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은 안정된 자유민주헌정(憲政)을 훼손한 게 아니라 위기에 처한 자유민주헌정을 수호하고 재건한 것이다. 1972년의 10월유신(維新)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실력 배양을 위해 ‘중단없는 전진’을 재결의한, 또 한 번의 5.16이다.”
이강호(59) 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이 저서 ‘박정희가 옳았다’에서 내린 분석이다. ‘이강호’는 대학 시절부터 써온 필명(筆名)이며, 그의 본명(本名)은 ‘김용철’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1982년 입학한 그는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한 차례 복역도 했다.
이 위원의 진단은 한때 ‘마르크스·레닌주의자’를 자처하며 사회변혁에 앞장선 운동권 핵심의 생각이라고 믿기 힘든 180도 전향(轉向)이다. 그는 심지어 10월유신 이후 박정희(朴正熙) 집권 후반기(1972~79년)가 ‘민주주의의 암흑기’라는 주장을 강하게 반박한다.
“박정희의 ‘경제적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흠집 많다고 보는 견해는 크게 잘못됐다. 10월유신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 같은 부강한 나라가 결코 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박정희가 정치적 흠집 많다는 견해는 잘못”
그는 나아가 “박정희 집권 18년(1961~79년)은 한국인을 누천년(累千年)의 굶주림에서 해방시키고 번영으로 인도한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진(前進)의 시대”라고 했다. 그는 왜 박정희 치세(治世)를 적극 옹호·예찬하며 아직도 남아있는 ‘박정희 금기(禁忌)’ 깨기에 앞장서고 있는 걸까? 기자는 이달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이강호 위원을 만났다. 마침 5.16 61주년을 사흘 앞둔 시점이었다.
- 1961년에 5.16은 왜 일어났나? 박정희의 거사(擧事)는 불가피했나?
“윤보선(尹潽善) 당시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말한 게 여럿을 시사한다. 1960년 4.19로 민주당 정권이 권력을 잡았지만, 1천만 노동인구 중 240만명이 완전실업자였고 200만명은 잠재실업자였다.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이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장면(張勉) 총리 정권은 경제발전 계획을 만지작만 거릴 뿐 경제난 수습에 전혀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 그 이유 뿐이었나?
“더 큰 문제는 데모 천국인 상황에서 벌어진 극심한 이념적, 정치적 혼란이었다. 1960년에만 침투 간첩이 100명 넘게 체포됐고 ‘통일 운동’을 한다는 인사들의 월북(越北) 시도가 이어졌다. 1961년 3월22일 야간 횃불시위자들은 서울 명륜동 소재 장면 총리 집으로 몰려가 ‘미군 철수’와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4.19 이후 간첩 100여명 체포...‘김일성 만세’ 외쳐
그는 “나중에 공개된 알렉산더 푸자노프 평양주재 소련대사의 기록을 보면, 4.19 직후 김일성은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대남 전략 추진에 들어갔다. 당시 남한에선 6.25 이후 숨죽이고 있던 친북좌익세력들이 다시 발호했다. 시위 때 ‘적기가(赤旗歌)’가 불렸다”고 했다.
“계속 이 상태였다면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궤멸됐을 것이다. 1961년 5월13일 서울운동장에 4만여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16, 17일에도 전주, 대구에서 혁신계(좌익)의 시위가 예정돼 있었으나 5.16으로 무산됐다.”
- 박정희가 5.16으로 지향한 목표는 무엇이었나?
“반공(反共)과 자유민주주의의 재건이다. 5.16 당일 발표된 6개 혁명 공약 가운데 2개가 ‘반공’ 내용이다. 박정희가 1961년 직접 쓴 35쪽 분량의 팸플릿 ‘指導者道(지도자도)’와 1962년에 낸 277쪽 분량의 ‘우리 民族의 나갈 길’이란 책을 보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체제를 지키겠다는 내용 일색이다.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守護者)로서 5.16을 일으켰다.”
◇“5.16의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재건”
기자가 확인해 본 결과, 박정희는 실제로 이렇게 밝혔다.
“이번 혁명은 진실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새로운 독재와 전체주의를 수립하기 위함이 아님은 명명백백하다.”(‘지도자도’, 23~24쪽)
“국가가 파멸에 직면하고 국민의 주권이 비참히 유린되었을 때, 여기에 일대 수술(手術)을 가하여 국가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소생(蘇生)시키고자 한 것이 이번 군사혁명이다.”(같은 책, 26쪽)
- 박정희는 어떤 사람인가?
“1917년생인 그는 구미공립보통학교 시절 내내 반장을 했고 학업성적도 뛰어났다. 100명 모집에 1070명이 응시한 대구사범학교 입시에서 51등으로 합격했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예과)는 240명 중 수석 졸업했다. 일본 육사는 300명 중 3등으로 졸업했다. 일본 육사는 당시 최고의 교육 기관이었다. 그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근대적 인물이었다.”
- 박정희의 경제적 공(功)은 인정해도 3선 개헌, 10월유신, 긴급조치 같은 그의 강압 통치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에이브러험 링컨(Abraham Lincoln) 미국 대통령의 경우 재임 중 ‘비상대권’을 내세워 ‘긴급조치’를 발동해 수백 개의 신문을 폐간시키고 3년동안 1만 3000여명을 투옥했다. 이에 반해 박정희 후반기 7년간 긴급조치로 처벌받은 이는 1000여명에 불과하다. 링컨의 10분의 1 미만인 것이다. 이런데도 링컨은 ‘민주주의의 성자(聖者)’로 떠받들고, 박정희는 영원히 ‘反민주 독재자’로 멸시해야 하나?”
이강호 위원은 이어 말했다.
“유신시대의 한 복판인 1974년에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찬양하고 베트남 공산화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됐다. 이어 3년 뒤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또 냈다. 리영희는 나중에 반공법으로 기소돼 형(刑)을 살았지만 책은 버젓이 출간됐다. 그러나 2017년 8월, 문재인 정권 아래 법원은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판매를 금지했다. 박정희와 문재인 정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민주주의에 부합하나?”
◇“링컨은 박정희 보다 10배 많이 투옥시켜”
- 그래도 강경한 ‘반(反)박정희’ 논자들은 지금도 ‘10월유신은 민주주의를 결정적으로 유린한 반민주적인 폭거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탈취당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에 눈감는다. 서독(西獨)은 이를 인식하고 2차 세계대전 후 나치와 공산당을 불허하는 ‘방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정보기관인 헌법수호청을 통해 잠재적 용공(容共) 의심분자들을 끊임없이 사찰했고, 공무원의 자유민주기본질서에 대한 충성서약을 의무화했다. 문제있어 보이는 단체는 강제해산했다. 이런 서독은 진짜 민주이고, 유신만 반(反)민주인가? 유신 선포 당시 한국이 직면한 도전은 서독보다 훨씬 엄중했다.”
- 10월유신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조치였단 말인가?
“그렇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결은 독재와 민주의 싸움이 아니라 자유민주체제의 근본을 부정(否定)하고 위협하는 세력과의 싸움이 근원적인 대결이었다.”
이 위원은 이어서 말했다.
“박정희는 10월유신 선포 특별선언에서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민주체제처럼 나약한 체제도 없다. 나는 우리 민주체제에 더욱 발전할 수 있는 활력소를 불어넣어주고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이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다’고 했다. 박정희의 이 언명(言明)은 정론이다. 공산 좌익들도 항상 민주를 내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달고 있는 민주주의가 기만적(欺瞞的) 장식물에 지나지 않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는 “민주주의는 양식 있는 시민의 손에 있을 때는 자유의 활력을 꽃피우지만 불순한 무리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흉기(凶器)가 된다.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 우리는 이를 목격했다. 유신시대는 종국에 이해될 것이나 최근 문재인 정권 5년은 ‘재앙의 시대’로 불릴 것”이라고 했다.
◇“민간 정치인들, 고속도로 건설, 중화학공업 결사 반대”
- 박정희에 반대하는 민간 정치인이 집권해 10월유신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박순천(朴順天)·김대중 같은 야당 정치인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물론 외자(外資) 유치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줄기차게 결사 반대했다. 1971년 4월 대선 당시 김대중(金大中)은 서울 장충단공원 유세에서 ‘세종대왕 시대가 성군(聖君)의 시대라는 것은, 당시에는 고속도로도 없었고 울산공업단지도 없었지만, 무명베옷을 입고 산천지를 걸어 다녔지만, 국가의 혜택이 고르게 분배되었던 것이오’라고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됐다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 일부에선 유신시대에 용공(容共) 조작을 비롯한 인권 탄압이 극심했다고 주장한다.
“‘용공 조작은 없었다. 이것은 진짜 남한 변혁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다.’ 나를 포함한 86세대 운동권이 박정희 시대 4대 공안사건(인혁당, 통혁당, 해방전략당, 남민전 사건)에 대해 배우고 후배들에게 가르친 내용이다. 당시 ‘명백한 공산좌익’ 무리들이 설쳐댔다. 그런 무리를 단속한 게 탄압인가? 내막을 모르고 엮인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과오이지 자랑일 수 없다.”
- 5.16을 필두로 10월유신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정치’의 요체(要諦)는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자유’를 심장(心臟)으로 하는 자유민주체제일 때만 생명력을 가지며, 자유를 부정하는 공산 전체주의를 반대하지 않으면 사망한다는 진리를 알고 실천한 것이다. 5.16의 목표가 반공 태세 재정비 강화였다면, 10월유신은 공산주의와 대결해 이기는 실력 배양을 향해 확고히 나아간 것이었다. 10월유신은 5.16의 연장선에 있는 또 한번의 5.16이다.”
◇“박정희의 핵심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
그의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 선포한 국민교육헌장은 ‘반공·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愛國愛族)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기반이다’고 갈파했다. 이것은 5.16과 10월유신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치’의 핵심에 대한 압축적 설명이다. 동서양 세계 모든 나라의 현대사는 ‘반공민주 정신’ 없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존립할 수 없음을 증명해 오고 있다. 한국의 자유민주체제는 더없이 취약하고 허약한 상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반공(反共)민주정신을 굳건히 했기에 지켜지고 성장할 수 있었다.”
- 박정희는 16년 대통령 재임 기간(1963~79년) 중 9%대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는 감성(感性)팔이, 즉 포퓰리즘(populism·여론영합 정치)을 하지 않았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고 했고, 자조(自助)정신의 원칙을 지켰다. 우량기업을 우대하는 수출진흥정책을 폈고 새마을운동에서도 앞서가는 쪽을 먼저 격려하는 차등 지원을 했다. 이런 접근이 국민들의 분투(奮鬪)를 용솟음치도록 했다.”
- 1964년 1억달러대이던 우리나라 수출은 박정희 후반기인 1977년에 100억달러로 13년 만에 100배 성장했다. ‘박정희 경제학’으로 불릴만한 성취인데.
“박정희가 ‘기업천하지대본(企業天下之大本)’을 최고 국정 지표로 삼고 기업 키우기에 혼신(魂神)을 다한 결과다. 그는 1965년 2월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매월말 청와대나 중앙청에서 2시간씩 수출진흥 확대회의를, 1966년부터는 매달 월간경제동향 보고회의를 열었다. 기업대표들이 참석한 민관 합동회의를 148차례 직접 주재하며 지원했다.”
그는 “박정희의 탁월(卓越)함은 그가 단순히 중소기업 배려·지원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누비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독려하는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 있다”고 했다.
◇“20년 연평균 9% 성장...5천년 역사 물길 바꿔”
- 박정희 집권이 한민족 역사에서 갖는 가치(價値)라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 전반에 7.3%, 60년대 후반에는 5년 평균 11.8%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민족(韓民族)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고도성장이다. 1961년부터 80년까지 20년 동안 우리나라는 연평균 9%대라는, 인류사에 없던 성장률을 달성했다. 박정희는 5000년 한민족 역사의 물길을 바꾸었다. 이런 사람이 영웅(英雄)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영웅인가?”
- ‘박정희의 근대화’에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가?
“그가 주도한 ‘근대화’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역사적 성취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공산주의로 붉게 채색된 상태에서 6.25로 폐허의 세계 최빈국이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도약한 것은 세계적으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강호 위원의 이어지는 말이다.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망국(亡國), 건국(建國)과 부국(富國)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된다. 망국의 굴욕을 딛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운 이승만의 위업을 물려받은 박정희는 민족중흥에 매진해 부강한 대한민국의 기틀을 다져놓고 삶을 마감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근대화를 이룬 진정한 진보적 정치가(statesman)이다.”
◇“근대화 이룬 진정한 진보적 政治家”
- 박정희가 꿈꾼 것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었나?
“그는 가난 탈피를 넘어 우리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발전된 ‘문명적 삶’을 가져 보자고 외쳤다. 그의 ‘조국 근대화’는 그런 의미였다. 국민들은 이에 호응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는 기원과 각오로 달렸고, 마침내 국가적 가난의 질곡을 끊고 약소국의 자격지심(自激之心)도 떨쳐냈다. 이 시대는 실로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진(前進)의 시대였다. 박정희의 발목을 잡으려 한 수많은 반대파들이 득세했다면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겠나?”
- 최근 출범한 윤석열 정부가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배울 점이라면?
“박정희는 1963년 10월13일 수원과 인천에서 마지막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지금 여건으로는 누가 집권해도 당장 잘 살게 할 수 없다.(…)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고 했다. 이게 진짜 지도자의 면모이고, 윤석열 대통령이 본받아야할 자세다. 국민에게는 박정희처럼 말하고, 악적(惡敵) 무리들에는 단호히 맞서기 바란다.”
◇“자유(自由)는 곧 자조(自助)다”
- 박정희의 ‘근대화’를 관통하는 정신이나 원리가 있다면?
“자조(自助·self help)의 원리라고 본다. 이것이 반(半) 만년 동안 우리 민족이 한 번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국가 부흥’이라는 한(恨)을 푼 열쇠이다.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조와 자립·자강의 정신으로 의타(依他)와 낙담, 무기력(無氣力)을 떨쳐버리자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자유(自由)는 곧 자조다. 이 원리를 국민정신으로 되살려 낼 때, 현재의 위기 극복과 일류국가로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 박정희를 원래 조금이라도 좋아했었나?
“정반대이다. 부산에서 초중고교를 모두 다녔는데, 1960년대부터 민주당 신파 청년당원으로서 김대중의 동교동계에서 활동한 아버지 영향으로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 생각은 단 한 개라도 입력될 틈 조차 없었다. 대학 입학 후에도 유신을 적대시하고 비판하는 운동권 논리에 흠뻑 빠져 있었다.”
- 그런데 어떤 계기로 전향했나?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소련 해체 후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대적 재정립을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지속적으로 작동가능한 경제체제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러다 칼 포퍼(Karl Popper)가 쓴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서구 지식인들은 플라톤 이래로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한 사회공학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결국 전체주의로 귀결될 뿐이다’라는 내용이 뼈에 저리게 다가왔다.”
◇“운동권 결별...보수우파 전향에 15년 걸려”
그는 이어 말했다.
“1992년 초에 10년의 운동권 생활을 마감하고 고민 끝에 김영삼 대선캠프에 참여한 뒤 1993년부터 청와대 공보비서실에서 근무했다. 당시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참조하기 위해 들여다본 여러 객관적 지표들이 운동권 시절 대자보와 유인물에 적었던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확인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노무현 정부 때 이미 사문화(死文化)된 상태나 다름없던 ‘국가보안법’을 굳이 폐기하려던 386운동권 출신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운동권 정권’ ‘전대협 정권’이란 생각을 굳혔고 완전히 결별하게 됐다”고 했다.
- 나름 고통과 번민이 많았을 듯 하다.
“예전의 인간관계가 속속 끊어지면서 많은 외로움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덧없이 세월이 흘러버렸다. 모두 감내해야 할 업(業)이었다. 청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에서 보수우파로의 전향은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이뤄지지 않았다. 기존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과 같았다. 15년쯤 걸린 것 같다. 지금 나에게 박정희는 ‘영웅’이다.”
◇“다시 위기의 한국...‘박정희 정신’ 부활 절실해”
이강호 위원은 인터뷰 내내 “박정희 체제는 ‘상시적 비상(非常) 체제’일 수밖에 없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 선포(1969)와 주한미군철수론 같은 안보위기 요인이 상존했고, 대내적으로는 ‘이면(裏面)에 좌익이 도사린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등 안팎의 도전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최악의 여건에서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경제성장으로 자유민주체제의 영속을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었으니, 박정희야말로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자’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박정희의 공과(功過)를 얼마라고 평가하는 것은 평론가적인 쉬운 접근이다. 박정희 시대는 세계사적으로도 반복하기 어려운, 불멸(不滅)의 성취 시대”라고 했다.
- 정작 지금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잊고 있지 않나?
“‘박정희의 업적을 인정해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박정희식(式) 정치’를 할 수는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분명히 각인해야 할 점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당시, 우리에겐 ‘상무(尙武)정신·기업가정신·자조정신’이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폐기된 유물이 아니다. 한국에 또다시 안팎의 큰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지금 같은 비상(非常)한 시기에는 비상한 의지와 결단, 무엇보다 박정희 정신의 현대적 부활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