청병함으로써 생긴 일종의 부산물이다. 일본세력을 등에 업은 개혁정부가 일본 입맛대로 일을 진행하지 않자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고종-민비 부부를 면담했다. 회유와 협박 가운데 입헌군주제가 이슈로 떠오르자 고종과 민비는 “백성은 처음부터 군주 명령에 따르게 돼 있다”며 군주권 제한을 거부했다. 가오루는 “대화가 불가능한 자들”이라고 했다.
코로나 창궐 3년 전 이미 대한민국은 중증 감염증에 걸려 있었다. 조선500년 기저질환인 ‘명분’과 명분으로 먹고 사는 ‘선비 지상주의’에 감염된 상태였다.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조선성리학이 권력을 잡은 운동권 호소인들에 의해 부활한 것이다. 저들은 명분을 내세우며 그 어떤 법적 규제와 질서도 무시했다. 제도가 완강하면 제도를 바꿨고 바꿔서 안되면 저 선비들은 법을 만들어서 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 선비들 먹여살린다고 대한민국 장삼이사들은 “큰 뜻을 품은 선비들 하시는 일인데 어련히” 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순치된 백성 위에서 선비들은 마음껏 고종 부부같은 권력을 누렸다. 명분을 법으로 포장해 쓸만한 국가 리소스를 반(反) 명분적 존재라며 다 소멸시켰다. 그렇게 원전이 사라졌고 대한민국을 이끌던 기업들이 넘어졌다. 금수강산은 태양광 패널이 갉아먹었고 너른 새만금 바다를 뒤덮은 태양광 패널에는 갈매기 똥이 가득하다. 그나마 남는 자원은 쥐도새도 모르게 횡령당했다.
법 위에 군림하며 잇속 챙기던 그 풍경을 보기 싫어서,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어서, 2022년 봄날 대한민국인은 권력을 바꿨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밝힌 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다. 비전으로 내걸 이유조차 없이 물과 공기처럼 당연한 가치를 새 대통령이 비전으로 선포할 정도로 대한민국은 고생을 했다. 명분일 이유가 없는 가치가 새 시대 최고의 명분이 된 것이다. 권력은 명분이다. 명분은 권력욕을 실현시키고 나아갈 바를 추진하는 동력이다.
그런데 명분은 공동체가 합의한 제도와 절차를 넘을 수 없다. 만일 새 정권이 명분 실현을 위해 절차를 초월하고 법을 무시한다면 지난 5년 나라를 초토화해버린 명분 지상주의 선비 ‘호소인’들과 다를 바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두 가치 속에는 법질서와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준수라는 약속이 숨어 있다. 그게 보수다. 그 어떤 명분이라도 이 시스템을 앞서게 된다면 비전 그 자체가 모순이 된다.
새 정권이 경계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점이다. 법과 질서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부국강병을 이끌 수 있도록 ‘시스템’을 회복하는 사명을 새 정부는 이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터럭만한 절차라도 지켜야 한다. 무조건 지켜야 한다. 민주주의는 절차다. 절차 앞에 명분 없다. 5년 동안 대한민국은 이 사소한 절차와 시스템이 붕괴되는 장면을 숱하게 목격했다. 그 후유증은 외상 후 스트레스 수준이다. 국민은 그 트라우마에서 치유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