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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로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한 달이 채 못 돼 함락 위기에 빠진 한성을 탈출한 선조가 던진 말이다. ‘내부(內附)’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붙는다’는 뜻이다. 즉 망명이다. 항전 한번 제대로 독려하지 않은 왕이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도주하겠다는 말에 당시 영의정 류성룡이 이렇게 말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大駕離東土一步 則朝鮮非我有也·대가리동토일보 즉조선비아유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많은 사람은 류성룡이 보인 이 단호한 결기가 선조 마음을 바꿨고 그리하여 선조가 조선에 남아 전쟁을 치렀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보면 실상이 다르다. 결론부터. 요동 망명에 관해 선조는 류성룡을 비롯해 그 누구 말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선조는 끝까지 망명을 고집했다. 그러다 명나라 황실에서 실질적인 망명 거부 통보를 받고서야 조선 탈출을 포기한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조금 더 비겁했던 지도자 선조 이야기.
[박종인의 땅의 歷史] 303. 임진왜란 개전 초 선조가 명나라 망명을 포기하게 된 진상
도주를 결정하기까지
14대 조선 국왕 선조는 인복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이산해, 정철, 윤두수, 이순신, 권율, 정탁 같은 쟁쟁한 문무 관료들이 선조를 보좌했다.
그런데 인덕은 부족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중국으로 망명하겠다며 우중(雨中) 야중(夜中) 수도 한성을 탈출한 지도자가 선조였고, 그 지도자에게 한성 백성은 경복궁을 불태워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작은 일본군이 동래에 상륙하고 8일이 지난 4월 21일이었다. 문경에 도착한 경상 순변사 이일이 조정에 급전을 날렸다. 열여덟 자였다. ‘今日之賊有似神兵 無人敢當 臣則有死而已(금일지적유사신병 무인감당 신즉유사이이)’. ‘오늘 적은 신이 내린 병사 같아서 감당해낼 자가 없나이다. 신은 오직 죽을 따름입니다.’(박동량, ‘기재사초(寄齋史草)’ 下, 임진일록 권1, 4월 21일)
조선 정부는 전율했다. 선조는 즉시 여행용 미투리(짚신)을 구해놓고 말들을 대기시키라 명했다. 다음 날 함경도에서 용맹을 떨친 무관 신립을 충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전략 요충지인 문경새재를 비워버리는 한심한 계책을 썼다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게 새재 너머 달천 평야에서 궤멸됐다.
한성을 버리던 날
선조는 이미 궁궐에 들어와 있던 광해군은 물론 궐 밖에 살던 식구들도 모두 불러들였다. 경복궁에는 선조와 그 비와 후궁 5명, 아들 7명, 딸 2명, 며느리 5명, 사위 1명 이렇게 22명과 두 형이 집합해 있었다.(신명호, ‘임진왜란 중 선조 직계 가족의 피난과 항전’, 군사 81호, 군사편찬연구소, 2011)
4월 27일 “죽을 따름”이라고 했던 이일이 상주전투에서 대패했다. 이일은 ‘말을 버리고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알몸으로 달아나’(류성룡, ‘징비록’, 김시덕 역주, 아카넷, 2013, p178) 조정에 패전 보고서를 올렸다.
그날 요동 망명이 처음으로 어전회의 안건으로 상정됐다. 상정한 사람은 선조 본인이었다. “계속 기세를 몰아온다면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천자(天子)에게 간절히 요청하려 한다. 상국이 어찌 애처롭게 여겨 주지 않겠는가.”(회의 참석자 이정귀, ‘월사집’ 1, ‘임진피병록’) 류성룡이 말했다. “한번 다른 나라로 건너가면 곧 기공(寄公·나라 잃은 임금)이 됩니다.”
그런데 선조가 원하던 말은 영의정 이산해에게서 나왔다. “천문(天文)을 보니 천자가 반드시 허락해 줄 것입니다.” 즉시 선조가 말을 이었다. “중국은 땅이 넓다. 왜군이 요동에 난입하면 버티지 못하겠지만 북경이 있고, 북경이 버티지 못해도 남경으로 옮겨가 피할 것이다.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는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더라도 차차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 최종 목표가 중국이고 북경에서 명 황실과 지낸 뒤 대륙을 횡단해 남경에서 안전하게 지내겠다는 뜻이었다.
다음 날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틀이 지난 4월 30일 새벽, 선조를 태운 가마가 빗속을 뚫고 모래재를 넘었다. 류성룡이 모래재에서 뒤를 보니 한성이 불타고 있었다. 흙탕을 뚫고 도착한 임진나루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일행은 나루를 관리하는 승청(丞廳)을 불태워 앞을 밝혀 강 건너 동파관에 도착했다.(앞 ‘징비록’, p207)
5월 1일 꺾이지 않은 고집, 망명
5월 1일 동파관을 출발해 개성으로 향하기 전 선조가 이산해와 류성룡을 불렀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류성룡이 말했다. 나흘 전 중국 고사를 인용한 발언보다 더 강경했다. “왕이 우리 땅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선조가 뜸도 들이지 않고 말했다.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 류성룡이 안 된다고 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의주로 간 뒤 위급하면 요동으로 가자”고 했던 도승지 이항복은 좌의정 류성룡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탈출하는 난파선 사람들
동파관을 떠난 일행이 개성으로 향했다. 왕실 사람들은 동파관과 판문에서 끼니를 때웠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이틀째 굶었다. 황해도 장단에 이르러 비로소 서흥에서 온 호위병 봇짐에서 현미 두어 말을 찾아 백관이 배를 채웠다. 경기도에서 따라왔던 병졸과 하급 관리들은 달아나고 없었다. 개성에 도착해 모두가 잠이 들었는데, 호위병 가운데 가위에 눌려 헛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었고 치고받고 싸우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궁녀 가운데에는 목을 칼로 찔러 자살하려는 이도 나왔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실록’) 그 사이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종묘를 불태웠다. 일본군에 붙어 길잡이 노릇을 하는 무뢰배가 매우 많았다.(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1일 “평양 사수” 선언과 도주
5월 7일 피란을 거듭하던 선조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개전 직전 명 황제 생일을 맞아 성절사(聖節使)로 유몽정이 선정됐는데, 선조는 평양에서 유몽정에게 이리 명했다. “북경에 도착하면 먼저 내가 망명하겠다는 뜻을 전하라.”(1592년 음 5월 1일 ‘선조수정실록’) 망명 계획은 여전히 유효했던 것이다. 유몽정은 “일단 전황 보고부터 하겠다”고 답하고 북경으로 떠났다.
6월 2일 선조가 평양성 문에 나아가 “죽음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선언했다.(1592년 음 6월 2일 ‘선조실록’) 8일 일본군이 황해도를 휩쓸고 대동강변에 도착해 군영을 설치했다. 10일 왕비가 함흥으로 가기 위해 채비를 하자 평양 주민들이 난을 일으켰다. 호조판서 홍여순도 두드려 맞았다. 칼과 창을 든 주민들이 거리마다 고함을 질러댔다.(1592년 음 6월 10일 ‘선조실록’) 다음 날 선조가 영변으로 떠났다.
6월 13일 요동 망명 최종 결정
6월 13일 영변에서 선조가 회의를 소집했다. “일찌감치 요동으로 가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었다.” 대신들이 “요동은 인심이 몹시 험하다”며 우회적으로 만류했다. 선조가 이리 말했다. “그렇다면 갈 곳을 말하라. 천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놈 손에 죽을 수는 없다(予死於天子之國可也 不可死於賊手·여사어천자지국가야 불가사어적수).”
그래도 반대 의견이 다수였다. 선조가 또 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세자를 여기 놔두고 나만 가면 되지 않겠는가.” 광해군에게 국내 문제를 맡기고 자기는 망명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렇게 거듭 말했다. “왜적 손에 죽느니 어버이 나라에 가서 죽겠노라(與其死於賊手, 無寧死於父母之國·무녕사어부모지국).” 대신 최흥원이 “안 받아줄 수 있다”고 의견을 냈다. 선조는 이리 답했다. “받아주지 않더라도 기필코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雖然予必渡鴨綠江矣·수연여필도압록강의).”
“안남이 멸망하고 중국에 입조해 나라를 살렸듯, 나 또한 나라를 살리려는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선조를 밀착하며 호종하던 사관(史官)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달아나버렸다.
선조는 다음 날 세자 광해군에게 병력 모집과 민심 위무를 위한 분조(分朝)를 명하고 망명과 원병을 청하는 자문을 명나라에 보냈다. 전시 관리는 세자가 맡고 본인은 요동행을 택한 것이다. 선조는 그 길로 의주를 향해 떠났다.(1592년 음 6월 13일, 14일 ‘선조실록’, 6월 1일 ‘선조수정실록’)
6월 18일 류성룡의 선택, 권력 이양
망명을 결사반대했던 류성룡은 요동행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류성룡은 더 과격한 계획을 세웠다. 선조로부터 세자에게 왕권을 양보받으려 한 것이다.
의주 가는 길목 선천에서 명나라 회답을 기다리는 동안 남인인 류성룡과 서인인 정철이 선조를 뵙자고 청했다. 두 사람은 “모두가 신(臣)들의 죄”라 아뢰고 별 이슈 없이 물러났다. 그런데 실록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두 사람은 “요동행밖에 방법이 없으니 아예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고 가시라고 하자”고 했으나 이 말을 하지 않았다.’(1592년 6월 18일 ‘선조실록’) 세자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해 전쟁을 지휘하게 하려 했다는 뜻이니, 아무리 간이 크고 결기 가득한 사람이라도 실천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6월 26일 거부된 망명
6월 26일 명나라에서 첩보가 들어왔다. 다음은 실록 기록이다. ‘명나라에서 우리나라가 내부(內附)를 청한 자문을 본 뒤 우리나라를 관전보(寬奠堡)의 빈 관아에 거처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상이 드디어 의주에 오래 머물 계획을 하였다.’(1592년 음 6월 26일 ‘선조실록’)
‘걸내부(乞內附·망명을 구걸한다)’라는 제목으로 ‘몸 둘 곳 없어 식구 몇을 데리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김영진, ‘임진왜란 2년 전쟁 12년 논쟁’, 성균관대 출판부, 2022, p90 재인용)고 애걸한 망명 요청에 압록강 건너 100리 북쪽 여진족 지역에 폐기된 관아 건물에 수용하겠다고 답한 것이니, 실질적인 거부였고 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북경이 무너지면 남경까지 가겠다’고 했던 선조는 망명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형식은 ‘조선 잔류 결정’이지만 실질은 거부당한 것이다.
7월 11일 명 황실 답이 도착했다. 첩보대로였다. ‘원하면 100명까지 관전보 수용, 구원병은 보냄’. 황명을 첨부해 명 황실 병부가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보낸 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조선이 대대로 동방에서 왕위(王位)를 누려 대국(大國)으로 일컬어졌는데 어찌하여 왜가 한번 쳐들어오자 멀리서 보기만 하고는 달아났는가. 놀랍고 이상스럽다.’(1592년 음7월 11일 ‘선조실록’) 이상 귀 닫은 지도자, 선조의 요동 도주 미수 전말이다.